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기 앞서 집안 어른들이 낼 모레 90이 넘은 첫째 큰아버지 부터 우리 아버지는 낼 모레 칠순이시다 보니 기억이 단편적인 것을 알아 주었으면 함.
그리고 90년대 이산가족 상봉은 무슨 호텔 연회장에서 만났지만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땐 각 객실마다 따로 했는데
문을 다 열어놓고 북한군이 감시하고 있어서 길게 못했다고 함.
낙화암 관련 시도 눈을 피해서 고모부가 빨리 쓰고 넘겼다고.
시와 함께 그림도 있었음.
이하론 그냥 고모부라고 함 내가 아버지 고모부를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고모부가 원래 경상도 태생이신데 집안이 충남으로 이사가심
어릴 때부터 영재 소리를 들었는데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학교도 제대로 못가니까 우리집 종가(난 분가쪽임)에서 뒷바라지하고 익산에서도 살긴 함
종가가 익산에서 지주집이었음
다만 종가에서 뭘 가르칠 땐 인성이 바른 모습이어야 한다고 주로 유학을 가르쳤다고 함.
그외 한문 시쓰기, 수묵화도 가르침
아무튼 학교를 졸업할 때쯤엔 독학으로 영어, 일어, 중국어, 프랑스어를 배우셨다고 함.
유창하셨데.
당시 서양의학서가 전부 원문으로 되어 있어서 외국어를 잘하니깐 문중에선 의사 선생님(집안 주치의를 원했다고)이 되길 기대하셨는데 뜻이 있어서 서울대 예술학부로 들어가심 시나 그림을 주로 그리셨는데 집안에선 탐탁치 않게 여기면서도 서울대 학생 나왔다고 흐뭇해 했다고 함.
서울대서 작품도 여럿 출품 하셨다고.
그때가 1950년 이었는데 6.25가 터지고 서울이 함락되었는데 고모부는 피난을 안 떠나심.
겨우 서울대 들어갔는데 미련이 남은 것도 있고 설마 학생을 잡아갈 줄은 몰랐다고 함.
서울이 함락되고 3일 있다가 서울대에서 하교 할때 인민군이 잡아갔다고 함
전쟁 때 무슨 일을 겪으셨는진 모름
위에 썼듯이 감시가 워낙 심해서 깊게 이야기를 못나눔
다만 그분이 양 다리를 절고 이빨이 전부 철로 된 이빨(틀니?)이었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 호텔에서 설명해주심
북한군에서 탈영을 시도했다가 잡혔는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절벽에 서게 하고 북한군이 처형하려고 총을 겨누었는데 총맞으면 확실히 죽겠지만 절벽으로 뛰어내리면 안 죽을 지도 모른단 생각에 총 쏘기 전에 절벽에 뛰어 내리심
근데 절벽에 왠 나무 한 그루가 있더래 작은 소나무
그래서 고모부가 그 나무를 두 팔로 붙잡아서 매달림
그러니까 북한군이 고모부를 죽이려고 총을 마구 쐈지만 사격각이 안 나왔는지 양 다리만 총을 맞고 나중엔 떨어질 때까지 지켜 보기만 함
총알이 아까운 건지 부족한 것인진 모름
고모부는 어떻게든 살겠다고 양팔로 나무를 붙잡고 있다가 힘이 빠지자 한 팔로 잡기도 하다가 나중엔 양팔에 힘이 없어서 나무를 입으로 물고 버팀
고모부가 나무를 입으로 물고 버티니까 사람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절박하게 버티는 것을 보고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소좌인지 대좌(어른들 말씀이 엊갈림)가 쟤 살려주라고 혀를 내둘렀다고 함.
새끼줄로 올가미를 만들어서 끌어올렸데.
다리에 맞은 총상을 보곤 이제 다시는 못 도망 갈거라고 말했다고 함
그후 평생 목발이나 휠체어 없으면 거동이 불편하시게 되긴 함.
또한 그때 소나무를 물고 버텨서 어금니 몇개 빼곤 몽땅 다 빠짐.
그래서 그 이빨을 북한에서 철 이빨로 바꾸었고.
그후 서울대생이란 이유와 외국어를 잘하니까 중공군이 내려왔을 때 북한군이 통역병으로 썼다고 함
전쟁이 끝난 후엔 아무래도 인텔리 이다보니까 평양에서 머무르면서 예술 전공을 하셨고 80년대에 교수가 되심
조금 심심한 내용일 수 있는데 전쟁에서 그냥 어떻게든 살아남은신 한 인물의 이야기로 봐주었으면 함요.
낙화암 관련 시는 상봉이 끝난 후 집안 어른들이 복사해서 각자 하나씩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집은 없음 어른들께 여쭙땐 전화로 해서 확인할 수 없었음
그리고 90년대 이산가족 상봉은 무슨 호텔 연회장에서 만났지만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땐 각 객실마다 따로 했는데
문을 다 열어놓고 북한군이 감시하고 있어서 길게 못했다고 함.
낙화암 관련 시도 눈을 피해서 고모부가 빨리 쓰고 넘겼다고.
시와 함께 그림도 있었음.
이하론 그냥 고모부라고 함 내가 아버지 고모부를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고모부가 원래 경상도 태생이신데 집안이 충남으로 이사가심
어릴 때부터 영재 소리를 들었는데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학교도 제대로 못가니까 우리집 종가(난 분가쪽임)에서 뒷바라지하고 익산에서도 살긴 함
종가가 익산에서 지주집이었음
다만 종가에서 뭘 가르칠 땐 인성이 바른 모습이어야 한다고 주로 유학을 가르쳤다고 함.
그외 한문 시쓰기, 수묵화도 가르침
아무튼 학교를 졸업할 때쯤엔 독학으로 영어, 일어, 중국어, 프랑스어를 배우셨다고 함.
유창하셨데.
당시 서양의학서가 전부 원문으로 되어 있어서 외국어를 잘하니깐 문중에선 의사 선생님(집안 주치의를 원했다고)이 되길 기대하셨는데 뜻이 있어서 서울대 예술학부로 들어가심 시나 그림을 주로 그리셨는데 집안에선 탐탁치 않게 여기면서도 서울대 학생 나왔다고 흐뭇해 했다고 함.
서울대서 작품도 여럿 출품 하셨다고.
그때가 1950년 이었는데 6.25가 터지고 서울이 함락되었는데 고모부는 피난을 안 떠나심.
겨우 서울대 들어갔는데 미련이 남은 것도 있고 설마 학생을 잡아갈 줄은 몰랐다고 함.
서울이 함락되고 3일 있다가 서울대에서 하교 할때 인민군이 잡아갔다고 함
전쟁 때 무슨 일을 겪으셨는진 모름
위에 썼듯이 감시가 워낙 심해서 깊게 이야기를 못나눔
다만 그분이 양 다리를 절고 이빨이 전부 철로 된 이빨(틀니?)이었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 호텔에서 설명해주심
북한군에서 탈영을 시도했다가 잡혔는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절벽에 서게 하고 북한군이 처형하려고 총을 겨누었는데 총맞으면 확실히 죽겠지만 절벽으로 뛰어내리면 안 죽을 지도 모른단 생각에 총 쏘기 전에 절벽에 뛰어 내리심
근데 절벽에 왠 나무 한 그루가 있더래 작은 소나무
그래서 고모부가 그 나무를 두 팔로 붙잡아서 매달림
그러니까 북한군이 고모부를 죽이려고 총을 마구 쐈지만 사격각이 안 나왔는지 양 다리만 총을 맞고 나중엔 떨어질 때까지 지켜 보기만 함
총알이 아까운 건지 부족한 것인진 모름
고모부는 어떻게든 살겠다고 양팔로 나무를 붙잡고 있다가 힘이 빠지자 한 팔로 잡기도 하다가 나중엔 양팔에 힘이 없어서 나무를 입으로 물고 버팀
고모부가 나무를 입으로 물고 버티니까 사람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절박하게 버티는 것을 보고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소좌인지 대좌(어른들 말씀이 엊갈림)가 쟤 살려주라고 혀를 내둘렀다고 함.
새끼줄로 올가미를 만들어서 끌어올렸데.
다리에 맞은 총상을 보곤 이제 다시는 못 도망 갈거라고 말했다고 함
그후 평생 목발이나 휠체어 없으면 거동이 불편하시게 되긴 함.
또한 그때 소나무를 물고 버텨서 어금니 몇개 빼곤 몽땅 다 빠짐.
그래서 그 이빨을 북한에서 철 이빨로 바꾸었고.
그후 서울대생이란 이유와 외국어를 잘하니까 중공군이 내려왔을 때 북한군이 통역병으로 썼다고 함
전쟁이 끝난 후엔 아무래도 인텔리 이다보니까 평양에서 머무르면서 예술 전공을 하셨고 80년대에 교수가 되심
조금 심심한 내용일 수 있는데 전쟁에서 그냥 어떻게든 살아남은신 한 인물의 이야기로 봐주었으면 함요.
낙화암 관련 시는 상봉이 끝난 후 집안 어른들이 복사해서 각자 하나씩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집은 없음 어른들께 여쭙땐 전화로 해서 확인할 수 없었음
국립국어원 피셜 아버지의 고모부는 고모할아버지 라고 함
ㅜ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