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평양성 전투 관련해서 '고니시 그거 당장 비전투 손실로 병신이었는데 왜 다 못 쳐부쉈음? 아깝다.'라는 글이 있었는데 좀 많이 잘못 알고 있는 거 같아서 정리해봄.



1. 평양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군의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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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에 잘 정리되어 있듯이,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의 1번대는 고니시가 이것저것 다 땡겨서 영끌해 모은 병력으로 18,700명의 총 병력을 갖추고 있었다. 여러 연구들에서 지적하듯이, 개전 초 고니시군은 부산포에 상륙한 이래 여러 전투들에서 쭉 조선군을 압도적으로 몰아붙이면서 쾌진격을 감행했고 그 과정에서 이렇다 할 큰 피해는 없었다. 오죽하면 루이스 프로이스가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군들에게서 증언을 받아 기록한 '일본사'에서 '조선군은 마치 힘주어 흩으면 그대로 흩어지는 양 떼와 같았다.'라고 했을까.


그러니 평양성에 죽치고 있던 당시 고니시군은 참전 초기의 병력에서 크게 차이 나지 않았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얘네 군량 보급 못 받고 평양성에 고립되어서 이미 병력 다 잃어가던 거 아님?



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 1월 10일 을축 9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이 제독이 왕진을 보내 평양을 수복하였음을 전하다.


이 제독(李提督)이 야불수(夜不收) 왕진(王眞)이란 자를 보내어 ‘평양의 왜적을 이미 모두 죽여 물리쳤으니 국왕은 안심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왕진이란 자가 또 말하였다.


"왜적 중에 남경인(南京人)이란 자가 꿇어앉아 청하기를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영원히 다시는 난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하니, 제독이 꾸짖기를 ‘왜놈들아, 앞서 심 유격(沈遊擊)을 시켜 퇴병(退兵)하라고 하였는데 지금까지 머물러 있어 대군(大軍)으로 하여금 멀리서 와 수고하게 하였으니 너희 죄는 죽어 마땅하다.’ 하고, 모조리 죽였습니다. 왜적 4∼5천 명이 도망하여 산으로 올라가자 곧바로 군사를 내어 포위하였었는데 오늘과 내일 사이에 모두 죽일 것이라고 합니다. 또 왜장(倭將) 한 명을 사로잡았고 빼앗은 환도(環刀)는 창고에 쌓아 두었으며, 왜적의 옷도 버려져 있는 것이 많았고 군량은 3천여 석만 남아 있습니다."



위의 기록에서 보이듯이 당시 평양성에는 대규모의 조세미가 비축되어 있었고, 평양성에 눌러앉은 고니시군은 그걸 파먹으며 닝기리 딩딩다리 하고 앉아 있었다. 딱히 이 시점까지 상황이 막막하고 고달프기는 해도 무슨 애들이 굶어 죽어가고 그런 일은 없이 점령 당시까지도 남아있던 군량미로 버티고 있었던 거다. 그러니 당장 고니시군이 4차 평양성 전투가 벌어졌던 시점에 이르러서 이미 전투력을 상실했을 거라는 단서는 전혀 없다.



2. 평양성을 공격한 명군의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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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명군의 당시 참전 병력을 계산해보자. 당시 명군의 규모는 조선왕조실록에도 그 기록이 상세하게 남아있다.(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 1월 11일 병인 16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중국군 각영의 영병 수목.) 무려 각 부대 지휘관과 휘하 병력 규모에 각 부대의 기/보 구성이 어떠했는가까지 나와있는데, 그 총 병력수를 합하면 당시 명군이 평양성에 투입한 총 병력은 43,500명이다.


명군의 규모로만 보면 당시 고니시군의 약 2.5배 정도 규모였던 것을 알 수 있다.



3. 평양성을 공격한 조선군의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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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기록이 티미한 것은 이 전투에 참여한 조선군의 규모다. 당장 전투 당시의 기록에는 명군의 휘하로 전선의 한 일면을 맡아 밀어붙였던 조선군의 규모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주요 지휘관인 이일, 김응서 등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다.


이 지휘관들의 면면을 토대로 당시 참전 조선균의 규모를 추정해볼 수 있는 기록은 평양성 수복 직후에 나타난다.



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 1월 11일 병인 15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각도에 있는 병마의 숫자.


...평안도 순안현(順安縣)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이일(李鎰)의 군사 4천 4백 명 내에 사수(射手) 1천 2백 80명, 법흥사(法興寺)에 주차한 본도 좌방어사 정.희운(鄭希雲)의 군사 2천 명 내에 사수 2백 23명·포수(砲手) 50명, 의병장 이주(李柱)의 군사 3백 명 내에 사수 70명, 소모관(召募官) 조호익(曺好益)의 군사 3백 명 【이상은 평양부(平壤府) 동쪽에 있으며 본부와는 1일 정이다. 】 용강현(龍崗縣)에 주차한 우방어사 김응서(金應瑞)의 군사 7천 명 내에 사수 7백 70명, 조방장 이사명(李思命)의 군사 1천 명 내에 사수 90명, 대동강 하류에 주차한 수군장[舟師將] 김억추(金億秋)의 군사 3백 명 내에 사수 1백 20명, 【이상은 평양부 서쪽에 있으며 본부와의 거리는 1일 정이나 반일 정이다. 】 황해도 황주(黃州)에 주차한 본도 좌방어사 이시언(李時言)의 군사 1천 8백 명, 재령군(載寧郡)에 주차한 우방어사 김경로(金敬老)의 군사 3천명, 연안부(廷安府)에 주차한 본도 순찰사 이정암(李廷馣)의 군사 4천 명이다. 【이상은 왕경에서 서북쪽, 평양부에서 남쪽에 있으며 왕경과의 거리는 7∼8일 정이며 평양성과의 거리는 1∼2일 정이나 4∼5일 정인데 모두 대동강 남쪽에 잇따라 있다. 】



전투 직후 추가적으로 모집하거나 편성한 증원 병력도 있을 것이기에 여기에 나타난 이일과 김응서의 병력 전체가 평양성 전투에 투입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 쳐도 대략 전투 당시에는 1만 정도의 상당한 규모의 조선군이 투입되었을 것을 추정할 수 있다. + 거기에 사명대사가 이끄는 수효를 알 수 없는 승병들까지.



4. 전투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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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전투의 과정은 실록 기사로 대신한다.



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 1월 11일 병인 13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평양 수복 전투의 전모를 기록한 기사.


...8일 이른 아침에 제독이 향을 피우고 좋은 날을 점쳐서 가린 다음 삼군(三軍)이 전식(傳食)하기를 마치자, 삼영의 장수와 함께 각 해당 군사들을 나누어 통솔하여 성밖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유격 장군(遊擊將軍) 오유충과 원임 부총병(原任副總兵) 사대수는 모란봉을 공격하고, 중군(中軍) 양원과 우협 도독(右協都督) 장세작은 칠성문(七星門)을 공격하고, 좌협 도독(左協都督) 이여백과 참장(參將) 이방춘은 보통문을 공격하고, 부총병 조승훈과 유격 낙상지는 본국(本國)의 병사(兵使) 이일(李鎰), 방어사(防禦使) 김응서(金應瑞) 등과 함구문(含毬門)을 공격하였다.


여러 군사가 비늘처럼 늘어서서 점차로 진격하였는데, 빙판길을 바라보니 말발굽에 날리는 얼음 조각과 잡다한 티끌이 흰 안개처럼 공중에 가득하였으며, 해가 떠올라 투구와 갑옷에 내려 비치자 은빛이 찬란하고 만상(萬狀)이 현란하게 빛나 매우 장관이었다. 적도 성가퀴 위에서 오색의 깃발을 많이 펼치고 긴 창과 큰 칼을 묶어 날을 가지런하게 하여 밖으로 향하게 하여 항거하며 지킬 계획을 하였다. 제독이 친병(親兵) 1백여 기(騎)를 거느리고 성 아래로 바싹 진격하여 장사(將士)들을 지휘하였다. 조금 있다가 대포 1호(號)를 발사하자 각진에서 잇따라 일제히 발사하니 소리가 우레와 같아 산악이 흔들리는 듯하였으며, 어지럽게 화전(火箭)을 발사하자 연기와 화염이 수십 리에 가득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으며, 단지 고함소리만 포(砲) 소리에 섞여 들리는 것이 수많은 벌이 윙윙대는 것 같았다. 잠시 후에 서풍이 갑자기 일어 포연(砲烟)을 거두어 곧바로 성안으로 몰려갔는데 세찬 바람에 불길이 몹시 거세었다.


먼저 밀덕 토굴(密德土窟)에 불이 붙으니 붉은 화염이 하늘에 뻗치고 부근으로 번져 모두 태웠으며 성위의 적의 깃발도 잠깐 사이에 바람에 쓰러졌다. 제독이 여러 군사들을 고무시켜 성에 다가가자 적이 성가퀴 안에 엎드려 있다가 어지럽게 연환(鉛丸)을 쏘며, 끓는 물을 붓고 큰 돌을 굴리며 저항하였다. 많은 군사들이 조금 퇴각하자 제독이 손수 겁을 먹고 퇴각하는 자 중 한 사람의 목을 베어 진(陣) 앞에서 돌려가며 보인 다음 제독이 앞장서서 진격하면서, ‘먼저 성에 오르는 자는 은 5천 냥을 상으로 주겠다.’고 소리쳤다. 오유충(吳惟忠)은 탄환을 맞아 가슴을 다쳤는데도 전투를 더욱 힘써 독려하였으며, 낙상지(駱尙志)는 함구문(含毬門) 쪽의 성을 따라 긴 창을 가지고 마패(麻牌)를 짊어지고 몸을 솟구쳐 성가퀴에 오르는데 적이 던진 큰 돌을 발에 맞아 다쳤지만 그것을 무릅쓰고 곧바로 올라갔다.


여러 군사들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그를 따르니, 적이 감히 저항하지 못하였다. 절강(浙江)의 군사가 먼저 올라가 적의 깃발을 뽑아 버리고, 명나라 군사의 기를 세웠다. 제독이 좌협 도지휘(左協都指揮) 장세작(張世爵) 등과 칠성문을 공격하였으나 적이 문루(門樓)에 웅거하였으므로 쉽게 공격하여 빼앗지 못하자 대포를 쏘며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포(砲) 2지(枝)를 문루에 충돌시켜 부수자 무너져 모두 타버리니 제독이 군사를 정돈하여 들어갔다. 여러 군사들이 승세를 틈타 앞다투어 진격하니 기병과 보병이 구름같이 모여 사방으로 쳐죽였다. 적들이 형세가 위축되어 달아나 여러 막사(幕舍)로 들어가자 명나라 군사들이 차례로 태워 모두 죽이니 냄새가 십여 리까지 났다.


적장 행장(行長)이 도망하여 연광정(練光亭) 토굴로 들어갔는데 제독이 땔감을 운반하도록 하여 사방에 쌓아두게 명하고 장차 불로 공격할 계획을 하였으나 칠성문과 보통문 등 여러 굴(窟)의 적이 굳게 지키므로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다. 그러자 제독이 여러 군사를 모아 쳐다보며 공격하게 하니, 적이 안에서 탄환을 쏘았는데 맞아 죽은 명나라 군사의 시체가 서로 잇따랐고 제독이 탄 말도 탄환에 맞았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제독에게 조금 후퇴하여 군사들을 휴식시키기를 청하였다. 포시(晡時)에 제독이 적의 굴을 함락시키기 어렵고 많은 군사들이 주리고 피곤하다고 하여 군사를 물려 병영으로 돌아와 장대선(張大膳)을 시켜 행장 등에게 유시하기를,


"우리 병력으로 한번 거사하여 충분히 섬멸시킬 수 있지만 차마 인명을 모두 죽일 수 없어 우선 물러나 너희들의 살길을 열어주니, 속히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원문(轅門)에 나와서 나의 분부를 듣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용서하여 줄 뿐만 아니라 후한 상을 주겠다."


하니, 행장 등이 회보하기를,


"우리들이 퇴군하고자 하니 후면을 차단하지 말기 바란다."


하므로, 제독이 허락하였다. 그날 저녁에 통관(通官)으로 하여금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일(李鎰)에게 분부하여 중화(中和) 일로의 우리 나라 복병(伏兵)을 철수하게 하였다. 밤중에 행장(行長)·현소(玄蘇)·의지(義智)·조신(調信) 등이 남은 적을 거느리고 얼음을 타고 대동강을 건너 탈출하였다. 중화와 황주 일로에 연이어 주둔하여 있던 적들이 평양의 포성을 듣고 먼저 철수하였다.


황주 판관 정엽(鄭曄)이 행장의 후미(後尾)를 끓어 90여 급을 베었다. 적은 굶주리고 군색함이 심하여 인가에 들어가기도 하고, 사찰에 묵기도 하였다가 참살당한 자가 또 30여 급이었다. 봉산(鳳山)의 동선현(洞仙峴)에 이르러서는 적들이 더욱 피곤했지만 황해(黃海)의 직로(直路)를 차단하는 자가 전혀 없어 저 괴수들이 온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다. 이번에 명나라 군사가 전투에서 참획(斬獲)한 것이 1천 2백 85급이며, 사로잡은 자가 두 명이고, 아울러 절강인(浙江人) 장대선을 사로잡았고 빼앗은 말이 2천 9백 85필이고, 본국의 사로잡혔던 남녀를 구출한 것이 1천 2백 25명이었다.


9일에 제독이 여러 군사들을 거느리고 성에 들어가 먼저 전진에서 죽은 장졸에게 제사를 지내고 몸소 통곡하였으며 고아와 과부들을 위문하였다. 이튿날에는 기자묘(箕子廟)에 제사를 지낸 다음 비로소 선봉(先鋒)의 여러 장수를 보내어 성언(聲言)하면서 적을 추격하여 황주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이 전투에서 남쪽의 군사들이 날래고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에 이들을 힘입어 승리할 수 있었으나, 명나라 군사의 사상자도 많았으며 굶주려 부르짖으며 피를 흘리는 자가 길에 잇따랐다.



보면 격전도 이런 격전이 따로 없다.


조명 연합군은 화력과 병력의 우세를 살려 외성의 고니시군을 압도했고 이어진 시가전에서 일본군은 일방적으로 학살 당한다.


조명 연합군의 기세 넘치는 공세가 돈좌되었던 것은 고니시군이 평양성 내부에 구축한 내성 진지였는데, 여기서 조명 연합군은 벼랑 끝까지 몰린 고니시군의 저항에 큰 피해를 입고 더 이상의 공세를 단념하였다고 나타난다.



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 1월 26일 신사 11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윤두수가 평양에 왜적이 쌓아 놓은 토굴을 조사하고 아뢰다.


좌의정 윤두수가 또 치계하였다.


"신이 행재(行在)에 있으면서 늘 왜적의 토굴(土窟)은 쉽게 공격하여 함락시킬 수 없다는 기별을 들었는데 평양에 이르러서 적이 쌓은 것을 낱낱이 관찰하니 이름은 토굴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땅을 파고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동문(大同門) 안의 경우는 돌로 쌓았으며 보통문(普通門)은 흙으로 쌓았는데, 단지 평지(平地)에다 기초를 닦고 각각 돌을 쌓거나 흙을 쌓은 위에 외벽(柧壁)을 만들어 앞뒤로 흙을 바르고 그 위에 집을 지었으며, 더러는 와벽(瓦壁) 속에 구멍을 뚫어 총통(銃筒)을 발사하는 곳같이 해 놓았습니다. 그 안에 감춘 군사의 많고 적음은 외부 사람들이 감히 그 확실한 숫자를 알지 못하며 구멍을 바라보면 언제나 총통이 발사될 것 같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교활한 계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감히 모형을 그려서 보냅니다."



특기할 점은 그렇게 고니시가 평양성을 빠져나가고서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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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봉산 동선현에 이르기까지 지리하게 패주하는 일본군 뒤로 조선군과 명군의 추격전이 펼쳐졌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봉산은 평양에서도 한참을 내려와야 하는 황해도 사리원시 주변의 지명이다. 거진 개성과 평양 사이 딱 중간 지점 즈음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먼 거리를 패주하면서 뒤로 쫓아 들어오는 조선군과 명군에게 사냥 당했다는 소리다.



5. 고니시군의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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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전투 이후 한양에서 점호했을 당시 고니시군의 잔여 병력은 6,626명이다.


그러니까 이끌고 있었던 18,700명 중에서 대략 12,000명이 그냥 사라져 버렸다.



당연히 부대 해체 급의 손실이었고 이 이후로 고니시의 1번대는 약 반년 간 존재감 자체가 사라져버린다.


이후 제2차 진주성 전투 즈음해서 간신히 재편성한 것이 7,415명. 완전히 나가리된 부대를 간시히 영끌해서 편성한 것도 최초 병력의 반도 되지 않는 것이다.


또 비전투 손실이 많지 않았냐고 할 수 있는데, 당시 고니시군이 후퇴한 한양은 조선 초대의 조세미를 비축하고 있는 일본군의 본부였고, 거기서 무슨 물자가 달린다거나 고니시를 위협할 수 있는 적이 있었다거나 하는 건 전혀 없었다. 그러니 결국 저 날아가버린 1만 2천여 병력은 거진 순전히 평양성 전투와 그 이후 펼쳐졌던 패주의 아비규환 속에 입은 손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 조명 연합군의 피해.


여기서도 당장 조선군의 피해는 '잘 모르겠시다.'이다. 도시 제대로 된 병력 통계가 없다. 그냥 격전이었던 만큼 명군의 피해와 비교해서 비율상 비슷하게 입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 뿐.


그럼 명군의 피해는 어떠했을까? 전투 묘사만 보아도 격전 속에 명군도 많이 죽고 다쳤음을 알 수 있다.



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 1월 14일 기사 5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이원익 등이 명군 장수가 생포한 왜적 장수를 심문한 내용을 보고한 장계.


...아침 식사 후에 명나라 장수가 제물(祭物)을 갖추도록 하고 전진(戰陣)에서 죽은 장사(將士)들을 보통문(普通門) 밖에 나아가 제사를 지냈는데 소리내어 통곡하며 슬픔을 스스로 억누르지 못하니 제장(諸將) 이하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또 기자묘(箕子廟)에 제사를 지내려고 하여 제물을 미리 갖추도록 하였는데 평양의 촌민(村民)들이 6∼7섬의 떡을 만들어 명나라 군사를 위로하면서 대접하였습니다. 그러자 명나라 장수가 대동문(大同門)에 나아가 부로들을 초치(招致)하여 눈물을 머금고 위로하며 사례하기를 ‘우리 군사가 그대들을 구원하여 살리려다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3천여 명이나 되는데 성을 공격할 때에 그들은 보았는가?’ 하니, 백성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축수(祝手)하였습니다. 명나라 장수가 ‘우리가 분명히 곧장 경성으로 향하여 왜노들을 모두 죽일 것이니 그대들은 안심하고 정착하라.’ 하였습니다.



걍 대놓고 명군 장수의 입에서 나온다. 3천여 명. 당시 조선 조정 측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에 1차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명군의 피해가 약 1천여 명이었으니 전투가 마무리된 후 집계된 숫자가 거의 세 배로 뛴 것이다. 거기에 조선군 피해도 있었을 것이니 조명 연합군 입장에서도 3천 이상의 피해를 전투 한 번에 보았으니 결코 피해가 적었다고 할 수 는 없겠다.


그렇다고 무슨 조명 연합군의 피해가 고니시군보다 적었느니 하는 흰소리는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걔는 1만 2천 날아갔다고요 1만 2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