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능진 사건
(1) 사건의 배경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최능진(崔能鎭)은 해방 직후 평남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치안부장으로 활약하다가 월남하여 미군정 경무부 수사국장으로 경찰에 투신하게 된다.
그러나 친일경찰을 등용하고 개인적인 부패행위를 저지른 직속상관 조병옥의 행동을 비난하며 항의하자 이를 기화로 파면을 당한다. 그는 이후 1948년 5.10 총선에서 친일세력 척결 의지가 전혀 없는 이0만의 당선을 저지하려는 의도로 동대문 갑구에 출마하려 하지만 경찰과 서북청년단에 의한 조직적인 방해공작으로 후보등록이 취소된다. 우여곡절을 끝에 극적으로 입후보하게 되지만 선거 이틀 전인 5월 8일, 경찰 주도로 추천서에 본인 스스로 날인하지 않았다는 추천인들의 진술이 확보됨에 따라 입후보 등록은 다시 좌절된다.
이와 같은 일련의 행동이 정치적 도전으로 간주되어 이0만의 눈 밖에 나게 되고 최능진은 급기야 1948년 10월 1일,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국방경비대 내부에혁명의용군을 조직하려 했다는 내란음모혐의로 체포된다.
이후 재판을 거쳐 1949년 5월 31일, 서울고법에서 사회질서안녕 파괴혐의(미군정법령 제19호 제4조 (나)항)로 징역 3년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10월 22일, 설상가상으로 상소단계에서 여순사건의 배후조종 및 폭동살인 혐의가 추가로 부대 공소되어, 11월 2일, 징역 5년을 선고받은 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도중 전쟁이 일어나자 북한군에 의하여 풀려나게 된다.
(2) 서울수복 후 군법회의를 통한 사형선고와 집행
이0만정권이 환도한 1950년 10월 1일, 최능진은 적 치하에서 출옥한 사실을 인정하고 자수하였으나 서울에 남아 벌인 정전․평화운동을 이적행위로 규정한 방첩대(CIC)는 그를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하였다.
그는 국방경비법 제1조 제5호(군법피적용자)에 의거 ‘복형자’로 분류되었으며, 같은 법 제3조에 따라,이적죄(제32조)가 적용되어, 1951년 1월 20일, 사형이 선고된 후 2월 11일, 경북 달성에서 총살에 처해졌다.
당시 군법회의 판결의 판시내용을 살펴보면 동족상잔을 피하고 평화적으로 전쟁을 종식시키려 노력하였던 그의 행위는 지나치게 편향적으로 해석되었으며 객관적인 사실관계도 조작․왜곡되었다.
그에게 사형이 선고된 결정적인 요인의 무게중심은 5.10 총선과정에서 불거진 이0만 당선을 위협하는 ‘정적’으로서의 위상에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2009년 9월,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군법회의에서 사실관계가 오인된 판결에 따라 이루어진 사형집행의 부당함을 인정하여 재심을 권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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