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영국의 마크4형 전차가 고베에 상륙한 이후, 일본은 연구 및 시범 운용을 위해 프랑스제 르노 전차 및 영국제 휘펫 전차 등을 도입하여 보병학교나 기병학교에 시범 운용을 실시했다.

 

 비록 1차 세계대전에는 본격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일본 또한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훈을 분석하면서 전차라는 신병기가 미래전에서 큰 역할을 할 것임은 부정하지 않았다. 1925년에 드디어 일본 최초의 전차부대인 "제1전차대"가 구루메 시에서 창설되었고, 동시에 육군 보병학교에도 교도 전차대가 창설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장비한 전차는 대부분 1차대전형 르노 FT-17 전차였고, 르노 전차는 훈련용이나 연구용에나 적합할 뿐, 결국 도태되어야 할 장비라는 판정을 받았고, 결국 작전용 전차를 새로 조달해야할 필요를 느꼈다.


 1924년, 이전부터 전차 연구에 관여해오던 '군용 자동차 조사위원회'는 조달할 전차의 요구성능을 결정했다. 이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견고한 야전 진지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할 전차는 평균 속력 10km/h, 중량 10~12톤, 그리고 37mm 보병포를 견딜만한 장갑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의 자동차 수는 5,700대, 그 중 군용 자동차는 300여 대에 불과한 실정이어서 이러한 전차를 일본 국내에서 제작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되었고, 결국 1925년 전차 구매단을 구미 열강에 파견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은 결국 외국에서 전차들을 조달하는 데 실패했다. 영국의 최신식 비커스 Mk.1 전차는 시속 32km/h의 속력을 지녀, 당시로서는 고속 전차였으므로 구매단이 가장 원하는 물건이었으나, 아직 영국군도 완전히 장비하지 못한 물건을 수출할 수는 없었고 대신 비커스 사로부터 경합에서 떨어진 시제 10톤 형 전차와 14톤 형 전차의 도면을 입수하였다.


 


(비커스 mk.1은 32km/h의 속도를 지녀, 당시로서는 고속 성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25km/h의 속도를 내는 것이 고작이면서도 장갑은 Mk.1과 같은 6.5mm에 불과했으며, 일본 구매단은 이들의 신뢰성을 의심했다.


 미국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구매단은 미국의 존 월터 크리스티가 고안한 차륜, 무한궤도 병용식의 수륙양용 고속전차에 대한 협상을 진행했으나 아직 전차가 미완성인 점, 크리스티 본인은 설계자일 뿐, 독자적인 공장을 보유하지 않아 공급 전망이 불확실하다는 점 때문에 이 역시 도면을 구입하는 것에서 그쳤다.


 프랑스는 아예 신규 전차 개발을 진행하고 있지 않았고, 그 대신 남아도는 르노 전차의 처분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시속 30키로 대 전차들이 출현하고 있는 상황에 8km/h에 불과한 속도를 위한 르노 전차의 추가적인 대량 도입은 어불성설 이었고, 결국 구매한 전차는 연구 및 교육용으로 구매한 르노 전차 13대에 불과했고, 작전용 전차는 독자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은 당시 독자적인 전차 독트린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대부분 영국과 프랑스 등의 전차 교리에 의존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전차를 주로 보병 지원 용도로 운용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J.F.C 풀러 등이 전차를 중심으로 한 전투를 주창했으나 이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독일에서도 전차를 중심으로 한 기동전 독트린이 연구되고 있었으나 독일은 전차를 운용한 경험이 거의 없고, 심지어 당시에는 전차 보유 자체가 금지당했으므로 탁상공론으로 치부되었다.


 아무튼 일본도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보병 지원용 전차를 만들고자 하였으며, 육군 기술본부는 이미 궤도식 견인차를 오사카 조병창과의 협력을 통해 제작하여 르노 전차보다 빠른 14km/h의 속력을 낸 바 있었기에 전차를 제작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판단되었다.


 기술본부 측은 일본산 전차의 성능이 1924년에 결정된 조달할 전차의 성능 기준에 만족해버린다면 기술의 발전에 따라 시장에 보다 고성능의 전차가 등장할 때 외국 전차에 의존해버릴 우려가 있다고 판단, 그보다 높은 성능을 제시했는데,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견고한 야전 진지에 대한 공격에 적합해야 하며, 야지 기동도 잘 수행해야 한다.


 2)적 진지 내에서 독립적으로 전투를 치를 수 있도록 화력을 전차가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던지 집중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57mm 포 1문을 포탑에, 기관총탑 하나는 전방에, 다른 기관총탑 하나는 후방에 설치하도록 한다.

 

 3) 장갑은 37mm 보병포의 고폭탄을 근거리에서 방어할 수 있도록 17mm로 설정한다.

 

 4) 당시 제식화된 4톤 자동화차(트럭)의 속도인 24km/h에 맞출 수 있도록 속도는 25km/h로 설정한다.

(중략)


 5) 이상의 조건을 갖출 수 있도록 중량은 16톤으로 설정한다.


이는 1924년에 설정한 요구 성능에서 기동성과 화력, 방어력 모두 상승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육군성이 시제 전차 개발을 허가하기는 했으나, 이는 한창 진행중인 육군개편계획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허가하는 것이었다.이로 인한 예산 문제로 시제 전차 프로젝트 기간은 1926년 6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로 설정되었고, 이 기간 안에 완성하지 못하면 예산을 반환해야 했다.


 당시 설계를 담당한 육군 기술본부 차량반은 16명에 불과했고, 제작을 담당한 오사카 조병창 또한 설비가 견인차량보다 대형인 전차를 제작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 이 문제는 결국 기차 회사, 제강소와 같은 민간 기업과의 협력으로 겨우 해결되었다.


 1927년 2월, 시제 전차(시제 1호 전차로 명명)가 완성되었고, 같은 해 6월에는 후지 산의 스소노(裾野) 훈련장에서 공개 시험을 거쳤다. 원래는 관계자들만으로 시험을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육군성과 참모본부, 보병학교 및 기병학교의 관심이 매우 높아 공개 시험으로 전환된 것이었다.


 해당 시험에서 시제 1호전차는 만족할 만한 성적을 거두었다. 당초 120마력으로 예정되었던 V형 8기통 엔진은 140마력의 출력을 내었고, 완충장치의 효과로 조작도 경쾌하면서 66%의 급경사도 순조롭게 극복할 수 있었다. 공개 시험은 호평으로 끝났다.



(시제 1호 전차)

 그러나 해당 시제 전차는 당초 계획했던 16톤의 중량에서 벗어난 18톤의 중량을 가지고 있었고, 이로 인해 최고 속도 또한 25km/h에서 20km/h로 감소했다. 때문에 요구 성능을 재검토하게 되었고, 1927년 12월에 연구 방침을 개정하여 1년 후 10톤 급의 경전차와 시제 1호전차를 기반으로 한 지원전차를 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10톤 급의 경전차가 후에 89식 전차, 시제 1호 전차를 기반으로 하는 지원전차는 95식 중전차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南井暉史. (2022). 日本陸軍の機械化を巡る摩擦と競合: 戦車開発の方針を中心に. Journal of law and political studies). Vol, 132(3), 95-135.


原乙未生,栄森伝治. (1961). 日本の戦車. 出版協同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