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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정리해본 쌍령 전투 전개도)


개요


인조가 남한산성에 갇혔고 이를 구원하려 경상 근왕군이 현재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쌍령에 진출함 (1월 2일). 조선군의 숫자는 약 3000명으로 추정되고 좌군/ 우군으로 나뉘에 각각 마주보는 고지에 진을 설치함. 이에 맞서는 악다귀/ 석이도 휘하의 청군 병력 500명은 1월 3일 아침일찍 산봉우리에서 부터 조선군 좌영부터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요토가 이끄는 1000명이 좌우영을 휩씀. 





본문


흥미롭게도 [병자남한1일기]나 [연려실기술]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허완의 모습은 더 높은 곳에 진을 치자는 안동영장 선세강의 요청을 세 번이나 물리치고 척후를 게을리해 높은 고지 (마름산 고지일 확률이 높다)를 청에게 내주었다는 무능한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승정원일기]에서는 허완이 유의미한 숫자의 병력을 고지에 보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처음에 진을 칠 때에 망부(亡父)는 적병이 높은 곳에서 내려올까 염려하여 정예의 포수 300명과 사수 200명을 산 위로 보내어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였습니다. 해가 뜰 무렵에 수백이 되는 적의 기병이 진영 앞으로 말을 달려왔고, 수천여 기병은 산성으로부터 엄습해 와서 바야흐로 산 위에 있던 포수ㆍ사수와 서로 접전을 벌였습니다. 가장 뒤에 있던 안동(安東)의 군인이 함부로 고함치기를, 「화약(火藥)이 다 떨어져가니, 서둘러 가지고 오라.」 하니, 적병이 이 말을 듣고는 즉시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돌진하였습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9월 9일


만약 정말로 정예 포수 300명과 사수 200명이 마름산 고지에 포진해있었더라면 석이도와 악다귀가 이끄는 520명의 병력이 상당히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특히 기병이 기동하기가 까다로운 산지에는 더욱 말이다. 다만 이 사료를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는 정확하지 않다. 먼저 이 장계를 올린 이는 죽은 허완의 아들 허장이 올린 것이기에 그는 그의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척후를 게을리 했다는 논란을 잠재워야만 했을 것이다. 실제로 [연려실기술]을 위시한 다른 문서들에서는 이와 같은 언급이 없을 뿐더러 [승정원일기]에는 민영의 우병이 아침밥을 먹고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려는 찰나에 청군이 들이닥쳤다는 서술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한테 올리는 장계에 거짓말을 고했다고 믿기도 어려운게 사실이다. 


“다시 쌍령(雙嶺)의 우병사(右兵使) 민영(閔栐)에게 갔습니다. 신이 산성의 적 위치 및 우리 군대가 전진할 형세를 일일이 민영에게 말했더니, 민영이 신을 보고 아주 기뻐하여 아침 일찍 밥을 먹고 막 출발하려고 하는데 적이 이미 밀어닥쳤습니다. 좌병(左兵)이 먼저 궤멸하고, 우병(右兵)이 이어서 패몰(敗沒)하였습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4월8일 


그리고 산등성이에서 교전을 했다는 청나라실록에 의해서 실제로 조선군이 산 정상에 대한 척후를 실시했다고 봐야 할것이다. 산 등성이에서의 교전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석이도와 악다귀가 앞으로 나아가 적과 더불어 싸웠는데 악다귀는 상처를 입고 먼저 돌아왔고 석이도가 무리를 이끌고 적병을 공격하여 깨트리고는 이에 산등성이 정상에 서 있었다. 악탁(요토)이 사람을 보내 타일러 회군토록 하였는데 석이도가 이에 따라 무리로 하여금 퇴각하게 하였고 자신은 상처를 입어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석이도와 같은 우록 사람 곽매가 있어 말에서 내려 소리쳐 말하길

   <장수가 전사하였는데 어찌 그 시신을 버릴 수 있느냐?>

이때 본기 국구 아십달이한 우록 예하의 호군 장교 포당극륵이 듣고서는 목소리를 높여 불러 군사들을 멈추게 하였고 석이도의 시신을 수습하게 하였다.”  청실록 1637년 윤 4월 25일


이에 견주어 보았을 때 청군의 장수 한명이 전사, 한명이 중상을 입었을 정도로 굉장히 격렬했던 전투였음을 알 수 있다. 글을 잘 보면 청군의 돌격이 1, 2차로 나뉘어져 있는데 바로 악다귀가 부상을 입고 돌아와 사실상 실패로 끝난 1차와 석이도가 다시 무리를 이끌고 조선군을 공격해 깨뜨린 2차로 볼 수 있다. 이를 조선의 기록과 비교해보면 의미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1월 3일 이른 아침에 적의 선봉 33명이 목방패(木防牌)를 가지고 남산 상봉(上峯)에서 줄지어 전진해 오니, 아군이 나가 맞이하여 한 번 싸워 용감하고 건장한 적병이 탄환에 맞아 죽고 탔던 말이 뛰어서 진중에 들어가니 적이 두려워서 감히 핍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포수가 연달아 함부로 쏘아대는 바람에 화약이 이미 다 떨어졌으므로 포수들은 화약을 더 달라고 연달아 소리치고 또 정포수를 더 보내달라고 청하였다.” 연려실기술 26권 - 여러 장수의 사적 


선봉 33명이 산봉우리에서 부터 내려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석이도와 악다귀가 이끄는 병력의 위치와 일치하다. 그러므로 1차 돌격은 조선군 정예 포수와 사수의 저항에 청군이 큰 피해를 입고 물러갔음이 확실해 보인다. 다만 그 후에 탄약이 다 떨어진 조선군 포수 일부가 탄약을 요구하면서 소리를 치는데.


적이 이 말을 알아듣고 다시 재촉하여 앞으로 나와 목책(木柵) 가까이 왔다. 안동 영장(安東營將)선약해(宣若海)가 홀로 적의 칼날을 당하여 손수 화살 30여 발을 쏘았으나 모두 목방패에 맞았고 화살은 이미 다 되니 신지(信地)에 우뚝 서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적병이 목책 안으로 쳐들어오니 중견포수는 총 한 번 쏘지 못하고 저절로 무너졌다.” 연려실기술 26권 - 여러 장수의 사적 


이를 알아들은 청군이 목숨을 무릅쓰고 목책을 넘어 진으로 들어와서 2차 돌격을 성공시켰다고  기록되어있다. 


중군(中軍) 이인남(李仁男)이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달아나자, 여러 군사들이 이로 인해 뿔뿔이 흩어져 막을 수 없는 형세였는데, 망부는 오히려 친애하고 신임하는 휘하 수십 인을 이끌고 와 적과 싸웠습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9월 9일


허완이 겁을 집어먹어 말을 타지 못하자 3번이나 부축하여 말에 태웠으나 번번이 떨어져서 밟혀 죽었다. 군졸이 붕궤되어 쓰러진 시체가 목책과 가지런히 쌓여 있으니 적병이 짧은 무기로 함부로 찍었다.” 연려실기술 26권 - 여러 장수의 사적 


“허완은 왼편 낮은 곳에 진을 쳤는데 정포수(精砲手)를 뽑아서 모두 가운데에 두어 굳게 스스로를 호위하고 중등과 하등 포수는 밖에 몰아놓고 다만 화약을 사람마다 각각 2냥씩 나눠주었다.”  연려실기술 26권 - 여러 장수의 사적


허완의 최후에는 서로 상반된 기록이 있지만 만약 승정원일기의 기록의 중요시한다면 전세가 불리해지자 자신을 호위하게 두었던 정포수들을 통솔해서 산봉우리로 온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하지만 분투끝에 결국에는 허완, 안동영장 선세강 (선약해)을 비롯해 좌군 지휘부가 전멸한 것에는 이의가 없으며 이는 우군의 붕괴를 일으켰을 것이다. 다행이도 좌군의 본진은 그나마 완만한 평지에 위치해 있어 우군과 다르게 도망가기에는 용이했을 것이다. 그리고 석이도가 이끄는 청군은 조선좌군 진지를 차지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요토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철군 명령을 내리는데 이에 대한 이유는 찾아보기 어렵다. 막연히 큰 피해를 입어서 철군을 명한 것 일수도 있고 아님 피해를 입은 500명 가량의 소규모 병력으로는 조선 우군까지 치기는 무리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어찌됐든 석이도 또한 철군과정에서 부상을 입어 낙마하여 전사했고 그 시체를 수습하는데에도 크게 애먹은 것을 보면 그 때 까지도 조선군의 산발적인 또는 조직적인 저항이 남아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장수가 전사하였는데 어찌 그 시신을 버릴 수 있느냐?> 이때 본기 국구 아십달이한 우록 예하의 호군 장교 포당극륵이 듣고서는 목소리를 높여 불러 군사들을 멈추게 하였고 석이도의 시신을 수습하게 하였다. 아울러 그 본기 파언 우록 예하의 손달리, 아막극도 우록 예하의 살목합도, 소새 우록 예하의 과비달 3인을 벴는데 포당극륵도 모두 시신을 취하길 기다리지 못하고 무리를 인솔하여 결국 패륵의 군영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이당시 군사들이 전진하여 적병을 공격할 때 포당극륵이 또한 전진하지 않았고 석교하를 건너서 곧바로 본영으로 향하여 가버렸기 때문에…” 청실록 1637년 윤 4월 25일


정상에서의 전투도 극심했지만, 청군의 병력은 더 있었다. 승정원일기 인조 16년 5월 27일자, 인조 15년 9월 9일자 그리고 연려실기술을 참조하면 수백에서 1,000 여기에 달하는 적기들이 좌우로 나뉘어 양 진영을 공격했다고 나와있다. 이 청군병력들이 사실상 전투 후반부를 맡지 않았을까 한다. 우로 (아마 좌영 우영 사이에 있던 길을 뜻하는 듯)를 따라 진출했다던 이 청군 병력과 악다귀와 석이도가 이끈 별동대를 더하면 약 1,500명 즉 요토가 이끄는 전 병력의 숫자와 들어맞아 떨어진다. 


“신이 영남 사람들에게 들으니, 연전의 변란 때 허응상(許應祥)이라는 영남 사람이 초군으로서 우병사를 좇아 쌍령(雙領)으로 가 좌병사와 함께 서로 마주하여 진을 치고 있었는데, 적병 천여 기가 좌우로 나뉘어 두 진영을 공격하였다고 합니다.” 승정원 일기 인조 16년 5월 27일 


결국에는 허완이 이끌던 조선 좌군은 지휘부의 부재와 추가적인 청군의 공격으로 무너져내렸고 이제 남은 것은 반대편 고지에 진을 치고 있던 민영의 우군 뿐이었다. 좌군이 무너지는 동안 상대적으로 준비할 수 있었던 시간이 존재했던 우군은 청군의 공격에 꽤 버티는 모습을 보여준다. 


“좌군이 패배하고 난 뒤에 다음으로 민영과 더불어 싸우는데 대치하며 시간을 보내면서 점차 살상함이 있었다.” 병자록

“좌군이 패하자 적들이 우군에 다가왔는데, 포수들이 한 차례 일제사격하여 적들이 탄환에 맞고 번번이 넘어져 감히 핍박하지 못했다.” 연경재전집 (18세기 말 기록)

“다시 우진에 다가오자 민영이 진을 정돈하여 기다리다가 포환을 일제히 발사하여 맞은 자가 번번이 죽었다. 적이 감히 핍박하지 못하여 승리할 기세가 있었다” 연려실기술 26권 - 여러 장수의 사적 


또한 민영의 우군에는 독특한 원군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임진왜란때 귀순한 김충선이다. 물론 쌍령전투에서 그의 존재가 확인되는 문헌은 1798년에 지어진 “모하당집"에 국한되지만 충분히 관심을 가져 볼 만한 사안이다. 이에 따르면 그와 그의 군대 150여명은 꽤나 큰 공적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병졸 150명을 거느린 바로 곧장 쌍령의 군진에 다다라 추로(醜虜)를 살육하여 고의 승첩하기에 이르렀으나”  모하당집

“다시 병자년 오랑캐 병사들이 크게 몰려오자, 공이 향장(鄕庄)에서 변고를 듣고는 부르는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광주 쌍령(雙嶺) 군진에 나아가 싸웠다. 오랑캐의 코 500여 급을 베고” 모하당집.


그러나 이러한 분전도 결국에는 끝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전투전에 화약 2냥을 지급받았던 우군병력들이 화약 부족을 호소하다 화약고에 불이 붙어 영내에서 큰 폭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약을 단지 2냥만 지급하였기에 다시 화약을 나누느라 급히 서두르던 참에, 화승이 화약에 떨어져 폭발하여 감분수령(監分守令) 이원과 군병이 타죽고 진중이 크게 요란하였다. 적이 이때를 타고 충돌하여 마침내 크게 무너지고 민영은 죽었다” 연려실기술 26권 - 여러 장수의 사적


사실 이 2냥이라는 화약이 부족한 양을 아니였을 것이다. 1603년에 출간한 “신기비결"에 따르면 조총 1발에 필요한 화약량은 2돈 - 2돈 3푼 사이이고 1냥은 10돈이기 때문에 이를 환산하면 약 7-10발을 발사할 수 있는 양인 것이다. 아무래도 적절한 사격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먼 거리에서 부터 화약을 낭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포수들이 잇달아 어지러이 쏘아 화약이 떨어지자” 라는 연려실기술의 글을 따르면 이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어찌됐건 진중에서 발생한 거대한 폭발은 규율을 어지럽게 했고 이는 청군 기병들이 이를 이용하는데에 이른다. 


이로써 조선 우군도 무너지고 만다. 민영의 최후는 허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논란이 없는 편인데 이는 실록이나 승정원 일기에서도 그가 자살했다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당초 경상 감사 심연(沈演)이 올린 장계 내에 "민영(閔)은 스스로 분신하여 죽었고, 허완은 간 곳을 모르겠다"고 하였기 때문에 민영에 대해서만 추증하였습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9월 9일 

“민영이 고전하길 반일으로 살상함이 몹시 많았다. 적이 힘을 다하여 공격하여 민영 군이 드디어 패하자 자살하였다. 뭇 군대가 다 무너졌다.” 남한1일기


좌군과 다르게 우군은 강과 가파른 지형덕에 후퇴에 불리했을 것으로 보이고 이는 우군에 괴멸적인 피해를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결과 


사실 당시 청군도 상태가 좋았다라고는 하지 못한다. 쌍령전투가 일어났던 1월 3일 기준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던 청군은 약 8,000명 정도로 1,2,3차 선발대 및 본군 증원대를 모두 합한 병력이였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근왕군 소식에 많게는 몇 천명씩 적게는 몇 백명씩 요격을 보내느라 그리고 본진은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포위가 느슨한 상태였기 때문에 만약에 남한산성 포위가 뚫렸더라면 큰 위기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1월 2일에는 요토가 쌍령으로 1,500명을 보낸 것과 동시에 양구리와 도도가 2,500명을 이끌고 전라 근왕군을 맞으러 광교산으로 진군했기 때문에 더욱 더 포위가 얇아진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상 근왕군에 큰 피해를 입혀서 격퇴하였기에 쌍령전투는 청군의 전략/ 전술적 승리임은 부정할 수 없을 듯 하다. 하지만 전투의 양상으로 보아 청군도 조선군의 화망에 출혈이 있었고 대장 1명 전사와 1명 중상의 전과를 보았을 때 종래에 크게 알려져있던 4만대 300 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대패는 결코 아니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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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쌍령전투에 대해서 공부해보면서 정리해본건데 이런 쪽 전문가가 아니라서 틀린 정보가 있을 수도 있음. 너그럽게 봐주길 바래..

다음에 시간이 남으면 왜 조선군 병력을 3000으로 청군 병력을 1500으로 추정했는지에 대해 적어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