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중국 닝보시의 미국인 선교사인 아치볼드 크라우치는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중국에서 미국인 철수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남아서 중국인 어린이들을 돌보던중 10월 27일날 저녁, 단 1기의 일본군 폭격기가 닝보시 위로 비행하는걸 목격함,
당시 일본군 폭격의 대부분은 대규모의 폭격기 전단을 이끌고 오전 10시에서 오후 3시 사이에 인3213213구가 밀집된곳을 주로 폭격했음,
크라우치를 비롯한 대부분의 닝보시 시민들은 단 1기의 폭격기만 나타난걸 보고 의문을 품었지만 불과 3일만에 왜 1대만으로도 충분했는지 깨달음,
3일뒤 닝보시에선 페스트 감염환자가 발생함,
그 단 1기의 일본군 폭격기는 특수제작된 도자기 폭탄에 밀과 천을 포함한 생필품과 페스트균에 감염된 쥐벼룩을 섞어서 투하함,
하늘에서 생필품이 떨어지는걸 본 닝보시 시민들은 떨어진 폭탄에 가까이 다가갔고 곧 페스트균에 감염된 쥐벼룩에 물려 감염됨,
이 작전은 당연하게도 731 부대가 주도한 작전으로 처음 입안시에는 고고도에서 일반적인 항공폭탄으로 살포하는 방식을 검토함,
당연히 먼저 수천미터 상공에서 떨어트린 쥐벼룩과 페스트균은 동사하기 일수였고 또한 폭탄이 폭발할때도 대부분의 쥐벼룩이 '소독'당함,
이를 위해서 도자기 폭탄이 제작되었는데 최적의 투하고도를 알기 위해서 벌판에 마루타를 세워놓고 수십번이나 실험함,
결과적으로 이 작전은 크게 성공하지 못함,
본디 예상된 1,450명의 사망자중 감염자는 불과 165명에 불과했고 사망자는 그중 112명이 사망했음,
페스트균은 인수공통감염병으로 중세시대엔 사람의 출입을 막아도 어느 구멍으로 기어들어간 쥐 하나로 도시 하나가 전멸하는 경우가 빈번했음,
WHO의 실험으론 인23구 500만명의 대도시에 50kg의 페스트균이 살포되면 약 3만 6천여명이 사망한다고 발표함, 서울 하나에서만 7만 2천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함,
다행히도 현재 페스트균을 효과적으로 죽일수 있는 항생제가 개발되어 1950년대 이후 페스트균 대량 발병사례는 극히 줄어듬,
1940년 닝보시에선 감염된 환자들을 4미터 높이의 벽을 세운 격리구역에 감금한뒤 환자의 애완동물들을 포함한 인근의 설치류들을 몰살함,
이는 800년전의 대유행의 경험에서 실시한 방역수칙으로 본래 1,450명의 사망자 예상치중 8%인 112명만 사망하고 끝남,
동년 유럽에선 독일군이 벨기에를 통해서 프랑스를 침공했음, 프로이센 시대부터 1차대전까지 독일은 벨기에를 통해서 프랑스를 침공함,
아르덴 숲을 프랑스군과 독일군 지휘부가 예상한 10일을 비웃듯이 수십시간만에 돌파한 독일군의 보병들과 전차병들은 '각성제'에 취해있었음,
그 각성제란 상표명 페르비틴, 성분명 메스암페타민인 마약으로 1887년 독일에서 처음으로 합성되고,
1893년 일본에서 대량으로 합성된 이 '각성제'는 1937년 독일에서도 민간에 시판되기 시작함,
그때부터 페르비틴을 복용하면 야간행군중에도 잠도 안자고 행군이 가능하고 집중력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안 부대 지휘관들이 이를 보급하기 시작함,
아르덴의 독일군 제19기갑사단의 지휘관인 하인츠 구데리안은 3일동안 약빨고 달린 결과 아르덴 숲을 불과 수십시간만에 돌파했고,
사막에서의 독일군 제7기갑사단의 지휘관인 에르빈 롬멜은 부하들한테 페르비틴을 보급하면서 연합군을 유린하면서 진격함,
독일군의 전격전 전술은 속도가 중심인데 페르비틴은 잠도 안자고 독일군이 번개와 같이 진격하는데 연료가 됨,
프랑스군의 상식을 초월한 속도로 약 빨고 돌격하던 독일군은 프랑스 침공이 시작된지 불과 7주만에 파리를 점령하고 프랑스는 항복함,
육군만 페르비틴을 사용한건 아니였음, 짧아도 수십분, 길면 수시간동안 비행해야하는 전투기와 폭격기 조종사들도 페르비틴을 복용함,
1945년 일본의 패방이 짙어지던 그해 출격하던 카미카제 부대원들의 마지막 식사는 메스암페타민(히로뽕)이 들어간 차였음,
전후인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도 독일 선수들은 약 빨고 참가함, 경기 직전 헝가리 선수들은 독일 선수들의 눈이 풀린걸 목격함,
그날 독일은 헝가리와의 경기에서 3:2로 승리함,
베른의 기적으로 불리던 이 기록은 2010년 독일 신문이 1954년 월드컵때 마약을 사용했다는 폭로를 시작하면서 재평가되기 시작함,
메스암페타민 같은 마약류는 아니여도 항정신제 같은 약물은 미국과 영국군을 포함한 서방 조종사들도 복용함,
그들이 싸우는 이슬람 극단주의 반군도 마찬가지로 속칭 지하드 알약으로 불리는 마약을 섭취하고 미군과 싸웠음,
지하드 알약의 주 성분은 페네탈린으로 암페타민과 테오필린을 합성한 성분으로 이들은 진한 커피에 암페타민을 타먹은것과 같은 효과를 보며 싸웠음,
2020년에는 이탈리아 경찰이 IS 조직원들의 근거지에서 무려 14톤에 달하는 지하드 알약을 발견함,
전쟁에선 메스암페타민과 같은 각성제류 마약만 사용된게 아니라 모르핀과 아편과 같은 진통제류 마약도 사용됨,
아편전쟁 이후 진통제로 사용되던 아편은 1850년대 주사기의 개발로,
기존의 코로 흡입하거나 먹는 수준으로 제한된 투약 방법에서 더욱 많은 양을 투약할수 있었음,
모르핀은 1804년 독일에서 처음 아편에서 분리된 이후 인도등 아시아에서 재배된 아편에서 대량으로 생산된후 유럽에 퍼저나감,
특히 군대에선 진통효과에 주목하곤 1860년대의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북을 가리지 않고 진통제 용도로 부상병들에게 투약하기 사작함,
전후 모르핀에 중독된 퇴역군인들이 늘어나자 이는 곧 군인병으로 불리며 사회의 문제가 됨, 남북전쟁 당시에는 모르핀 투약에 제한이 없었음,
그냥 부상병이 주사를 놓고도 아프다고 하면 또 주사하고 또 아프다고 하면 다시 주사하는등으로 모르핀 중독으로 사망하는 부상병도 많이 발생함,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당시 이라크는 1차대전때 사용된 겨자가스나 염소가스와는 비교도 안될정도록 강력한 생화학무기를 보유했음,
유기인계 화학물로 불리는 이 가스는 본디 농약으로 쓰이던걸 대인상대 살상률이 높다는걸 발견하고 무기로 전환된 사례임,
1988년 사담 후세인은 이 가스를 사용해 쿠르드인 5천여명을 학살함, 이를 목격한 미군은 걸프전때 이라크가 이를 사용할 가능성을 고려함,
물론 이를 막을수 있는 방독면과 아트로핀 주사제 같은 보호장구가 있었지만 수만 수십만이 한번에 노출되면 미군이라도 이를 수습할 배짱이 없었음,
아트로핀 주사제는 분명 가스에 노출되면 해독제지만 노출되지 않은 사람에 주사하면 극소량으로도 독살할수 있는 맹독이기도 함,
미군은 피리도스타민 브로마이드라는 예방약을 보급했는데 복용시에는 부교감신경을 적당하게 자극하여 가스 중독에 대처할수 있었음,
문제는 매일 3정만 복용해야 했지만 긴장한 미군 병사들과 지휘관은 이라크군이 움직이기라도하면 복용하라는 피해망상에 빠져 과다복용하는 미군이 생김,
걸프전 종전 이후 참전 미군들이 겪고 있는 걸프전 증후군의 원인으로 뽑히는 피리도스타민 브로마이드 과다복용은 의약품도 독약이 될수 있다는걸 간과한 결과로,
피리도스타민 브로마이드는 피조스티그민이라는 또다른 독약을 기반으로 만든 해독제로,
피조스티그민은 딱 1알만 먹어도 목숨이 위험한 칼리바르 콩에서 분리한 성분임,
1904년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뤼순지역의 203고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은 고다마 겐타로 장군은 문제를 직면함,
그 아무리 황군의 선봉대라 불리던 일본 최정예 보병도 러시아군의 기관총이 뱉어내는 총알을 맞으면 뒤진다는걸 둘쨰치곤 병사들이 아프기 시작함,
각기병, 각기병은 이미 일본 해군에선 사라진 병이지만 뤼순을 공략하던 일본 육군 사이에선 흔하게 발병하던 병이였음,
203고지 위의 러시아군 요새의 지휘관인 로만 콘트라첸코 소장은 드디어 쪽바리들이 기관총을 두려워하는건가 생각하곤 숨을 돌림,
그럼에도 러시아군도 병이 걸리기 시작함, 괴혈병, 영국에선 괴혈병이 사라졌다는데 왜 러시아군만 걸리는건지 콘트라첸코 소장은 한숨을 쉼,
다행인점으로 일본군도 각기병으로 고생하는걸 보며 10개월이나 지속된 전투를 지속하기로 결심함,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사망자만 8만 4천여명으로 이중 각기병으로 사망한 병력들은 2만 7천여명,
예비군까지 100만명을 영끌한 일본군중 25만명이 각기병으로 전투에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탈함,
각기병은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몇년전인 1896년 원인이 발견된 질병이지만 왜 일본군이 각기병으로 고생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음,
다카기 히네이로, 30살의 젊은 일본 해군 군의관은 영국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상태로 1879년 돌아왔을때는 일본 해군도 각기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음,
처음에는 손발이 저리다가 식욕 감퇴까진 뭐 그려러니 해도 시간이 지나자 바닥에 주저 앉고 손으로 누르면 살이 푹푹 들어가다 호흡곤란으로 사람이 죽는 병,
각기병은 반찬이 다양하기 제공되는 해군 장교들과 항구에서는 발병하지 않았지만 고작 쌀밥과 간장으로 식사를 하던 항해중의 수병들만 걸리던 병으로,
다카기는 각기병이 쌀밥대신 잡곡밥을 먹으면 해결된다는걸 발견했지만 그 누가 쌀밥먹기 위해서 입대한 해군인데 잡곡밥으로 식단을 바꾼다면,
폭동이 일어날게 뻔하기에 다카기는 영국 해군이 먹던 카레에서 해답을 발견함, 카레에는 당근 감자를 비롯한 다양한 채소와,
쥐꼬리만큼이지만 고기도 들어가니 영양소가 공급되고 각기병을 예방할수 있다는 결론을 내림, 지금도 학교와 군대에서 지겹도록 먹는 카레라이스가 개발됨,
카레라이스가 도입된 1884년 다카기가 탑승한 함정에선 개선된 식단을 거부한 14명만 각기병이 발병함,
작년엔 276명중 169명이 각기병에 걸리고 25명이 사망한걸 비교하면 엄청난 개선이였음,
1883년에는 5,346명이던 일본 해군중 1,236명이 각기병에 걸려 49명이 사망함, 1884년에는 겨우 3명만 각기병에 걸리고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음,
일본 해군에선 해결한 각기병을 육군이 해결하지 못한 이유는 모리 린타로라는 도쿄대를 최연소로 졸업하고 독일까지 유학갔다온,
어느 육군 군의관의 고집이 큰 역할을 함,
1894년 청일전쟁때도 육군만 각기병으로 고생하던중 해군이 해결했다는 소식을 들은 모리 린타로는 각기균을 찾기 위한 똥꼬쇼를 하고 있었음,
모리 린타로를 제외한 해군 군의관들과 일본의 의학전문가들은 균이 원인이 아니라는걸 알았지만,
지 선생 따라서 각기균을 찾던 모리 린타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림, "쌀밥 더 먹이자",
당시 일본은 조선을 포함한 식민지로부터 쌀을 매우 저렴하게 매입한 다음 군대에 보급하고 있었음, 쌀밥을 더 주는건 일도 아니였기에,
일본 육군은 쌀밥을 더 먹기 시작함 그래서 각기병이 낫기는 개뿔 간장 한 종지로 반찬을 대신하던 일본 육군은 각기병 환자가 계속 발병함,
일본군의 개고생은 이후 2차대전때도 계속됨
옆에서 동료가 죽고, 직접 사람을 죽이는 그런 전투가 끝나고도 맨정신이라면 그건 이미 정상이 아닐듯
개추ㅇㄷ
각기병은 육군이 삽질한게 크네
각기병은 병신새끼를 왜 걸러야하는지에 대한 사례임? ;;
이미 해군에서 영양소 골고루 주면 된다고 해결법을 줬는데 그놈의 자존심으로 해군 방법을 기열땅개가 거부함
그놈의 자존심이 뭐길래
페스트균을 뿌렸는데 의외로 많이 안 죽었네. 일본이 예상한 사망 숫자도 고작 1,450명밖에 안 되고. 지금도 중국은 더럽기로 유명하고, 40년대엔 더 더러웠을 테니 바이러스 공격에 취약할 줄 알았는데. 그나저나 고작 1,450명만 죽는다고 예상했다면 이 작전 굳이 실행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님? 들인 수고에 비해 성과는 별로면서 악독하다고 욕막 먹는, 가성비가 형편없는 작전 같은데
그당시에는 살포방법이 구렸거든. 지금처럼 세균을 대량으로 동결건조해서 살포했다면 아마 천명대는 우습게 넘었을걸?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