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미국 정부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까지 1963년 16,000명이던 미군 병력들을 500,000명까지 증가시킴,
1969년 11월의 미라이 학살과 12월 미 정부의 징집 복권의 실시로 미 전역의 대학생들과 교사들은 자신이 징병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림,
1970년 4월 미군은 동캄보디아 지역을 공격함, 이는 미 전역에서 중립국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전국적인 시위의 촉발점이 됨,
오하이오 켄트 주립대학도 이 시위에 동참함, 1970년 4월 30일 닉슨 대통령의 "캄보디아 침공"이 발표되자 켄트 주립대에서도 본격적으로 시위가 시작됨,
1970년 5월 1일 켄트 주립대에서는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캠퍼스 안의 초원에서 시위를 시작함, 다만 오후 1시 수업이 시작되자 대부분 자진해산함,
그럼에도 5월 4일 다시 모여 시위를 하자는 팜플릿이 배포되어 많은 학생들이 동참함,
(당시 학생들이 받은 5월 4일 시위에 동참하자는 뜻의 팜플렛)
5월 1일 밤 켄트 시내에서는 취한 주정뱅이들이 술집을 떠나자마자 경찰차에 술병을 던지는등 반달리즘 행위가 일어남,
이와중에 은행의 유리창도 손상되어 경찰이 출동하는등 소동이 벌어짐, 경찰이 도착했을땐 도로에 모닥불을 피우는등 더욱더 강하게 대응하기 시작함,
이는 곧 켄트 시장인 리로리 사트론이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오하이오 주지사이던 짐 로즈와 상의후 켄트 전역의 술집을 폐쇄하라는 명령을 내림,
하지만 이 행동은 오히려 시위대를 자극함, 결국 경찰 기동대가 최루탄등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킴,
5월 2일 시청은 다수의 협박 편지를 받음, 경찰서장은 믿을만한 정보원이 오늘 주립대 ROTC 건물과 인근 모병소, 우체국들이 공격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함,
또한 일부 과격파 학생들이 무기를 탈취한후 켄트시의 수원을 LSD로 오염시킬 계획이 있다는 루머가 퍼짐,
리로리 사트론 시장은 짐 로즈 주지사에게 주방위군 파견을 요청함, 이는 빠른속도로 허가되었지만 허가된지 5시간만에 도착함,
그사이 주립대 ROTC 건물은 어느 방화범의 목표가 되어 활활 불타고 있었음, FBI 조사에도 불구하고 방화범은 잡히지 않음,
주방위군은 화재를 진압하려는 소방대와 경찰 병력을 보호하기위해 최루탄과 총검을 사용하여 1명의 학생이 경상을 입음,
5월 3일 로즈 주지사는 소방서 앞의 기자회견에서 학생 시위대를 "비미국인"이라 부르는등 강력히 비판함, 또한 주법원에 가서 계엄령을 선포할것이라고 협박함,
그날 일부 학생들이 시내로 들어와 폭동의 잔해들을 치우는등 거리를 청소했지만 사트론 시장은 지역 주민들의 압박에 통행금지령을 발령함,
그날 밤 시위에서 시위대는 사트론 시장과 학생회장 로버츠 화이트와 회담을 주장하며 밤 11시까지 시위를 지속함, 주방위군은 최루탄과 총검으로 해산시킴,
이로 또다시 다수의 학생들이 부상을 입음,
5월 4일 대학 관계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약 2천명의 학생들이 모여 시위를 시작함, 시위는 테일러 강당 근처의 "승리의 종"을 울리는것으로 시작함,
(승리의 종, 보통 대학 미식축구팀이 이기면 울린다)
제145보병연대의 A와 B 중대, 그리고 제107기병연대의 G 중대가 소집되어 로버트 캔터버리 준장의 지휘하에 시위대를 해산하라는 명령이 하달됨,
근처 경찰차에서 확성기로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무시됨,
주립대 경찰관인 해롤드 라이스가 3명의 주방위군 장병의 호위하에 시위대에 접근하여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오히려 시위대의 공격으로 후퇴함,
주방위군은 이에 M79 유탄발사기로 최루탄을 발사했지만 바람으로 인해 최루탄의 위력이 감소함, 일부 학생들은 최루탄을 주방위군 방향으로 다시 던지기도 함,
이에 96명의 주방위군 병력들은 M1 개런드 소총에 실탄과 총검을 착검한 상태로 시위대 방향으로 진격하기 시작함,
당황한 시위대들은 이에 돌을 던지는등 공격했지만 주방위군을 막지는 못함, 후퇴한 시위대중 일부는 운동장에 짱돌을 가저와 주방위군을 공격하는데 씀,
FBI 조사로는 이때 약 50명의 학생들이 돌을 던지는등 폭동행위가 절정에 달했음, 이에 G 중대는 앉아쏴 자세로 시위대를 향해 정조준을 함,
12시 24분 주방위군 병력들은 경고도 없이 시위대에 향해 실탄 사격을 시작함,
목격자 진술로는 마이론 프라이여라는 이름의 하사가 먼저 자신의 .45 구경 권총으로 사격을 실시하자 이에 근처 보병들도 사격을 시작했다 진술함,
13초 동안 77명의 주방위군 병력중 29명이 발포했으며 총 67발의 실탄이 발사됨, 주방위군의 사격이 시작된후에도 일부 학생들은 공포탄을 쏘는걸로 알았음,
당시 시위대는 G 중대가 앉아쏴 자세로 정조준을 가하고 있었음에도 "에이 설마 쏘겠어"라는 마음으로 비웃었다고 진술함,
이 사격으로 사망/부상당한 학생들은 다음과 같음:
제프리 글렌 밀러(Jeffery Glenn Miller):30-06 총탄이 열린 입으로 들어가 후두부 관통상으로 즉사함
(총상을 입고 사망한 밀러의 시체를 촬영한 사진,그해 퓰리처 상을 수상한 사진으로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사진으로 뽑힘)
엘리슨 베스 크라우스(Allison Beth Krause):좌측 상체의 30-06탄 총상, 구급대원이 도착하기 전에 사망(DOA)
월리엄 녹스 슈로더(William Know Schroeder):상체의 30-06탄 총상, 인근 로빈슨 메모리얼 병원에 도착후 수술중 사망, 켄트 주립대 ROTC 소속이였음,
산드라 리 사우어(Sandra Lee Scheuer):경동맥의 30-06탄 총상, 구급대원 도착후 수분후 과다출혈로 사망,
조세프 루이스:복부와 왼다리의 각각 30-06탄 총상,
존 클레리:좌측 상체의 30-06탄 총상,
토마스 그레이스:왼쪽 발목에 30-06탄 총상,
앨런 캔포라:오른쪽 손목에 30-06탄 총상,
딘 카흘러:30-06탄이 척추를 관통함, 영구적으로 하체가 마비됨,
더글라스 왠트모어:오른쪽 무릎에 30-06탄 총상,
제임스 러셀:오른쪽 허벅지의 30-06탄 총상과 오른쪽 이마의 버드샷이나 30-06탄으로 추정되는 찰과상,
로버트 스템스:둔부의 30-06탄 총상,
도날드 맥켄지:목의 30-06탄 총상,
대부분의 사망/부상자들은 주방위군으로부터 평균적으로 105m 가량 떨어저 있었으며 제프리 밀러는 81m 가량 떨어져 있었음,
주방위군 부상자는 로렌스 샤퍼 하사가 팔에 심한 피멍이 든게 고작으로 진통제를 투약받음,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주방위군 장병들이나 장교는 없었음, 다만 민사 소송에선 승소해서 유족들과 피해자들에게 675,000달러의 피해 보상금이 제공됨.
(현재 가치로 약 73억원 정도임, 이 사건은 후에 연방법원에서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판결받음)
보너스 아미때도 총질은 안하지 않았나.. - dc App
이래서 시위진압은 계엄하가아니면 군이 나오면 안되는것같은데..
미국은 이렇게 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