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의 친척지간인 황제 중에 빌헬름 2세가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 카이저는 분명 즉위하면서 자국 외교정책의 주인이 될 의도였다. 언젠가 그는 "외교정책? 아니, 짐이 곧 외교정책이다!"하고 소리쳤다. ... 

로마노프의 니콜라이 2세처럼 빌헬름도 자주(특위 재위 초기에) 담당 각료들을 우회해 '총신들'과 상의했고, 정부의 통합성을 약화하기 위해 파벌 투쟁을 부추겼으며, 관련 각료들의 동의를 받지 않은 견해나 우세한 정책과 상충하는 견해를 피력했다.

바로 이 마지막 부분(정부에서 공인하지 않은 정치적 견해를 독단적으로 피력하는 것) 때문에 카이저는 동시대인들과 역사가들 양쪽으로부터 가장 적대적인 눈총을 받았다. 국내외 정치적 사안에 관한 카이저의 수많은 사적 전보, 서신, 여백에 적은 노평, 대화, 인터뷰, 연설 등의 어조와 내용이 별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것들은 이례적인 분량만으로도 두드러진다. 카이저는 30년 동안 재위하면서 거의 끊임없이 말하고 쓰고 전보를 보내고 끼적이고 호통을 쳤으며, 이런 발화의 아주 많은 부분이 후세를 위해 기록되고 보존되었다. 그중 일부는 경박하거나 부적절했다.


......카이저의 변덕이 죽 끓듯 했던 탓에 그 영향을 평가하기란 어렵다. 만일 빌헬름이 분명하고도 일관성 있는 정책 비전을 추구했다면 그의 의도와 결과를 간단히 비교하여 평가할 수 있을 테지만, 그의 의도는 언제나 불분명했고 관심의 초점은 끊임없이 변했다. 1890년대 말에 카이저는 브라질에 '신독일(Neudeutschland)'을 만드는 프로젝트에 열광하며 최대한 신속히 브라질 이주를 권장하고 늘릴 것을 "조바심치며 요구했다"(말하나마나 이 계획의 성과는 전무했다). 1899년에는 세실 로즈에게 '메소포타미아'를 독일 식민지로 확보할 생각이라고 알렸다.

1900년 의화단 운동이 전개되던 때에는 중국을 분할할 작정으로 독일의 일개 군단 전체를 파병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1903년에는 다시 한 번 "라틴아메리카가 우리의 표적이다!"라고 선언하고 해군본부 참모들(그의 눈에 달리 할 일도 없어 보이던 이들)에게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뉴욕을 침공할 계획을 준비하라고 다그쳤다. 이 계획은 완전히 시간 낭비였는데, (다른 무엇보다) 참모본부가 필요한 병력을 제공하는 데 절대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이저는 이런저런 발상을 전해 듣고, 열광하고, 곧 지루해하거나 의욕을 잃고, 결국 내팽개치는 패턴을 반복했다. 어느 주에는 러시아 차르에 성을 내다가도 다음 주에는 그에게 홀딱 빠졌다. 동맹 계획은 끝이 없었다. 일본·영국에 맞서 러시아·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미국에 맞서 러시아·영국·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일본·삼국협상에 맞서 중국·미국과 동맹을 맺고, 삼국협상에 맞서 일본 그리고 미국과 동맹을 맺고 등등.

......빌헬름은 메모와 여백에 쓴 논평을 각료들에게 퍼붓는 데 만족하지 않고 외국 열강의 대표들에게 자기 생각을 직접 이야기하기까지 했다. 때로는 공식 정책의 방향을 거슬렀고, 때로는 뒷받침했으며, 때로는 도를 지나쳐 공식 견해를 멋대로 패러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890년 외무부가 프랑스와의 관계를 차갑게 식히는 동안 빌헬름은 다시 따뜻하게 데웠으며, 1905년 모로코 위기 때도 외무부가 파리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가는 동안 그는 외국의 여러 장군과 기자, 그리고 전직 프랑스 각료에게 자신은 프랑스와의 화해를 추구하며 모로코를 놓고 전쟁을 무릅쓸 생각이 전혀 없다고 단언했다.

......1904년 1월 카이저는 만찬회에서 때마침 (빌헬름의 생일을 축하하러 베를린에 온)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의 옆자리에 앉게 되자 그에게 독일이 프랑스와 전쟁할 경우 벨기에가 독일 편을 들어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빌헬름은 레오폴드가 독일 편에 선다면 벨기에에 프랑스 북부의 새 영토를 주고 벨기에 국왕에게 "옛 부르고뉴 왕위"로 보상하겠다고 약속했다. 흠칫 놀란 레오폴드가 벨기에 내각과 의회에서 그런 기발하고 대담한 계획을 받아들일 리 없다고 답하자, 빌헬름은 주님이 아닌 각료와 의원에게 책임감을 느끼는 군주를 자신은 존중할 수 없다고 쏘아붙였다. 벨기에 국왕이 더 협력적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카이저로서는 "순전히 전략적인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는 곧 벨기에를 침공해 점령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이 발언에 레오폴드가 얼마나 노했던지 만찬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헬멧을 거꾸로 썼다고 한다.

바로 이런 에피소드들 때문에 빌헬름의 각료들은 그를 정책수립 과정에서 한 발짝 떨어뜨려놓았다. 빌헬름 치세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외교정책 결정(1890년 러시아와의 재보장조약을 갱신하지 않기로 한 결정)을 내릴 때 카이저가 관여하지도 사전에 알지도 못했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사실이다. 1905년 여름 베른하르트 폰 뵐로 재상은 빌헬름에게 핀란드 어촌 비외르쾨의 앞바다에서 니콜라이 2세에게 동맹 제안을 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빌헬름이 돌아왔을 때, 뵐로는 카이저가 대범하게도 조약의 초안을 변경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재상은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가장 영향력 있는 관료에게 버림받을 전망에 아연실색한 빌헬름은 당장 양보했다. 뵐로는 사직서를 거두어들였고 조약 수정은 철회되었다.

카이저는 핵심 정보에서 배제되는 것, 곧 중요한 외교문서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했다. 특히 외교정책 관료들이 그와 외국 수반 사이에 왕래하는 개인적인 서신까지 검열한다는 데 분개했다. 한 예로 1908년 워싱턴 주재 독일 대사 슈페크 폰 슈테른부르크(Speck von Stemburg)가 빌헬름의 서신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해주기를 거부했을 떄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카이저가 미국 대통령에게 경탄해 마지 않는 마음을 표현한 서신이었다. 외교관들이 우려한 것은 서신의 정치적 내용보다는 야단스럽고 미숙한 어조였다. 어느 관료의 말마따나 독일제국의 군주가 미국 대통령에게 "예브장한 침모에게 푹 빠진 남학생이나 쓸 법한" 편지를 쓰는 것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걸핏하면 군주가 아니라 당면한 관심사에 사로잡혀 본분을 잊을 정도로 흥분하는 10대처럼 말하곤 했다. 그는 에드워드 시대의 사회적 범주인 클럽 떠버리, 즉 클럽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자신의 계획을 끝없이 설명하는 인물의 극단적인 전형이었다. 그러나 점심식사나 저녁식사 자리에서 카이저에게 붙들려 그의 장광설을 들어야 할 전망에 수많은 유럽 왕족이 공포에 떨었던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빌헬름의 국정 개입은 독일 외무부 사람들을 몹시 괴롭히긴 했으나 정책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사실 빌헬름이 장차 일본과 미국이 벌일 세계대전, 푸에르토리코 침공, 영국제국에 맞선 전 세계적인 성전(聖戰), 독일의 중국 보호령 같은 공상에 빠진 이유 중 하나는 권력의 진짜 수단으로부터 차단되어 무력감이 점점 깊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들은 정책 자체가 아니라 지정학적 공상을 일삼는 사람들의 비현실적인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실제 분쟁이 임박해 보일 때마다 빌헬름은 몸을 사리며 독일이 도저히 전쟁에 돌입할 수 없는 이유를 재빨리 찾아냈다. 1905년 말 프랑스와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빌헬름은 겁을 집어 먹고서 뵐로 재상에게 국내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소요를 벌이고 있으니 국외에서 공격적 행동을 절대 삼가야 한다고 일렀다.

이듬해 에드워드 7세가 실각한 프랑스 외무장관 테오필 델카세를 갑자기 방문했다는 소식에 당황한 그는 재상에게 독일 포병대와 해군이 분쟁을 버텨낼 만한 상태가 아니라고 주의를 주었다. 빌헬름은 말은 거칠게 했으나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꼬리를 내리고 숨을 곳을 찾았다. 1914년 7월 위기동안 그는 정확히 그렇게 했다. 1912년 5월 베를린 주재 프랑스 대사 쥘 캉봉(Jules Cambon)은 외무부 상관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이 남자가 말은 그토록 성급하고 무모하고 충동적으로 하면서도 어떻게 행동은 더없이 조심스럽고 참을성 있게 하는지, 참 심기한 일입니다."

크리스토퍼 클라크 씀. 이재만 옮김. 《몽유병자들》. 293-300쪽.


-클라크 의하면 빌헬름 2세는 니콜라이 2세 이상으로 논란이 많음.

-정부 견해와 상충하는 외교 정책을 자주 피력함.

-관심사가 초고속으로 변화무쌍해서 일관성도 없음.

-그 변화무쌍한 외교 정책(?)을 외국 열강 대표들에게 떠벌떠벌

- 얼마나 노답인지 개인적인 서신들도 검열 받음. 황제의 위치에서

-내용뿐만 아니라 문체도 나라망신.

-각료들은 빌헬름을 정책 수립 과정에서 일부러 떨어뜨려놓음.

-변화무쌍한 관심사의 10대 청소년처럼 수다를 떠는 카이저 앞에서 수많은 유럽 왕족들이 공포에 떨었음.

-권력의 수단에서 차단되니, '일본과 미국이 벌일 세계대전' 같은 터무니없는 지정학적 판도 놀이질

-말은 거칠게 하지만 전쟁 위기 앞에서는 꼬리를 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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