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아머지 625 관련글 번역 시리즈
· (번역) 오산으로의 죽음의 길 : 스미스 특임대



미군 공식 기갑잡지 아머지 2021년 가을호

Filipino Armored Force in the Korean War (1950-1953)

Mark R. Condeno 중령(CDR) 저



주의 : 아머지는 포드 베닝의 미군 기갑 학교에서 미군 장교들이 서로 보라고 쓰고 찍는 잡지라서 일반적인 통설이나 밀딱용 흥미유발성 글과는 많이 다른 관점으로 서술하는 경우가 많고 비교적 교훈적으로 쓰이거나 중간에 뭔가 조금 이상해도 일단 밀어달라고 호소하듯 쓰는 경우가 많음. 아니면 이번 글처럼 중간 중간 서술 끊고 누가 어디 나왔니 하면서 대놓고 학연 좆비비기 하거나.


오!( 금지어 실화냐



전쟁 시작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일제 포격에 이어 6,000명 규모의 북괴 인민군 제105기갑여단이 소련제 T-34/85 120대와 대대 규모의 보병대와 함께 38선을 넘었다. 이 침략은 고요한 아침의 땅에서의 전쟁 시작을 알렸고 이 전쟁은 한국 전쟁으로 불리게 된다.


인민군의 강습은 해안부터 해안까지 조직적으로 이뤄졌으며 초기 공세는 옹진 반도에서 시작되었고 이후에는 의정부 회랑을 통해 한국의 수도인 서울을 직접적으로 노렸다. 한국군은 이 급습에 무방비 상태였으며 소규모 한국군은 북괴에 압도당했고 한국은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동남아시아에서 이 요청에 가장 빨리 응답한 국가는 5년 전인 2차대전에서 국토가 황폐화되었고 한국전 당시에는 공산주의 반군과 전투중이었던 필리핀 공화국으로서 이웃의 요청에 주저없이 외국 땅에 군대를 파견하여 1949년 독립한 신생국인 한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고 도우려 하였다.


필리핀은 1949년 새로 독립한 한국을 처음으로 승인해준 국가들 중 하나이기도 했으며 식량과 농업 분야에서 한국전 이전부터 한국을 돕고있던 국가이기도 했다.



초기 지원


1950년 7월, 필리핀의 유일한 기갑대대인 제10 대대 전투단이 유엔군 사령부의 한국 전역에서 필리핀 파견대로 지정되었다. 과거 제3 대대전투단이었던 제10 대대는 혼합차체(composite-hull, 용접차체 M4에 주조인 M4A1 전면 장갑을 용접해서 붙인 일종의 생산성 강화형) M4A1 셔먼 29대와 M5 스튜어트 경전차 10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2차대전에서 미군이 남기고 떠난 것이었다.


이 대대는 소총병 중대 셋과 셔먼을 운용하는 중형전차 중대 하나, 경전차를 운용하는 정찰 중대 하나 그리고 M2A1 105mm 곡사포 6문을 장비한 야전 포병대 하나로 구성되었다.


UN군의 요청이 들어오자, 필리핀은 M4A1 셔먼 전차 16대와 M18 헬켓 대전차 차량(TD) 하나를 파견했고 1950년 7월, 프란시스코 S. 타몬동(Francisco S. Tamondong) 소위(2LT) 및 부사관 두 명은 이 소규모 기갑 부대를 다른 동맹 기갑부대와 연합하여 지휘하였다.




ㄴ한국에 배치된 16대의 필리핀군 M4A1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필리핀은 여러 종류의 M4 셔먼들과 M7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M10 울버린, M18 헬켓, M3 하프트랙, M7 프리스트 자주포 및 다른 장비들로 구성된 500여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앞서 말했듯 전부 미군이 2차대전을 치룬 뒤 남기고 떠난 것들이었다.


처음 필리핀이 전차(+TD) 17대를 한국에 보냈을 때, 이 차량들은 이후 UN군이 중전차와 중형전차들을 배치하면 그걸로 교체될 예정이었으나 불행히도 필리핀군이 가져온 이 전차들은 북괴와 짱개 인민군에 대항한 초기 전투에서 파괴되었다. 일부 자료는 필리핀군이 기갑장비 없이 부산에 도착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부정확한 자료이다.


한국에 도착하고 몇 주 뒤, 필리핀 대대 지휘관 중 하나였던 에밀리오 S. 리와나그(Emilio S. Liwanag) 해군 소령(LCDR)은 대대 사령관인 마리아노 C. 아주린(Mariano C. Azurin) 대령(COL)과 대대 부사령관인 델핀 아르가오,(Delfin Argao) 소령(MAJ)에게 부산의 미군 보급창에서 전차와 중화기를 확보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해군 장교가 왜 육군 대대에서 지휘를 하고 있었는가 하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기 몇 달 전 리와나그가 필리핀 마닐라의 포트 윌리엄 맥킨레이에서 포술장(Gunnery) 과정을 수료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이 시작되자, 필리핀군은 최근에 포술 훈련을 마친 그를 제10 대대전투단으로 보냈고 그가 받은 훈련은 율동 능선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야전 포병들을 지휘하며 훌륭히 발휘되었다.


여간 상부의 허가를 받은 리와나그는 보급창에서 대대의 기갑 화력 부족을 알렸고 그날 밤 이 해군 장교는 필리핀 제10 대대전투단 진영에 M24 채피 7대와 다양한 중화기를 가져왔다. 앞서 전차를 모두 잃었던 콘라드 D. 얍(Conrado D. Yap) 대위(CPT)의 전차 중대는 특수/중화기 중대로 재편되었으며 이 채피들은 마르코스 T. 갈라시아(Marcos T. Garcia) 대위의 정찰 중대에 배속되었다. 이후 1951년 4월 23일의 율동 전투에서 얍 대위와 중화기 중대의 소대장 중 하나였던 호세 아르티아가 주니어(Jose Artiaga Jr) 중위(1LT)가 극적인 희생으로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얍 대위는 1949년 폭스 녹스의 미 기갑 학교를 졸업했고 아르티아가는 1948년 포트 베닝에서 보병 장교 과정을 수료했다. 얍 대위는 사후에 필리핀 최고 영예인 무공훈장(Medal for Valor)를 받았으며 아르티아가는 1952년 미국 공로십자훈장(U.S. Distinguished Service Cross)을 받았다.




ㄴ콘라드 D. 얍 대위와 그의 전차


리와나그는 이후 일본 도쿄에서 UN군 필리핀 연락단의 부사령관으로 복무했다.



한 필리핀 전차장의 활약


북한의 산악 지역에 위치한 미우동-신계 마을은 필리핀 전차병들이 불벼락을 맞았던 곳이다. 이 마을에는 북괴 인민군 2개 대대 1,200명의 병사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1950년 11월, 맥시모 C. 둠라오,(Maximo C. Dumlao) 대위와 파울리노 E. 산체스(Paulino E. Sanchez) 대위가 각자 이끄는 제10 대대전투단의 A 중대와 B 중대는 대대의 목표물인 신계와 미우동을 점령하기 위해 작은 마을인 신막으로 향하여 인민군을 유인했다.


신막에서 별다른 적 저항 세력을 만나지 못한 A,B 중대는 신계로 진군했다. 이 과정은 모든게 순조로웠다. 필리핀군 트럭 하나가 지뢰를 밟고 도로 측면으로 꺾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뢰가 터짐과 동시에, 북괴들이 진지에서 사격을 가해오기 시작했고 포위된 필리핀 병력들과 전차들은 인민군에 응사할 기회도 잡지 못했다.


이렇게 북괴의 강철탄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보니 세라노(Bonny Serrano) 중위(1LT)가 용감히도 휘하 81mm 박격포병들을 이끌고 적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산등성이 능선으로 올라가 반격을 시작했다. 적의 공격에도 세라노의 부대가 언덕을 장악한 것을 보고 포병대의 마리아노 C. 로블레스(Mariano C. Robles) 대위도 곡사포들을 직사사격하며 인민군의 공습에 대항했다.


이렇게 포위된 상황에서 포병들의 반격으로 적이 약간 주춤해지자, 채피 전차 전차장 중 하나였던 막시모 P. 영(Maximo P. Young) 상사(1SG)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전차를 도랑으로 몰고 들어갔다. 그는 1948년 미 기갑 학교를 졸업했는데 전차의 잠망경을 통해 대규모 적병들이 공격을 준비중인 것을 확인하고는 큐폴라로 올라와 50구경 기관총을 붙잡고는 보이는대로 탄을 갈겨 모여있던 적병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채피 전차는 전차장용 기관총에 어떤 보호용 방패 같은 것도 없었고 몇 년 뒤 영 소령은 이 때를 회상하며 "(내가) 죽거나 다 죽이거나 하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ㄴ영 상사와 그의 승무원들, 미 육군 기갑학교를 졸업한 그는 이후 신계로 향하는 길에서 북괴의 매복에 걸렸던 상황을 회상하며 "죽거나 다 죽이거나 하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전투 시작 후 약 1시간 뒤, 필리핀군은 42명의 사살된 인민군과 약 100명의 부상당한 인민군을 발견했다. 필리핀군 역시 상당수 부상자가 발생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핀군은 목표를 달성했다. 이 전투는 미 제3 보병사단 187 공수연대의 선임장교(Senior officer)에 의해 증언되었는데 필리핀군 장병들이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자 그가 처음으로 축하와 찬사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M26 퍼싱병 구하기


1951년 4월 20일, 필리핀군 작전 지역인 임진강 유역에서 정찰 순찰을 수행하고 있던 필리핀군들의 눈에 미군 M26 퍼싱 두대가 보였다. 필리핀군 지역에서 미군 전차들을 발견하자마자 필리핀 장병들은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곧장 조사를 해보자, 필리핀군은 이 미제 전차들이 진흙에 갇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전차를 빼내려고 노력했지만 그 사이 중공군 포병대의 목표물이 되었다. 퍼싱 전차를 회수하기 위한 작전이 빠르게 입안되었고 빅토리아노 얍찬코(Victoriano Yapchanco) 중위(1LT)가 이끄는 필리핀 정찰대가 M24 채피 두대의 화력 지원을 받으며 임무를 수행하기로 했다.


상황이 진행되며, 중공측도 미제 전차를 노획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했다. 필리핀군이 전개되고 약 1시간 뒤, 중공놈들이 필리핀군과 미군에게 공격을 가해왔다. 이어진 전투에서, 필리핀군은 중공군 8명을 사살했으며 더 중요하게도 미군 전차병들과 그들의 전차를 무사히 구출하여 필리핀군 주둔지로 안내했다.



영국 병사들 구하기


율동 전투 이후, 필리핀군은 토마스 브로디(Thomas Brodie) 준장(BG)이 이끄는 영국 제29 보병여단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1951년 4월 24일, 제10 대대의 채피 전차 3대와 영국군 센츄리온 전차들이 솔마리(Solma-Ri) 마을을 공격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솔마리를 지키고 있던 중공과 북괴 빨갱이 새끼들의 화력은 연합군을 훨신 압도하는 것이었다. 부대의 선두에 섰던 필리핀군의 M24 채피가 피격당하면서 전차장인 자카리아스 에스카로(Zacarias Escaro) 상등병(CPL:상병~병장)과 전차병이었던 이등병(PVT:훈련병~일병-사병 전체) 로메오 P. 아스피라스(Romeo P. Aspiras), 조지 L. 아트레로(Jorge L. Atrero), 아마도르 C. 에스파노라(Amador C. Espanola)가 전사했는데 이 손실이 중공군 대전차포에 의한 것인지 지뢰에 의한 것인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 교전은 임진강 전투의 일부로 간주되었으며 필리핀은 위의 채피 하나와 승무원들 그리고 다른 병사 한 명을 작전 중 잃었으며 부상병 10명과 실종자 3명이 발생했다. 10대대와 영국군은 작전을 계속하려 했지만 적의 화력이 너무 압도적이라 포위당한 영국군 글로스터셔(Gloucestershire) 대대 병력들로부터 2,500 야드 떨어진 곳에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포위된 영국군을 구하고자 했으나 중과부적이자, 필리핀군은 일몰전에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필리핀군이 후퇴하기 시작하자, 빨갱이들이 집중 사격을 가해왔다. 10대대 병력들은 남은 채피 전차들을 동원하여 빨갱이들에 맞섰다. 마산리에 도달하자 적 박격포가 연합군을 공격해왔고 이어진 근접 교전에서 니콜라스 L. 마후사이(Nicolas L. Mahusay) 하사(SGT:병장~부사관)가 소대에서 뛰쳐나와 인민군 벙커에서 근접전을 펼쳤다. 그의 행동 덕분에 고립된 필리핀군은 재편성할 수 있었고 마후사이는 사후 필리핀 금십자훈장을 받았다.


임진강 전투에서 필리핀 M24 채피 전차 포수인 루미노소 A. 크루즈(Luminoso A. Cruz) 이등병(PVT)이 머리에 파편을 맞아 부상을 입기도 했다.



파갈라-퀸 특임대(Task Force Pagala-Quinn)


필리핀 전차가 활약한 다른 언급할만한 상황은 캐나다군과 연합작전에서 발생했다. 이 작전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1951년 5월, 10대대는 캐나다 왕립 여단(Royal Canadian Brigade) 휘하에 배속되었고 필리핀군은 농담삼아 자신들을 "왕립 10 대대 전투단"이라고 불러댔다. 반격 작전 당시, 필리핀군과 캐나다군으로 이뤄진 이 특임대는 캐나다군의 제임스 퀸(James Quinn) 소령(MAJ)과 필리핀군 C 중대 에르둘포 G. 파갈라(Erdulfo G. Pagala) 중위(1LT)가 지휘하면서 파갈라-퀸 특임대가 되었다.


이 특임대는 캐나다군의 셔먼과 필리핀군 정찰대의 잔여 M24 채피를 합쳐 총 10대의 전차를 보유했었는데 한탄강(원문은 Hantachon River:한타천이라는데 한탄강이겠지. 잘 아는 갤럼 있으면 댓글좀)을 뚫고 북쪽으로 이동하며 적진을 휩쓸고 북괴가 사용하다 남은 포탄과 화기 부품들을 노획했다.



최후의 교전


필리핀군 전차가 마지막으로 중공군 빨갱이들과 교전한 것은 연합군이 전방으로 공세를 가하던 시기였다. 제10 대대 지휘부는 중공군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판단이 들자 파우스티노 빌라누에바(Faustino Villanueva) 소위(2LT)가 이끄는 소대에 채피 두대를 붙여 지휘소로 향하는 길을 틀어막았다. 빌라누에바 소위는 전차를 보병에 선행하여 배치해뒀는데 이에 대항하여 중공군은 칠흑 같은 밤을 이용하여 연합군 방어선을 넘어 전차 뒷편으로 숨어들어왔다. 중공군은 제10 대대 지휘소로 직행했고 채피 전차장중 하나였던 크리스핀 파시엔테(Crispin Paciente) 공군 하사(TSGT)가 포수인 안토니오 F. 아가톤(Antonio F. Agaton) 일병(PFC:일병~상병)에게 후방의 중공군에게 마구잡이로 쏘라고 명령했다. 이 사격에 다른 채피도 주의를 기울였고 채피 전차장은 파시엔테 하사에게 어디다 쏘고 있냐고 물었다. 파시엔테는 중공군 빨갱이들이라고 답했고 이 다른 채피의 전차장인 라파엘 멤브라도(Rafael Membrado) 상등병(CPL)은 파시엔테와 그의 전차병들이 꿈이라도 꾼건가 하며 농담이라 치부했으나 곧 적의 존재를 알아차리고는 승무원들에게 경고했다. 파시엔테는 밤의 어둠속 그림자들에 암구호를 외쳤으나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다.


그러자 아가톤이 "적군이다, 쏴라!"라고 외쳤으며 파시엔테는 50구경 기관총을 붙잡고는 짱개들에게 기관총탄을 갈겼고 아가톤은 톰슨 기관단총을 가지고 나와서 지원사격을 했다.


그러고는 파시엔테는 조종수인 아우렐리오 부도모(Aurelio Budomo) 상등병(CPL)에게 전차를 뒤로 돌려 빨갱이들을 비추라고 했고 바닥에 쓰러진 중공군 시체 두 구를 발견했다. 적군들은 60mm 박격포 하나와 포탄들을 가지고 지휘소로 올라가고 있었고 지휘소를 지켜낸 파시엔테와 승무원들은 10대대 장교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ㄴM24 전차장 크리스핀 파시엔테 공군하사와 그의 승무원들



필리핀이 얻은 것들


한국 전쟁과 이후 몇 년 동안, 필리핀은 5개 대대전투단을 한국에 배치했다. 그러나 그 중 4대 대대만 전차를 보유했으며 이 과정에서 필리핀 기갑부대의 문제점을 알려주었다.


한국 전쟁은 필리핀군에 있어 첫 해외 연합 작전이었고 여기서 필리핀 기갑부대는 낙타등(원문은 낙태동:Naktaedong임)과 율동 그리고 이어리 고지 전투에서 적 방어진을 공격하고 아군에 화력지원을 하면서 그 기량을 잘 보여줬으며 다국적군의 지휘를 받으면서 필리핀 기갑부대의 작전술도 크게 향상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2차대전 이후 미국이 M26 퍼싱 같은 중전차(Heavy Tank)를 필리핀에 넘긴 것은 한국에서 연합군에 전술, 전략적 이점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전쟁 초기에 말이다.




결론


이 글에서 서술한 전차 작전은 대부분 필리핀군의 첫 파견대인 제10 대대전투단에 대한 것이다. 이후 채피와 셔먼 전차를 보유한 제20, 19, 14 대대전투단이 주한 필리핀 원정군으로 배치된다. 이 간략한 이야기는 필리핀 전차병들의 초기 해외 임무를 기록한 것으로 그들의 업적과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작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