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요약 후발췌]
1. 청은 조선행 칙사를 인선할 때 일관적으로 한족 관료를 배제했음. 반면 유구 등의 번국에는 그러지 않았음.
2. 이걸 군사적 문제(조선의 반청의식)로 볼 수도 있지만, 18세기 이후에도 계속 한족을 배제했기 때문에 군사적 문제로만 볼 순 없음.
3. 구범진 교수님은 이걸 청나라의 이원구조로 설명함.
유구나 베트남 등은 청이 '중국'(=옛 명나라)의 유산을 인수인계 받으면서 넘겨받은 번국이고, 조선은 입관 이전의 만주족 국가 시절에 군신의 예를 맺은 번국이란 거임.
즉 다이칭구룬의 군주는 조선에겐 '중국의 천자'가 아닌 '만주의 한(ᡥᠠᠨ)'으로 있고 싶어했던 거임. 원칙적으론 조선은 '중국의 번국'이 아니라 '만주의 번국'이고 몽골, 티베트 등과 함께 만주족 천하질서의 한 축을 담당했음.
여기서부터는 내 생각인데, 만주족 독립 국가인 다이칭구룬이 사라졌으니, 한(ᡥᠠᠨ)의 신하인 조선이야말로 小청국으로서 만주에 대한 지배권이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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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을 배제하는 ‘조선형’ 칙사 인선의 ‘원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접근하여 추적해야 한다.
여기서 책봉・조공 관계의 성립 시점과 그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나라의 조선 국왕 책봉은 입관 전 홍타이지 시기에 청나라가 조선을 군사적으로 굴복시킨 결과로 이루어졌다. 반면에 유구와 베트남은 모두 입관 후 평화적인 방법으로 청나라의 조공국이 되었다. 말하자면 조선・청의 관계가 청나라가 무력을 동원하여 직접 ‘획득’한 것이었다면 청나라가 유구・베트남과 맺은 관계는 명나라의 유산을 ‘상속’한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다시 ‘이원구조’론으로 눈을 돌려 보자. 맨콜의 ‘이원구조’는 원래 청나라의 조공 체제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훗날 확장된 ‘이원구조’론에서는 과거 명나라의 영토였던 직성 지역도 정주 농경 지대이기 때문에 ‘동남 초승달 지역’에 포함된다. 이미 설명하였듯이 이 직성 지역의 통치를 위하여 청나라는 명나라의 법률・제도를 계승함과 동시에 만・한 출신을 모두 등용하였다. 반면에 ‘서북 초승달 지역’에 속하는 번부 통치에는 한인 출신 관료의 참여를 배제하였다. 또한 이 같은 원리는 적어도 19세기 중엽까지 엄격히 준수되었다.
그런데 청나라가 일관되게 한인의 참여를 배제하였던 번부와 칙사의 인선에서 한인의 참여가 역시 일관되게 배제되었던 조선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번부는 비록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완성되었지만 청나라의 입장에서 번부의 형성은 ‘몽골 문제’에서 그 단초가 마련되었다. 즉, 17세기 초에 시작된 외번 몽골에 대한 간접 지배로부터 청나라의 번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차하르 정복에 성공한 홍타이지는 1636년 다이칭 구룬의 성립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것은 곧 ‘대명(大明)’ 중심의 기존 질서에 대항하는 ‘대청(大淸)’ 중심의 새로운 질서 수립을 선언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홍타이지가 구축한 ‘대청(大淸)’ 중심의 새로운 질서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이에 홍타이지는 조선을 무력으로 굴복시켰고, 그 결과 조선은 ‘대청’ 중심의 새로운 질서에 편입되었다. 이로써 이미 청나라 입관 전에 조선은 훗날 번부 형성의 단초가 되는 외번 몽골 등과 더불어 ‘대명’ 질서에 대항하는 ‘대청’ 질서의 한 축을 구성하였다.
한편 ‘유구형’ 칙사 인선과 명나라가 조선에 파견한 칙사의 인선을 비교해 보면 환관의 칙사 파견을 제외하고 인선의 대상이 된 관직에 별반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유구형’ 인선은 명나라의 방식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청나라의 입관 시점에서 유구・베트남은 여전히 ‘대명’ 질서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유구・베트남은 청나라가 명나라의 법률・제도를 계승함과 동시에 만・한 출신을 모두 등용하였던 직성과 동일한 범주에 속하였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훗날 18세기 후반 시점의 청 제국 및 청 중심의 국제질서는 입관 전에 홍타이지가 구축한 ‘대청’ 질서와 그에 대립하던 ‘대명’ 질서를 통합하고 확대・발전시킨 결과였다. 청 제국의 공간은 다시 한인 출신 관원의 통치 참여가 인정되었느냐, 다시 말해서 한인 관료의 ‘순례권’에 포함되었느냐를 기준으로 두 가지 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입관 전의 ‘대청’ 질서에 속했던 공간은 한인 관료의 ‘순례권’에 들지 않았던 반면 당시 여전히 ‘대명’ 질서에 속해 있던 공간은 한인 관료의 ‘순례권’에 포함되었다. 전자에는 조선과 함께 몽골이 속하였고, 후자에는 과거 명나라의 영토와 유구・베트남과 같은 조공국이 포함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원구조’론에서 조선은 유구・베트남과 동일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청나라의 ‘조선형’ 칙사 인선에 나타나는 한인 배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유구・베트남과는 다른 범주에 위치시키지 않을 수 없다. 흥미롭게도 이처럼 조선을 ‘대명’ 중심 질서의 바깥에 위치시키는 청나라의 인식은 강희 연간에 완성된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황여전람도』의 여러 판본 가운데 1719년에 제작된 동판본(銅版本)은 중화민국(中華民國) 시기 선양에서 발견되어 진량(金梁)이라는 사람이 『청내부일통여지비도(淸內府一統輿地秘圖)』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황여전람도』의 다른 판본들이 모든 지명을 한자로 표기한 것과 달리 이 지도는 일부 지역의 지명은 만주문자로, 나머지는 한자로 표기하였다.
『청내부일통여지비도』에서 산둥 성과 요동 지역, 그리고 한반도가 함께 그려진 부분을 보면, 직성인 산둥 성의 지명이 한자로 표기된 것과 대조적으로 요동의 지명은 만주문자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것은 조선의 모든 지명이 한자가 아닌 만주문자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청내부일통여지비도』에서 지명이 한자로 표기된 지역은 과거 명나라의 영토였던 직성뿐이고 나머지 지역은 모두 만주문자로 표기되었다. 이로부터 청나라가 자신들의 ‘세계’를 둘로 나눌 경우 조선을 한자로 표기한 ‘대명’ 공간의 바깥에 위치시켰음을 알 수 있다. 지도에서 지명을 한자로 표기한 지역은 한인 출신이 통치에 참여할 수 있던 지역, 즉 한인의 ‘순례권’이었던 반면 만주문자로 표기한 지역은 한인이 통치에 참여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이와 같은 ‘분류법’은 칙사 인선이나 지도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만한전석에 관한 서술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청나라 궁정의 공식 연회 요리를 보면 조선의 사절, 몽골 출신의 부마,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 등에게는 5등급의 만주 연회 요리가, 기타 국가의 사절에게는 6등급의 만주 연회 요리를 제공하였다. 여기에서도 조선은 몽골・티베트와 같은 범주에 속하였던 것이다.
그닥 공감도 안되고 군사글도 아니고...
그럼 만주족 칙사들은 조선 와서 중국어 안 쓰고 만주말만 함?
한때 그러했다 = 맞음 소청국으로 만주에 지배권이 있다 = 조선은 자기나라도 못지켰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