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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은 미국, 영국, 호주, 뉴질랜드등 연합군 포로들을 식민지 조선의 대도시(경성, 인천, 부산, 평양)에 분산수용 시켰음.


이는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천황의 군대가 귀축영미들을 박멸하고 있다고 선전하는 동시에 연합군의 폭격을 막으려는 몸빵용 용도이기도 했음.



1942년 9월 22일, 싱가포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영연방군 소속 포로들이 부산에 입항함. 일본군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자신들의 승전을 홍보하기 위해 이들에게 부산 시내를 3시간 동안 행진하도록 함.


기마헌병들은 일부러 포로들 머리 위로 말 얼굴을 돌려서 말의 침이 떨어지도록 해서 굴욕감을 줬다고 함. 가끔씩 기절하거나 쓰러지는 포로가 나오면 장교가 달려가서 뺨을 때려 정신을 차리도록 한 뒤 다시 행진시킴. 조선인들은 무표정한 얼굴도 포로들을 쳐다봤으며, 스코틀랜드 여단 병사의 체크무늬 킬트나 베레모등을 신기하게 바라봤다고 함. 관중 속에서 가끔씩 야유가 들려왔는데 그런 인간들은 백이면 백 조선에 사는 일본 민간인들이었음.


가끔씩 아이들이 포로들에게 장난을 치는 경우는 있었으나 조선인들은 대체적으로 포로들을 동정적으로 봤음. 참고로 이때 대열 후미에서 아직 기력이 남아있던 두 명의 호주군 병사가 헌병들의 눈을 피해 우스꽝스럽게 일본군들의 걸음걸이를 흉내었는데, 그걸 본 조선인들이 유일하게 웃음을 터뜨렸다고 함.




부산역에서 경인선 3등석 열차를 탄 포로들은 기자들 앞에서 프로파간다용으로 지급된 여러가지 음식이 담긴 네모난 나무곽(도시락)을 받았는데, 그게 포로생활중 먹은 마지막 진수성찬이었다고 함.


처음에 수용되었을 때 이들은 북쪽 300km 근방 어딘가에 동맹국인 러시아의 영토가 있으니 탈출할 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가졌지만, 지도도 없었고 한반도의 인/구밀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아서 들키지 않고 탈출하는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실행에 옮기지 않음.


포로들에게는 삶은 순무, 긴 줄기가 난 콩, 녹색 해조류로 만든 스프가 배급되었으나 대부분의 포로들은 이걸 못 먹었다고 함. 크리스마스에는 담배와 각설탕이 배급나왔고, 가끔씩 총독부 관리들이 찾아와 선전사진을 찍어가기도 함.


막사는 아주 비좁았으며 겨울에는 난방도 해주지 않아서 포로들은 뭉쳐서 체온으로 버텨야 했다고 함. 2주에 한번씩 검열된 영자신문이 한부씩 유통됐고 여기에는 당연히 일본 측의 프로파간다만 적혀있었음.



일본군은 홍보목적으로 포로들을 조선인들이 보는 앞에서 노역을 시키기도 함. 하지만 포로들은 이런 노역을 매우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조선인들이 일본군 몰래 먹을거나 담배를 줬기 때문이라고 함.



여러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수용된 연합군 포로들은 버마나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지에 수용된 포로들보다 대우가 훨씬 좋아서 사망률이 2.7%로 낮았다고 함. (같은 시기 일본내 수용소에서는 포로 사망률이 최대 9%까지 올라가기도 했음.)


이들은 9월 경 한반도에 상륙한 미 24군단에 의해 풀려나서 그 해 대부분 고국으로 돌아감.






https://www.awm.gov.au/visit/events/conference/remembering-1942/japan-party-b


https://www.far-eastern-heroes.org.uk/Richard_Swarbricks_War/html/jinsen_camp_-_korea.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