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3월, 내가 있던 29사단이 남방으로 보내졌기 때문에 나는 27사단으로 전속되어 수의사관으로 중국 전선에 종군했고, 이윽고 사단은 이치고 작전에 참가하였다.
작전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에는 초여름이 되었으나 초여름은 그야말로 이름뿐으로, 더위를 피할 곳 하나 없는 보리밭으로 가득한 평야에서 만난 무더위는 계속된 행군으로 지친 몸에 뜨거운 햇빛에 그대로 노출되게 하여 피곤함과 싸워가는 강행군을 하게 만들었다. 챵타이관(長台関) 부근에서는 일본과 같이 모내기를 하는 풍경의 한가한 전원지대를 만나게 되었으나, 그곳에서 그 5월 14일을 맞게 되었다.
숙영지에서 출발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은 1,2 시간 전에도 출발 준비가 명령되었으나 밤에 꽤 많은 강수량이 예상되어있었는지 대기 명령이 내려졌지만, 철회되고 출발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출발할 즈음에는 보슬비가 조금 내리는 정도였지만, 우리가 가는 쪽의 하늘에는 어두운 구름들이 잔뜩 깔려 있었으며, 이윽고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구나, 라고 생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이 무너지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스가와라 데이치로 菅原貞一郎 씨의 증언)
챵타이관에는 폭이 약 50미터 되는 하천이 있었는데, 철교가 적에게 파괴되었기 때문에 각 부대들은 다리 앞에 우두커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곧 수습할 수 없는 혼란이 벌어졌다.
그러다 겨우 도하 명령이 떨어져서 승마소대는 늘어난 물을 헤치고 강을 건너 좁은 논길을 따라 작은 부락으로 향했으나, 도중에 타고 있던 말이 발을 헛디뎌 바닥도 없는 늪에 빠진 것 마냥 빠져서 나오지 못했다.
(고바야시 센이치 小林詮一 씨의 증언)
밤이 깊어짐에 따라 기온도 내려갔고 훈도시까지 젖어버려 덜덜 떨어야 했다. 게다가 장화 안까지 빗물이 들어와 양말이 젖고 돌이 신발에 쓸려 상처를 내 걸을 때마다 고통을 참아야 했다. 비는 여전히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우리는 그저 빨리 해가 떠서 퉁퉁불은 익사체만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젖은 몸을 이끌고 전진해 나갔다. 밤새 한 숨도 쉬지 못한 채 강행한 야간 행군으로 모두 녹초가 되어 있는 모습은 흡사 살아있는 시체를 방불케 했다.
내 경우 행군은 승마 상태에서 실시했고, 거기에다 그 날 밤은 총도 지니지 않은 채 행군했지만, 그럼에도 아침을 맞았을 때 지옥에서 살아돌아왔다고 느꼈을 정도로 힘들었던 일이었다. 하물며 도보로 행군한 이들, 특히 보병 병사들의 상황을 상상해보라. 등에 탄약과 총을 매고 40kg 군장을 맨 채 행군하는 것 말이다.
피로와 졸음, 거기에다 도로 위에 물이 찬 상황은 아무리 건장한 병사라도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만들었고, 더군다나 이들은 며칠씩 행군을 지속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무거운 배낭 때문에 몸까지 수면 아래로 빨려들어가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스가와라 씨)
악몽같은 밤이 끝나고 아침이 밝아오자 연일 비와 싸우며 진흙탕을 걸어온 야간 강행군으로 체력이 떨어진 병사들은 포차에 기대다 의식을 잃거나 수레 위에서 잠을 자다 죽어갔고, 당시에 들려온 이야기에 따르면 그 수는 500명에 달했다고 한다.
(고바야시 씨)
물론 이와 같은 사고로는 핫코다산의 참사가 있겠으나, 챵타이관에서는 하룻밤 만에 166명이 죽어갔다. 이러한 조난사고는 왜 발생했는가? 후일 들었던 이야기에 따르면 각 연대장들이 강수량 때문에 14일 야간행군을 15일 낮 행군으로 바꿔달라고 사령부에 요청했으나, 참모장이 미군기의 공습을 우려한 나머지 이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또한 제국 육군에서는 병기가 사람의 목숨보다 우선되었고, 특히 국화 문장이 새겨진 보병총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떨어뜨리면 안 되었던 것이다. 손에서 놓게 된다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찾아와야 했던 것이다.
거기에다 일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여름과 겨울이 공존하는 듯한 기온의 급격한 변화에 집중호우, 장거리 행군으로 인한 체력 소모된 상태에서의 야간 행군이라는 악조건이 겹치고 겹쳐 다수의 조난자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던 것이다.
(스가와라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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