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에서 탄생한 수많은 신화 중에서도 특히 독보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히틀러와 휘하 장군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전후 살아남은 독일 장군들은 전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의 지도 아래 미 육군을 위한 여러 저작을 펴냈고, 그들이 이러한 자료와 회고록에서 저지른 자기합리화와 의도적인 누락은 이후 히틀러에 대한 신화가 탄생하는데 상당히 큰 기여를 했다.


장군들의 서술과 달리, 동부전선의 기상조건이 독일군만을 괴롭혔던 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또다른 변명거리로 흔히 제시되곤 하는 종심의 문제와 불량한 도로상태, 러시아와 유럽의 서로 다른 철도너비에 대한 문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만약 회고록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일 경우, 거의 모든 문제는 오로지 히틀러가 제때 후퇴허가를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시작된다.



물론 이러한 서술이 진실이었던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넓게 봤을 때 그 수많은 회고록들에서 끝없이 반복되곤 하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은.... 한번 철저하게 그 진위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1944년 가을, 3개 독일 집단군이 연합군의 진격으로 포위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남서 프랑스의 집단군은 노르망디 교두보를 돌파한 연합군 부대와 프랑스 지중해 연안에 상륙한 연합군 부대 사이에 놓여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히틀러는 이들의 후퇴를 허가했다.


남동유럽, 그중에서도 특히 그리스와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 남부에 주둔 중이던 집단군 또한 티토의 파르티잔과 붉은 군대가 연결될 경우 그대로 퇴각로가 끊길 상황이었다. 히틀러는 그들의 후퇴도 허가했다.


동부전선 북쪽 끝에 위치하던 집단군은 발트해로 돌격중인 붉은 군대가 후방을 위협하고 있었다. 독일군의 역습이 잠시 그들을 멈춰세웠지만 러시아인들은 결국 서부 라트비아 방면을 돌파함으로써 포위를 완성하기 직전이었다. 앞선 두 사례와는 달리, 히틀러는 이번에 그들의 후퇴를 불허했다.


이 모든 사건들은 몇주에 걸쳐 거의 동시에 벌어졌던 일이다. 무엇이 차이를 만들었을까? 왜 히틀러는 앞선 두 집단군의 후퇴는 허가했으면서, 남은 한 집단군의 후퇴는 거부했을까?



후퇴를 혐오하는 히틀러의 오랜 습관이 갑자기 도졌던 걸까? 사실 진짜 이유는 히틀러의 후퇴에 대한 혐오도, 서부 라트비아에 대한 개인적인 집착도 아니었다.


하워드 그라이어의 저작에 의하면, 히틀러는 칼 되니츠 제독의 긴급한 요청에 귀를 기울인 것이었다. 독일 해군 총사령관은 발트해 남부 해안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서양의 제해권을 되찾아올 신형 잠수함과 그 승무원들의 훈련 및 준비를 위해선 발트해가 필요했다. 그러나 발트해 남부 해안을 빼앗길 경우, 소련 해군이 마음껏 발트해로 진입해 독일해군을 방해할 수 있었다.


결국 이 사례에서 히틀러는 더 중요한 전략적 이득을 위해 전술적 측면을 희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효율적으로 패배를 지연하는 것보단, 결국은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줄 수 있을 방안을 더 선호했다.








전후 독일 장성들이 자신의 '천재성'을 부각시키는데 자주 이용하는 두번째 사례는 돌출부의 철수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은 돌출부에서 철수함으로써 전선을 축소시켜야 한다고 주기적으로 주장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비대를 창출해 미래의 붉은 군대 공세를 방어하거나 그들 자신의 공세를 펴는데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그렇게 돌출부를 포기해 전선이 축소될 경우, 붉은 군대 또한 축소된 전선을 가지게 되며 결과적으로 예비대 창출이 가능해지는 건 그들 또한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지적한 회고록은 내가 살펴본 것 중에는 단 한권도 없다.


여기에 대한 가장 극적인 사례는 1943년 하계공세 준비 도중 발생했다. 이때 장군들은 르제프 돌출부를 포기하도록 히틀러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곧 돌출부는 "들소 작전"을 통해 체계적으로 포기되었다. 그러나 들소 작전은 역설적이게도 붉은 군대에게 두가지 이점을 가져다줬다. 하나는 전략적, 다른 하나는 전술적 이점이었다.


독일군은 르제프 돌출부를 포기함으로써 모스크바에 대한 공세 또한 사실상 포기했다. 1942년과는 달리 스탈린은 더이상 모스크바에 대한 공세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더이상 수도 근처에 예비대를 배치해 둘 필요가 없었다. 축소된 전선은 소련군 부대로 하여금 예비대를 확보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이들은 그대로 "성채 작전"을 받아낸 뒤 독일군 후방을 위협할 역공전력이 되었다.


물론 성채작전은 이런 문제점이 없었다고 해도 결국 실패했을 것이다. 그리고 난 히틀러가 항상 옳았고, 장군들은 모조리 거짓말쟁이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절대 아니다. 난 흔히 인정되곤 하는 2차대전 독일 장성들의 유능함에 대해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을 뿐이다.






2차대전의 독일 군사지도자들은 전술적 측면에서 분명 뛰어났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2차대전 장성들은 1차대전 장성들에 비해 약간 더 많은 수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비슷한 기간 동안 2차대전 장성들은 1차대전 장성들에 비해 3배 더 많은 수의 병사들을 희생시켰다. 그들은 1차대전 당시보다 백여배 더 많은 수의 자국 군인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처형시켰다.


그들이 동부전선에서 수행한 절멸전쟁으로 인해, 한때 모두에게 증오받던 콧수염 독재자가 인민의 구원자로 탈바꿈했다. 독일 스스로의 통계에 의하면, 동부전선의 첫 7개월 동안 하루평균 10,000명의 전쟁포로가 기아와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역사상 유래가 없던 수치다. 이렇게 죽은 포로는 200만명에 달하며, 여기에 더해 같은 기간 동안 100만명이 넘는 소련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이러한 공포와 학정은 러시아 군인, 민간인 생존자들에 의해 순식간에 소련 후방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소련인들은 여기에 대항해 집결했고, 끝없는 궁핍과 희생을 견뎌냈으며 오로지 죽음과 파괴만을 초래한 군대를 결국 박살낼 수 있었다.







독일 장성들은 크게 3가지 이유 때문에 이러한 종류의 거짓말들을 꾸며낸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들의 1차대전 선임들은 배후중상설이라는 신화를 창조함으로써 패배의 책임을 모두 떠넘기는 데 성공했다. 이번에 장성들은 내부의 배신자라는 환상 대신, 한때 정점에 서있었던 망자를 희생양으로 선택했다.


그들 모두가 결국 "존경받는 지도자"로부터 상당 액수의 뇌물을 받아먹었다는 부끄러운 진실 또한 이유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덕분에 심지어 1944년 7월 20일의 암살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히틀러에게 거의 만장일치의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들은 이제 히틀러에게 충성을 바쳤던 다른 이유를 찾아내야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충성이 사실 콧수염 물주가 아닌, 부하들을 향한 충성이었다며 겉치레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장성 대부분이 마음속으로 널리 공유했던 어떤 가치의 전도가 이 현상을 설명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이유가 되어줄 듯하다. 그들은 오늘날 홀로코스트라고 불리는 행위를 휘하 병사들에게 설명할때 "gerechte Sühne", 즉 유대인들을 향한 정당한 처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들은 1, 2, 3살짜리 아기들에 대한 소위 "정당한 처벌"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았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7월 20일 음모에 연루된 이들을 다루는 특별 재판이 열렸을 때, 3명의 판사 중 둘이었던 야전원수 폰 룬트슈테트와 육군 참모총장 구데리안은 판사로 있는 동안 기소자측으로부터 정기적인 뇌물을 받았다.



그러나 피고자측은 그 어떤 변호도, 심지어 직접 출두하는 것도 허가받지 못했다. 이 촌극의 공식적 명칭은 "독일군 명예 법정 Ehrenhof der Deutschen Wehrmacht"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서 언급된 소위 "명예"가 당시 장성들 개개인이 가지고 있었던 정의에 대한 인식과 상당한 연관을 지니고 있지 않았나 사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