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진주만 기습의 전조는 다름아닌 1893년에 발생했다. 


1893년 1월에 하와이 혁명이 발생하자, 당시 해군 소장이였던 알프레드 마한은 "하와이와 우리 해양력의 미래"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미국 영토로의 병합을 주장했다. 


1월 16-17일 호놀롤루 거주의 소수 미국인 교민들이 미국 군함 보스턴호의 수병과 해병과 미국 공사인 존 스티븐스의 도움을 받아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으로부터 섬을 빼앗았다. 하와이 임시 정부는 즉각적인 미국과의 합병을 주장했다. 


마한의 관점에서 하와이는 미국 서부 해안에서 단지 2000 마일 떨어져 있으며, 태평양 통제를 위한 핵심이 될 것이었다. 하와이는 미국의 태평양 팽창을 위한 교두보이자, 중국 시장으로 가는 교역로의 교차로가 될 것이었다. 하와이 합병을 통해 미국은 장차 태평양에 대한 무역과 해양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을거라고 주장했다.


마한은 당시에 쓴 논문에서, 미국 제국주의를 사회적 다윈주의 관점에서 옹호했다. "병합 문제를 회피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전진하지 않으면 후퇴하게 된다."


이 때 태평양으로의 미국의 팽창 조짐에 대해 일본정부가 긴장했다. 도쿄는 하와이의 일본 교민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일본 교민은 하와이 인구의 40%였고, 백인의 10배였다.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 정부는 해군 최신의 강력한 전투 순양함 나니와 호를 하와이에 보냈다. 


함장은 이후 러일전쟁의 영웅이 되는 도고 헤이하치로였다. 이는 일본 교민의 권리 보호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일본의 해상 도발은 역효과만을 초래했다. 오히려 미국의 합병주의자들을 자극했을 뿐이었다. 


미국의 반-제국주의자 대통령 클리블랜드가 하와이 합병 조약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하와이에 대한 미국과 일본의 팽창주의의 첫 충돌로 기록된 사건이다.


결국 1898년 7월 7일, 미국이 하와이 공화국을 합병했다.



출처- sadao Asada, From Mahan to Pearl Harbor: The Imperial Japanese Navy and the United States, Naval Inst Pr; 1st edition (September 1, 2006) 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