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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0년 늦가을,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진을 거듭한 유엔군 덕분에 북한 대부분이 수복되었고 한국전쟁은 끝나갈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공은 북한을 돕기 위해 수십만에 달하는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을 파병했다. 중공군에 대한 첩보를 과소평가한 맥아더 원수는 방어선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고 오로지 북진만 외쳤다. 국공내전으로 단련된 중공군은 전체병력은 유엔군보다 적었지만 빠른기동을 통한 일시적 숫적우세를 통해 유엔군 전선의 틈새를 파고들어 수많은 미군과 한국군 부대를 포위섬멸했고 이를 기점으로 유엔군의 공세는 꺾이고 말았다.


그 뒤로 유엔군은 다시 평양을 내주고 38도선 이남까지 후퇴하는 수 밖에 없었다. 유엔사령부는 중공군이 원하는 것이 전쟁이전 국경복원이라고 생각했고 38도선을 넘어오지 않을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연승에 기고만장해진 마오쩌둥은 오히려 현지 지휘부에게 38도선을 넘어 진격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했다. 현지 지휘부는 전력을 보존하는것이 좋을 거라고 여겼으나 결국 마오쩌둥의 지시를 무시할 순 없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조선의 수도에 입성해보고 싶다는 일말의 로망을 품고 있었다. 당시 중공군은 인력에 의존한 보급망 때문에 하루 최대 20km 밖에 진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중공군들은 차근차근 유엔군을 몰아내며 결국 38도선 이남까지 내려왔다.



1950년 12월 31일,  중공군 13병단 소속 39군 소속 116사단은 그 날 저녁 미군 정찰기가 임무교대를 하는 20분을 노려 선봉으로 임진강을 도하하였다. 그리고 임진강 남쪽에 최후방어선을 편 미군 1개 대대와 한국군 잔존병력을 단숨에 밀어버렸다. 고양에서 방어전을 펼친 영국군 제29 여단은 중공군 50군에게 밀려 1개 전차대대와 보병 2개 중대가 전멸 당했다.


1월 3일 이른 아침, 릿지웨이 장군은 유엔군에게 서울을 포기하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1년 전 북한군 치하의 서울을 기억했던 시민들은 이번에는 남아있지 않는 것을 택했다. 한국정부는 저번과 달리 미리 소개령을 내렸고 수십만의 시민들이 남쪽으로 피난했다. 미군은 임시부교 2개를 건설하여 피난민들의 소개를 도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혼잡 속에서 수많은 피난민들이 한강을 거너려다 얼음물 속에 빠져 죽었고 헤어져서 이산가족이 되어버렸다. 미군은 김포공항에서 3만 갤런의 네이팜과 1만 갤런의 항공유을 모아놓고 불을 질렀다.엄청나게 큰 화염과 검은 연기가 안양에서도 관측될 정도로 며칠동안 타올랐다.  


오후 3시가 되자 서울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병력마저 철수했고 곳곳에서 약탈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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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가 조금 지나자 중공군 116사단이 북한군 1개 연대와 함께 서울 외곽에 진입했다. 일부는 아직 후퇴하지 못한 미군 헌병대와 교전하였다.  중공군들은 미군 후위부대와 간간히 총격을 주고받으며 종로로 향했다. 저녁이 되자 서울 시가지 대부분이 중공군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하지만 중공군들이 생각했던 인민들의 환대는 찾을 수가 없었다. 독립문을 지나 종로로 향하는 내내 중공군들은 개미 한마리 보이지 않는 황폐한 절체절명의 도시를 지났다. 서울에 남은 민간인들은 대부분 전쟁고아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과 이들을 버리지 못한 가족들 뿐이었다.


마오쩌둥은 이 소식을 듣고선 '우리가 인민을 위한 군대인데, 인민들이 전부 도망갔다니 이래서야 전쟁에 대한 명분이 있냐?'라며 경악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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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종로에 다다른 중공군 선봉대대는 중앙청과 경무대에 오성홍기가 게양했다.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이래 두번째로 정부청사에 적성국의 국기가 게양되는 순간이었다. 중공군들은 이외에도 미8군 사령부, 미대사관 같은 상징적인 장소들에 죄다 오성홍기를 달았다고 전해진다.


중공군 116사단의 사단장 왕양(汪洋)은 경무대 본관으로 향했다. 1층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3층에서는 수백벌의 고급양복과 신발이 쏟아져 나왔다. 실크커튼과 상들리에는 중공군 병사들의 눈을 휘둥그레하게 만들었다. 사범학교 출신이었던 왕양은 그랜드 피아노에 앉아 자신이 아는 곡을 몇 곡 연주했다. 연주를 마치자 그는 통신담당을 불러서 사령부에 '진입했다'는 문장을 송신하도록 명령했다. 



유일하게 중공군을 환영한 사람들은 산동성 출신 화교들이었다. 이들은 중공군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으며 '중공인민지원군 환영'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기도 했다. 다음날이 되자 서울 시내 곳곳에는 중공군을 환영한다는 내용의 대자보가 붙었다. 


김일성은 서울 재함락을 축하하기 위해 평양과 서울에서는 24발의 축포가 쏘도록 명령했다. 



1884년, 원새개가 이끄는 청군이 창덕궁을 점령한 이후 67년만에 서울은 다시 한번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중국군대의 발에 짖밟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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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 서울의 모든 것들은 전날 그대로였다. 대부분의 상점들은 물건을 미쳐 처분하지 못했고 상당수의 물자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심지어 미국의 지원으로 복구 중이던 건물들 앞에는 인부들이 두고 간 건축자재와 장비가 그대로 놓여있었다. 


압록강부터 긴 여정에 지친 중공군들은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서울 곳곳을 뒤지며 건물이란 건물에는 전부 들어가서 닥치는대로 약탈을 했다. 일부 중공군들은 창경원의 우리를 열고 낙타, 사슴, 물소, 얼룩말등을 죄다 끌고 나와 도살하여 잡아먹었다. 너구리나 여우 같은 작은 동물들은 재미로 쏴죽였다. 


중공군 총사령관 팽덕회는 중앙청사 앞에서 술판을 벌이며 춤을 추는 중공군의 사진을 받아보고선 화를 내었다고 전해진다. 이윽고 중공군들에게는 약탈과 범죄를 금하는 '인민규율'이 내려졌다. 이 규율은 꽤 엄격하게 지켜졌다고 하며, 당시 서울에 잔류했던 민간인들은 중공군들이 사람들에게 딱히 해코지를 하진 않았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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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중공군들은 전화의 피해가 덜했던 서울의 고궁들을 돌아다니며 관광을 즐겼다고도 전해진다. 중구 정동에 있던 미대사관은 중공군들에 의해 철저히 박살났다. 트루먼 대통령, 맥아더 원수의 사진은 칼로 찢겨졌고 독수리가 새겨진 국장은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이외에도 중공군 참전용사들 사이에서는 릿지웨이 장군이 후퇴하기 직전 미8군 사령부 자신의 집무실의 벽에 '중국인민지원군에게 경외를 표한다'라는 글을 써놓고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하지만 출처가 불분명하며 증거가 남아있지 않아서 그저 프로파간다로 추정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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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중공측 선전부는 독립문 앞을 지나는 중공군의 사진을 유독 많이 홍보했다. 그 이유는 바로 독립문이 1895년 조선이 중국과의 주종관계를 벗어난 것을 상징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중국인들에게 이 사진은 '떠났던 주인의 귀환'을 의미한다.



하지만 중공군은 이미 공세종말점을 한참 넘은 무리한 진군 탓에 보급사정이 열악해져 있었다. 안양-수원방면에서 반격에 나선 유엔군에게 패퇴하고 말았다. 이후 약 70일 동안 중공군은 서울을 사수하려 했으나 재편성을 마친 유엔군이 선더볼트 작전으로 작정하고 밀고 올라오자, 결국 서울을 버리고 임진강 이북으로 후퇴하는 수 밖에 없었다.


중공군의 서울점령은 중국 역사에서 청나라 건륭제 이후 수백년만에 벌어진 대외원정이었다. 무엇보다 적국의 수도를 점령했다는 점에서 중국인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관보와 여러방송을 통해 '중국인민지원군이 한성(漢城)을 공략했다'고 선전했다.


현재까지도 중국의 수많은 매체들은 이 서울점령에 대한 이야기를 틈만 나면 선전하고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 날이 공산주의 혁명이 미제의 침략을 몰아낸 승리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물론, 단 70일만에 다시 그 전리품을 빼앗기고 쫒겨났다는 사실은 단 몇줄만으로 축약하며 밝히기를 꺼려할 뿐이다.  




2023년 1월 4일 오늘은 우리조국의 수도 서울이 중공군의 손에 잠깐이나마 점령 당했던 날로부터 딱 72년이 되는 해이다. 하지만 수많은 한국인들은 이 날의 치욕을 그저 떠올리기 싫은 기억으로만 여기며 관련자료 역시 의외로 찾기 힘들다. 




우리는 이 국치(國恥)의 날을 맞아 무엇을 되새기고 고쳐나가야 할 지 다시 한번 곱씹어볼 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