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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6년 8월 말. 조선의 대군이 두만강을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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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단단히 준비해온 조선군의 병력은 이미 압도적이었다.



함경도의 동북면군에 더해 평안, 황해도의 서북면에서 차출된 부대 거기에 삼남 지방에서 동원한 남도군까지 그 총병력만 이미 1만 규모였다. 겨우 수십 기, 많아 봐야 수백 기에 따를 뿐인 개개의 여진 부족들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규모였던 것. 


조선군은 아예 모련위 일대를 완전히 털어버리겠다는 각오로 여러 길로 나누어 진군했다. 선봉에 나선 북방군 부대들은 약 5천의 군사로 함경도 도절제사 양정의 총지휘 아래 각각 길주 목사 오익창, 영북진 절제사 강순, 이조 참판 곽연성, 회령진 절제사 임득정, 온성진 절제사 김처지 등 현지 지휘관들이 맡은 대략 6백 ~ 1천에 달하는 여러 부대들로 나뉘어 모련위 깊숙이 파고 들었다. 


그 뒤를 곧바로 함경도 도체찰사 신숙주가 직접 이끄는 후발대가 뒤따라 진군했는데, 여기도 대략 5천 규모의 병력이 신숙주의 지휘 아래 각각 여러 군지휘관 휘하의 부대들로 나뉘어 일제히 밀고 들어갔다. 조선군은 두만강으로 이어지는 여러 물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사방으로 진군하며 모련위 거의 최심부인 아치랑귀 지역까지 진출했는데, 가는 도중 만나는 모든 여진족을 살상하고 부락이란 부락은 모조리 불사르며 진군했다. 필연적으로 식수 확보를 위해 강 가를 중심으로 소재할 수밖에 없는 여진 부락들을 싹 다 털어먹겠다는 의도가 보이는 진출로였다. 거기다 각 부대별로 진군로와 회군로도 세세하게 설정하여 각자 맡은 지역을 크게 휘돌아 모조리 박살내고 회군하는 경로를 취했는데, 이 때문에 모련위는 아주 작살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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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신속하게 밀고 들어갔는지, 모련위 최심부인 아치랑귀 지역에 신숙주가 이끄는 2천의 본대가 도달했을 즈음에는 이미 2백여리를 파고 들어간 상태에 본대의 보급을 맡은 치중대마저 뒤쳐져서 따로 병력을 돌려보내 호위를 강화할 지경이었다.


모련위 중심부까지 들어온 조선군이 거기에 본영을 치고 주둔까지 하자, 모련위 부족들도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는데, 그날 밤 아치랑귀 군영을 사이에 두고 야습에 나선 여진족과 조선군 본대 사이에 대규모 교전이 펼쳐진다. 사방에서 접근해 조선군 군영을 포위한 여진족을 상대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펼쳐진 궁시전의 결과 적은 이번에도 격퇴 당해 흩어졌다. 


다른 곳에서도 여러 부대들이 진출한 곳마다 여진족과 교전을 펼치며 나아가고 있었는데, 다음 날 하루종일 여러 곳에서 교전의 급보가 날아들었다. 


그날 밤에도 여진족은 어떻게든 아치랑귀에 주둔한 조선군 본영만은 걷어내겠다는 심산이었는지 다시 한번 군영을 포위하고서 공세를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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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영의 목책을 사이에 두고 야밤에 벌어진 이틀 째 전투에서도 역시 승자는 조선군이었다. 



작전 개시 3일째인 8월 30일.


모련위 전역은 불타고 있었고 조선군 앞을 막는 적들은 사방에서 털려나가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전황이 정리되었다 판단한 총지휘관 신숙주는 본대를 이끌고 함경도 종성 지역을 목표로 회군했는데, 조선군이 물러선다 생각한 여진족의 저항이 대번에 거세진다. 더군다나 이 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려 지면의 상태와 시계 또한 최악이었다. 병력의 규모에서 밀리는 여진족에게 있어서는 험지에 발을 들인 조선군을 향해 통한의 일격을 날릴 기회라 생각했을 것. 


여진족들은 때로는 진군하는 조선군의 앞을 가로막고 격돌하기도 하고 조선군의 뒤를 쫓아 후위를 공격하기도 하면서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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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악천후에 사방으로 공격당하는 와중에도 요격에 나선 조선군은 여진족의 저항을 분쇄한다.


이 날은 주로 활로 쏘아 사살하던 것과는 다르게 조선군이 직접 베거나 사로잡은 적들이 많았다고 기록에 남겼을 만큼 치열한 육박전이 곳곳에서 펼쳐졌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원정군은 모련위 여진족들을 덤벼드는 족족 박살내며 악천후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회군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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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여기서 원정군에 작은 찐빠가 터지고 만다.



원정 내내 다른 부대들에 비해 그다지 결정적인 교전이 없었던 모양인지 회령부 절제사 임득정이 군공에 조바심을 내고 만 것이다. 임득정은 선봉군 총지휘관인 양정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휘하 부대의 일부만을 거느린 채로 '역돌격'을 감행했다. 다른 부대들 전부 조선땅으로 회군하는 와중에 혼자서 소수의 부대만 이끌고 다시 아치랑귀 심부를 향해 진군해버린 것. 이 때 당시 임득정이 이끈 것은 휘하 기병 겨우 1백 기. 거기에 임득정을 따라 공을 세우려 뒤따라간 오익창이 이끈 50여 기까지 더해 겨우 150여 기에 불과한 병력이었다. 


계속되는 비로 기병의 운신에도 제한이 커진 상황에서 임득정과 오익창은 만주 깊은 산속을 따라 진군하며 여진족과 쉴 세 없이 부딪혔다. 며칠 동안 거듭 내린 비로 지면이 완전히 진창으로 변한 상태였음에도 임득정과 오익창은 끝끝내 아치랑귀를 다시 찍고 그제서야 공을 세웠다 생각했는지 함경도 종성 지역을 향해 회군을 개시한다. 


그러나 이제 겨우 소부대만이 따로 떨어져있는 조선군을 여진족은 가만 두지 않았다. 회군 내내 여진 기병들이 달라붙어 교전이 계속되었고, 마침내 종성 가까이 접근한 임득정의 부대는 거기서 기력이 다 하고 만다. 간신히 산의 사면에 의지해 고지대에 진을 쳤으나, 이미 휘하 병력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고, 끝내 함께하던 오익창이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말자 임득정의 부대는 제풀에 무너져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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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부대 하나가 따로 떨어져 고립된 정황을 그제야 알아차린 신숙주는 다시금 여러 부대들을 출진시켜 두만강변에 열병하여 오득정을 추격해오는 여진족을 걷어내었고 오득정은 달을 넘겨 9월 4일이 되도록 야지를 떠돌며 필사적으로 싸우기를 거듭하다 패장의 치욕을 감내하며 간신히 본대로 복귀했다. 이 때 오득정 휘하의 부대원들 대부분은 이미 개별적으로 강을 건너 조선군에 합류한 뒤였고, 끝내 돌아오지 못한 자는 20여 명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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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의 결과는 파괴적이었다.


이전까지 동북면 방면에서 가장 큰 세력을 구가하고 있었던 모련위, 그 중에서도 니마차부는 이 전투로 완전히 몰락해 주저앉고 말았다. 이 원정에서 조선군이 모련위 각지의 여진족들을 다 잡아 죽이면서 거둬들인 수급만 4백 30여급이었다. 조선조 내내 수급이라는 것은 전황의 결과 보고를 위해 소극적으로 수집되었기에 실제 살상한 규모보다 훨씬 적은 숫자만이 상부에 보고되었다는 점에 비춰보면 그 수급만 4백 두가 넘었다는 건 모련위 여진족의 인명피해는 그 수배 이상이었음을 나타낸다. 


거기에 가는 곳마다 분탕하여 불태워버린 가옥만 900여 채. 여진족 정벌에 있어서는 악랄하리만치 잔혹했던 전기 조선군답게 가옥과 함께 부락에 축적된 모든 재산을 다 태워버렸고, 거기에 유목민들의 가장 큰 재산인 가축들까지 집중적으로 노려 1천여 두 이상을 죽여 없앴다. 


살아남은 모련위 여진족들은 산 속 깊은 곳으로 숨어 들어가 이후 신숙주가 제차 정찰에 나섰을 때에는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 주변 여러 소부족들은 자진해서 조선군에 종군하거나 세조가 평안도 지역을 순시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아예 달려와 세조의 호종 대열에 동참할 정도로 바짝 얼어붙었다. 


이 원정으로 조선은 동북면 여진의 관할권에 대해서는 명과 대립각을 바짝 세우게 되었는데, 명이 동북면 여진족을 건들자 아예 피를 봐서라도 저지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정치적으로 이러한 살벌한 대립각 뒤에는 출구전략이 필요했다. 


그 결과로 이어질 것이 이후 명의 부름에 조선이 호응한 세조대 서북면 건주위 정벌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