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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북한군이 UN군을 부산 방위선으로 압박해왔으며 미래는 어두워보였다. 거의 모든 미 점령군이 한국으로 향해 전투를 치뤘으나 내가 보충장교로서 소속되어 있었던 7사단은 후지야마 산의 사면에서 북쪽에서 온 적과 전투를 치르는 다른 사단들과 함께 하기 위해 열심히 훈련을 받는 중 이였다. 그 당시 인천상륙작전은 1급 기밀 이였으나 무언가가 진행되는 중이라는 소문들은 있었고, 장군의 긴장과 열정은 그것에 살을 붙였다.



극동의 미군들의 인력문제는 갑작스럽게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몇개월간 미국에서의 징집은 없었고, 정규부대는 이미 뼈대만 남은 평시체제로 돌입하며 군축의 대상으로 들었다. 한국에서의 전투가 시작된 이후, 본토의 모병소와 훈련부대들과 같은 것들을 모조리 중지하고서 보충작업에 들었고, 극동에서는 모든 비전투병력을 소총수로 만드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미봉책들은 미 전투부대들을 효과적인 전력을 갖추게 하는데는 실패로 돌아갔으며, 더 많은 전투병력을 찾아내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언제, 어느 시점인지는 모르겠으나 극동에서 한국전쟁에 활용가능한 유일한 군 병력을 즉시 제공할 수 있는 한국인들을 활용하려는 계획이 추진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아직 UN군이 통제중인 지역에서 가능한 모든 남성들을 징집하고 있었고, 이들은 미 육군에서 그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며 충분히 훈련된 미군들이 들어올때까지 미 육군에 임대되었다. 그 계획은 일종의 지침으로 변했다. 이 임대된 한국군들은 미 전투부대에 직접배속되었고, 미군 신병과 동일하게 대우받았다.


이 모든 시험은 카투사(미 육군 배속 한국군) 프로그램으로 알려졌다. 내가 7사단에 도착했을때 새롭게 징집된 7천명의 한국인들이 요코하마에서의 긴 여행을 마치고 도착한 상황이였다. 나는 사단에 잘 녹아들었으나 이는 내가 미군 병사로서 제복을 입고, 무장했으며, 훈련받았기에 그랬다. 도착한 한국인들은 그들이 입고 있던 민간인 복장을 입고 있었는데 이것들은 불룩한 흰 솜 바지, 작은 흰색 재킷, 고무신과 같은 것들이였다. 아무도 영어를 할 줄 몰랐으며, 이를 보완하듯이 미군 거의 대다수도 한국어를 할 줄 몰랐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혼돈에 빠졌으며, 미군들도 이 새로운 전우들을 보고서 혼란스러워 했다.


한국인들은 곧바로 그들을 위한 과정, 민간인 복장을 벗고서 이동식 샤워시설에서 온몸을 박박 씻는 과정에 돌입했다.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깔끔한 이들이였고, 그들은 기나긴 더러운 배와 트럭에서의 생활을 끝내고서 하는 목욕을 즐겼다. 그리고 그들은 DDT로 샤워를 했으며, 다소 강제로 이뤄진 이발을 받았다. 미군 작업복이 지급되면서 한국인들은 미군 병사처럼 보였다. 제복 지급에는 약간의 문제들이 있었다. 한국인들은 대부분의 동양인들 처럼 미국인 남자에 비해 키가 작았으며, 보급장교는 신속히 스몰사이즈 재고가 소진되었다고 알렸다, 당연하게도 보급 수량은 일반적인 미국 사이즈 표에 따라 지급되었기에 일어난 일이였다. 군화 또한 문제를 일으켰는데 대부분의 한국인은 사이즈 5 혹은 6을 신었다. 일반적인 군화 보급에서 이 사이즈들은 별로 나오지 않았다. 그 결과 대부분의 한국군은 군화 등으로 걷고 있었고, 군화의 끝부분은 단순하게도 말려올라간 상태였다. 작업복의 소매나 바짓단은 개어올리거나, 잘라낼수 있었으나 전투화는 그런게 불가능했다. 전투화를 대체할 일제 테니스화를 조달하려고 애를 썼지만 물량이 매우 부족했다.


그들이 개인화기를 지급받았을 때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미 육군 표준 화기인 M1 개런드의 개머리판은 더 작은 한국인들의 어깨엔 너무 길었다. 더 작은 카빈은 쉽게 조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정은 한국인들의 몫으로 넘어갔다. 그들이 캠프 후지의 사격장에서 두 화기를 모두 써본 뒤, 그들은 M1 소총으로 더 강력하게 피해를 줄 수 있다고 결정했다. 그들은 이제 소총을 얻었다.


충분히 놀랍게도 그들은 짧은 소총수 과정에서 매우 좋은 결과를 받았다. 이 결과는 평시 미군 병사들이 완전한 훈련과정에서 얻어낸 기준에는 못 미쳤으나 한국인들은 빠르게 적절한 조준경 시야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으며, 부족한 스킬은 열정으로 보충해냈다.


충분히 이상하지만 완전히 낯선 상황에서 낯선 이들의 그룹으로서는 엄청나게 열정적인 모습이였다. 그들은 총검술 훈련을 받는 동안 인디언처럼 고함을 쳤다. 또 그들은 포복 신호를 받자 후지야마의 트랙에서 밭고랑을 만들어냈다. 기관총과 무반동총을 분해조립하는 모습은 나이든 보병 부사관들을 놀라게 했으며, 그들의 작업 세부사항에 대한 반응은 미측 카운터파트와 동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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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훈련기간내내 엄청난 어려움들이 있었다. 이중 제일은 언어장벽이였다. 한국인중 일부만이 영어가 가능했고,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한국어를 몰랐다. 일어는 제한적인 가치만 있었는데,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구사 가능했으나 사용하는걸 꺼렸다. 그에 더해 미 점령부대의 일본어 어휘는 군 훈련에는 조금이거나 완전히 쓸모가 없었다. 이곳에서 많은 판토마임과 시연이 이루어졌다. 한국인들은 특정 행동에 대한 영어 단어를 배껴냈고, 점차 선택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극초기에 배운것은 "차우"였으나 한국인들은 이를 "찹찹"으로 대체하였고, 이름의 충돌이 일어났다.


미국의 부유한 레이션들이 한국인들에게 주어졌을때도 문제가 일어났다. 처음엔 그들 중 일부가 탈이 났으나 빠르게 회복했다, 그리고 일반적인 짬밥은 한국인에게 있어선 매우 고급 요리였기에 그들은 곧 육군이 본 가장 거대한 사냥개들이 되었다.


그들의 격리기간이 끝나자 한국인들은 미국 중대로 통합되었다. 초기엔 미군 병사 하나당 한국인 한명으로 비율이 맞춰졌다. 이런 상황에서 전우조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문제가 없는 한 미군과 한국군은 붙어다녀야만 했다. 미군은 그가 가능한 모든것은 한국군에게 가르쳐야만 했다. 한국군은 점차 미군부대의 빈 부분들을 채워나갔고, 따라서 전장에서 미군 부대를 효과적으로 유지하는 화기와 병력의 적절한 균형이 유지될 것이였다. 훈련 기간은 불행히도 3주만에 끝났고, 사단은 승선을 위해 요코하마로 향했다. 이것은 상륙작전이였으며, 낙하산 강하를 제외하고는 가장 어려운 작전이였으나 부대원 대부분이 신병인 상황에서 임무를 맡게 되었다. 병사 절반가량은 그들의 지휘관의 말을 이해하거나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이였다.


붐비는 병력수송칸에서의 생활은 전우조 시스템을 최대 한도로 테스트했다. 일부 미국인들이 외국인들을 경멸하는 전통은 이 나라의 한국인들이 이전에 병력수송선과 같은 것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로 인해 강조되었다. 그들은 배관들이 어떤식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해 모호한 개념조차 없었으며, 그들 중 일부가 반합을 머리 감는데 사용하고 세면대를 변기로 사용하면서 이것이 나타났다. 식수대에서 물을 틀기 전에 수도꼭지에 입을 가져다 대는 간단한 방법을 통해 물낭비를 막을 수 있는데도 왜 물을 낭비해야만 하는지 한국인들은 이해가 불가능했고, 이로 인해 식수대는 또 다른 골칫거리로서 남았다. 한국인들이 식사 줄에 도달하는 속도는 이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는 미군들 일부에게 짜증을 만들어냈다. 다행히 이로 인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전, 하선할 시간이 다가왔다. 또 다행히도, 1 해병사단이 해변교두보를 깊숙히 확보한 상태였기에 7사단은 어떠한 사격을 받지 않고도 상륙해냈고, 전투투입 몇시간 전까지도 항해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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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에서의 한국인들의 능력은 후에 많은 허풍의 주제를 차지했다. 한국인들 중 일부는 영웅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이들 중 일부는 위험의 첫 징후를 목격한 뒤 사라졌다. 대다수는 3주 미만의 훈련을 받은 다른 군인들과 동일하게 행동했는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다. 그들은 소총수에게 요구되는 무수한 자동적 반응에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그들은 남들이 걸으면 걸었고, 앉는다면 앉았으며, 가능하다면 식사를 취했다(그들 중 대다수는 투입 이후 첫 끼에 이틀치의 비상식량을 먹어치웠다), 그리고 대부분은 불난집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더불어 서울에서 한국인들이 받은 환영은 떠들썩했다. 시민들은 불과 2년 전만해도 수도권에서 해방군과 점령군 역을 맡았던 7사단 패치와 복장을 입은 동족들을 보고서 놀랐으며 반가워했다.


통합된 부대의 미군들과의 관계에 대해선 대부분의 불만은 공통언어가 없기에 생기는 오해에서 비롯된 불만들이였다. 이 시점에 한국군은 지휘관의 간단한 명령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었고, 무기의 간단한 매뉴얼과 근접명령 훈련에 놀라울 정도로 익숙해졌다. 그들의 군사적 예절은 훌륭했으며, 또 그들은 "Yes, sir", "No,sir"를 장교들에게,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를때도 하는 방법을 익혔다. 많은 이들이 경비 및 보안, 혹은 취사병으로서 훌륭히 임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전쟁이 왜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었는데, 아마 그들이 초기 공산군의 공격에 피난해온 피난민 출신이였고, 남한을 점령하려는 공산당의 짧은 공세에서 수차례 이뤄진 학살에 가족들을 잃었기 때문이였을 것이다. 한국군은 엄청난 복무 의욕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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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탈환전이 끝나갈 무렵, 사단은 다른 상륙작전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번엔 북한의 동쪽 해안, 원산의 북쪽으로 상륙하라는 명령이였다. 7사단은 서울의 남쪽에 위치한 수원에서 트럭으로 부산인근의 주둔지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재무장했고 새로운 모험을 위해 떠나기 전 일주일간의 훈련을 받았다. 우리가 배에 승선한 뒤, 우리는 부산항에서 3주간 해군이 원산항으로 향하는 기뢰밭을 소해해 상륙할 수 있도록 하길 기다렸다. 이 3주간 우린 동양이 미군복을 입고서 서양을 만났을때 일어났던 일들을 다시 겪어야만 했다. 이전의 문제들, 음수대, 식사 줄, 화장실에서의 문제가 다시 일어났으나 한국인들이 경험이 쌓이며 이러한 일들은 줄어갔다. 3일에 한번씩 병력들은 상륙해 부산 인근에서 행군하며 훈련을 진행했다. 행군의 경로는 항구에서부터 유명하고 냄세나는 수산물 시장을 통과하는 경로였으며, 한국인들은 항상 PX 캔디바를 약간 챙겨 산해진미와 바꿨는데 그 이름은 마른 오징어였다. 말할 필요도 없이 동양과 서양은 마른 오징어 문제로 충돌하진 않았고, 약간의 조사를 거쳐 많은 오징어들이 배 옆에서 그들의 조상들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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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영어를 배우길 열정적으로 바랬으나(영어에 대한 지식은 동양 에서 명성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이였다) 불행히도 그들은 가장 쓸모 없을 어휘를 배웠다. 우리에겐 망신스럽게도 일부 촌스러운 미국인들은 한국인들에 대해 거친 군인 욕설로 인사했다.


한국인들은 이 말들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길이라 생각했고, 그 의미를 전혀 몰랐기에 미군들에게, 특히 스트레스가 이미 쌓인 상태에선 이런 말들로 인사함으로 인해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우리는 지나다니던 중 영어를 유창히 하는 컬럼비아대와 조지타운대를 졸업한 한국인 의사를 데려왔다. 그는 한국측에 미국 욕설의 의미를 강의하겠다고 제안했다. 우리는 몇개 조를 만들었고, 류박사는 강의를 진행했다. 류 씨와 한국인들에게 이는 심각한 모습이였으나, 의사가 부드러운 한국어로 말하던 중 갑작스럽게 흔한 4글자의 앵글로-색슨주의를 가져와 한국인들에게 가르치는 모습은 참으로 이상했다. 분명히 류씨의 미국인 교육에는 단순한 의학 이상의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류 박사의 강의는 효과적이였다. 한국인들은 그들이 말한 것들의 의미를 알고서 매우 당황했는데, 공경은 한국인들의 뿌리 깊은 습성이기 때문이였다.


북한전역에서의 전투동안 한국인들은 병사로서 만들어졌다. 기본적인 전술상황은 추격전이였다. 우리의 작전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장거리 순찰이였고, 적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이였다. 한국인들은 지역민들과의 소통이 가능했고, 이젠 순찰대에 있는 미군 부사관혹은 장교에게 정보전달이 가능할 정도로 충분히 전문영어를 익혔기에 이러한 순찰대원으로서 매우 귀중했다. 한국인들은 미국인들에게 지역민들의 집에서 바닥을 따뜻하게 하고, 철판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었을 뿐 아니라 마을에서선 신선한 달걀과 숯, 사과의 가격을 흥정하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한국인들과의 관계는 "저놈들을 모두 죽여버리자"에서 "함께 지내는 법을 모르는 이들은 다 죽여버리자"로 태도를 바꾸게 했다.


흔들릴 기회가 마침내 다가왔다. 미 10군단과 함께 작전하던 한국 육군 군단은 7사단에 배속된 카투사 절반을 동의한다면 바꿀 것을 요청했다. 그들이 어떤 절반을 얻을지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었다. 사단 전체에 교체 계획에 대한 소문이 퍼졌고, 한국인들은 좋은 미군 짬밥을 뒤로 하고서 한국군의 쌀과 생선을 배급받는 불행한 가능성에 대해 고려해야만 했다. 한국인들의 개선들은 미군의 전투력 유지에 도움이 되었고, 더 날것 그대로 말하자면 한국군에서의 생활은 USO 클럽들(역주:미군 민간 복지단, 각종 공연과 시설들을 제공한다고 함)의 연속은 아니였기 때문이였다. 7사단이 흥남에서 그 유명한 상륙작전을 역으로 재현하며 교두보에서 절후사기 직전, 카투사중 선발된 절반은 한국군으로 이관되었다. 남은 이들은 부산으로 이동하기 위해 해군 수송선에 탑승했고, 그들은 마치 베테랑처럼 보였다. 나는 철수 뒤 한국인들에 대한 일반적인 불만은 듣지 못했다. 시간과 공유라는 모험이 동서양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남은 거의 모든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임무를 수행하고, 원하는 것을 전달하고, 그들의 미국인 전우들에게 자신의 정보를 전달하고, 속 타는 상황을 피할 정도로 충분히 영어를 익혔다. 우리가 부산으로 크리스마스 직전에 도착했을때, 많은 한국인들은 고향을 방문할 수 있도록 통행증을 받았다. 내가 아는 한 탈영하기로 결심한 이를 잡아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음에도 탈영은 없었다. 우리들의 한국인들은 7사단의 일원으로서 무서울 정도로 충성심과 자긍심을 길렀고, 굉장히 멋진 어깨 패치를 착용한 상태였다.


이 시점에서 7사단은 8군에 소속되어 적들을 자신들이 온 곳으로 되돌려 보내는 길고 느리며, 힘든 과업을 부여받았다. 2월에 나는 보병대대를 지휘하게 되었고 원래 보충된 한국인들은 400명이였으나 이 시점에서는 141명만이 남아있음을 알아차렸다. 이송, 질병, 그리고 전투사상이 기타로 계산되었다.


전투 진지에서 대대를 순시하며 나는 통합된 한국인들의 활약을 매우 가까이에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행동들을 취하고 마치 텍사스나 메인에서 온 미군처럼 된 것을 보는 것은 간단하지만 매우 놀라운 일이였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여전히 약간의 언어문제를 겪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스타스 엔 스트라잎스(역주:미군 신문)를 읽을 수 없었고 유압식 자동변속기와 토크 컨버터식 자동변속기의 장점에 대해 토론할 순 없었으나 레이션 캔의 라벨을 읽을 수 있었고, 탄약통이 무슨 탄약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컵"이나 "벅"과 같은 별명을 얻었고, 그들의 분대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내가 부사관들과 소위,중위들에게 한국인들에 대해 묻자 그들은 "그들은 은행에 저금된 돈입니다", 혹은 "저는 한국인 둘이 든 BAR 팀을 가지고 있고 이들이 대대에서 최고입니다."라고 답했다.


우리의 한국인들은 곧 정찰병과 대사가 되었다. 그들은 종종 적들이 가까이 온 것을 아는 시민들과의 최고의 연락책이였다. 1951년 4월 대대가 대규모 빨갱이들의 공세를 정면으로 맞았을때 이 미국화된 한국인들은 그들의 개인호에서 최후까지 맞서 싸웠다, 이는 잘 알려진 사실이였고, 훈련된 한국인들이 위치를 사수하란 명령을 받았을 시, 그들은 명령이 아니고서는 위치를 떠나지 않았다. 이 기묘한 국가 전통의 혼합을 가진 이들은 그들이 화망에 노출되었을때 양측의 최고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였다.


교환 프로그램은 모두에게 환영받았으나 새로운 종류의 문제를 만들어냈다. 우리의 가장 노련하며 유능한 병사들이 떠날 자격이 가득한 이들이였다. 최고사령부는 내가 믿기론 아마 현명하게도, 경험이 풍부한 보충 병력이 모자람에도 병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한국인들은 실제로 "은행에 저금한 돈"이 되었다. 각 중대엔 노하우를 잘 아는 20명 정도의 병사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절대 바뀌지 않는 이들 이였다.


오직 역사만이 이 실험의 최종 결과를 말할 수 있겠으나, 나는 이 견고한 한국인들이 언젠간 한국에서 민주적인 정부를 발전시켜 나가는 진정한 리더들이 될 것이라 믿고 있다. 전쟁에서의 1년간 이 신병들은 자신들을 민주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배웠다, 최소한 그들은 어려운 일을 함께 마주하며, 극복해 나가는 미국 젊은이들의 전형적인 주고받는 인간 관계를 배웠다.


나는 노련한 한국인이 새로 도착한 미군 신병에게 "당신이 새로 온 신병이오? 걱정마라, 당신은 빨리 배울 것이다."라 말한 것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원문:https://www.usni.org/magazines/proceedings/1958/january/katusa-experiment-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