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옛날 고려 전성기에 동서 여진(女眞)의 무리와 글안(契丹)·발해(渤海)의 인민들이 계속 투항 귀순해 온 것은 모두가 위엄과 덕망(威德)의 소치였으며, 역대의 군왕도 그 성의를 권장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능히 양계(兩界)의 땅을 확장시키고 나아가서는 옛날 숙신(肅愼)의 봉강(封疆)까지 회복하였던 것입니다. 저 파저강 일대의 작은 종자들은 비록 중국의 작호(爵號)를 띠고 있으나... 사실상 중국에 매여 있는 사람에 불과하고, 글안(契丹)·발해(渤海)의 인민과 더불어 비할 바는 아닙니다."
『세종실록 73권, 세종 18년 윤6월 19일 계미 2번째기사』
"양성지가 이르기를... 신이 전조[前朝: 고려]를 보건대, 원(元)나라를 섬긴 뒤에도 살례탑(撒禮塔)·차라대(車羅大)·홍다구(洪茶丘)의 침략하는 군사가 없는 해가 없었사오니, 이것들은 예절과 신의로써 상대할 수 없는 것이옵니다... 모름지기 (고려처럼) 한번 대승(大勝)하여야 옳을 것이옵니다. 저들이 우리의 병력이 서로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연후에야 감히 가볍게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여 봉강(封疆)을 가히 지킬 수 있습니다. 전조[고려] 때에 요(遼)와 금(金)에게 한 것이 이것이옵니다."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1월 15일 신묘 1번째기사』
"(둘째에 이르기를) 전조[고려]에서는 42도부(都府)를 두고 정병(精兵) 12만 명을 양성했던 고로 능히 이웃 나라를 넘보게 되어, 비록 요(遼)와 금(金)이 서로 번갈아 중국에 들어가도 문정(門庭)에 근거(根據)되어 감히 범(犯)하지 못하였삽고...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백제(百濟)를 평정할 때도 정병 11만 명을 사용하였사오며, 정종(定宗) 때에 와서 거란(契丹)의 꾀를 듣고 30만 군졸을 가려 뽑아서 이름하기를 광군(光軍)이라 하였다가, 강조(康兆)가 거란을 막을 때에 30만 명으로 막았고, 강감찬(姜邯贊)이 거란을 패퇴(敗退)시킬 때에는 20만 명으로 물리쳤으며,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평정할 때에는 17만 명으로, 신축년(辛丑年)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할 때에는 20만 명을 사용하였사온데, 지금[조선]은 군사의 수효가 서울의 시위 군사(侍衛軍士)를 제외하면 군사가 겨우 10여 만이온데, 선군(船軍)이 일부분이고 시위 진군(侍衛鎭軍)과 수성군(守城軍)이 일부분이며... 선군(船軍)은 다른 일을 시킬 수 없으니 또한 쓸 수 없고... 우리 나라[조선]는 다만 시위 진군(侍衛鎭軍) 수만 기(數萬騎)만이 조발(調發)할 수 있는 군사입니다."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1월 15일 신묘 1번째기사』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만약 황제를 칭한 일(僭稱)이 있다면 전조[고려]의 태조(太祖)가 삼한(三韓)을 하나로 통일하고 연호를 고쳐서 황제의 시호인 종실(宗室)을 칭하였고, 금(金)나라 사람은 (고려의 군주를) 받들어 황제(皇帝)라 하였으며, 고황제(高皇帝)는 스스로 성교(聲敎)가 있다고 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참칭하는 데에 혐의가 되겠습니까? 소위 번국(蕃國)이라고 하는 것은 기내(畿內)의 제후(諸侯)와는 비교할 것이 못됩니다... 만약 (고려사에) 숨겨야 할 일이 있다면, 삭제하고서 행하면 가할 것입니다. 비단 지경 안에서만 행할 것이 아니라 《사략(史略)》과 같이 중국에 전하거나 일본에 전해도 또한 좋겠습니다.
『예종실록 6권, 예종 1년 6월 29일 신사 2번째기사』
"남원군(南原君) 양성지(梁誠之)가 상소하기를... 귀주(龜州) 동교(東郊)의 싸움에서는 거란(契丹)의 30만 군사가 한 사람도 살아 돌아간 것이 없었는데, 이것은 나라[고려]의 형세가 바야흐로 강하고 강감찬(姜邯贊)이 그 재주와 지혜를 펼 수 있었기 때문이며... 그렇다면 고금에 나라를 지키는 규모가 실로 오직 국세의 강하고 약한 것과 장수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데에 달려 있는 것이고, 한갓 성책(城柵)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종실록 84권, 성종 8년 9월 16일 경진 1번째기사』
"신공제가 아뢰기를, 국곡(國穀)의 숫자는 본감(本監) 【군자감(軍資監)임.】 에 15만 석, 분감(分監)에 28만 석, 강감(江監)에 30만 석으로 통틀어 70여 만 석입니다. 그렇지만 이 가운데 모손(耗損)된 것이 또한 많아서 숫자에는 들어 있으나 썩어서 쓸 수 없는 곡식이 3분의 1이나 되므로, 실제의 숫자를 계산해 보면 겨우 50여 만 석뿐입니다. 한 나라로서 50여 만 석의 곡식 저축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전조[고려] 때에도 과연 지금처럼 해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2천여 명의 군대로 휘몰아 쳐들어온다 해도 신의 생각에는 반드시 당해 낼 수 없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중종실록 67권, 중종 25년 1월 19일 경술 1번째기사』
"안현은 아뢰기를, "지금 니마차(尼亇車)가 많은 부락을 불러 모으고 부락 사람들 또한 그를 믿고 따르니, 그는 필시 호걸일 것입니다... 고려 때 윤관(尹灌)이... 여진(女眞)을 쳐 곧장 그 부락을 짓밟고 돌아왔기에 군사의 위엄이 멀리까지 떨쳤습니다. 때문에 아골타(阿骨打)가 고려의 침범을 감히 도모하지 못하고 드디어 중국으로 침입하였습니다. 만일 어진 장수를 얻어 맡긴다면, 비록 아골타 같은 자라 하더라도 오히려 변방을 침범하여 노략질할 수 없을 것인데, 시시한 오랑캐야 무어 걱정할 게 있겠습니까. 하였다."
『명종실록 10권, 명종 5년 2월 26일 신유 1번째기사』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조선]는 무략이 강하지 못하고, 조종조의 일로 말하여도 일찍이 한 번도 싸워서 승리한 적이 있지 않다. 우리 나라의 무략은 고려와 현격한 차이가 있다. 알 수 없거니와 문치(文治)의 소치로 그렇게 된 것인가. 문장(文章)으로 말하더라도 우리 나라 2백 년 이래 여대(麗代)의 문장에 미치지 못한다. 이것으로 보면 문장과 무략이 모두 고려 때만 못한 셈이다... 고려말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정세운(鄭世雲)은 20만의 군사로 천수문(天壽門) 밖에 결진하여 포휘하고 공격함으로써 끝내 대첩을 거두었다. 우리 나라에서야 어디에서 20만의 군사를 얻을 수 있겠는가... 헤아려 보건대 송(宋)나라 조정과 너무도 비슷하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첫번째 기사』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산에는 나무만 있고 물에는 돌만 있을 뿐이라서 중원(中原)에 비하면 1도(道)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원의 1도는 극히 부성(富盛)하여 우리 나라의 물력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 왜국 역시 우리 나라처럼 가난하지는 않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첫번째 기사』
"이지형이 상소하기를, 북로(北路)의 형세는 남방 열읍(列邑)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산으로 막히고 바닷가에 위치하여 마치 긴 뱀과 같은 모양으로 곧장 2천여 리에 뻗어 있습니다. 전조[고려] 때 윤관(尹瓘)이 수십만 군사를 일으켜 무수한 전투를 벌인 뒤에 겨우 옛 강토를 개척하고 경계를 정하여 푯말을 세웠는데, 북쪽은 선춘령(先春嶺)에 이르고 남쪽은 소하강(蘇下江)에 닿았습니다."
『효종실록 12권, 효종 5년 6월 4일 임술 3번째기사』
"이양이 상소하기를... 고려(高麗)의 군제(軍制)는 6위(六衛)와 8령(八領)으로 되어 있었는데, 1령이 각각 1천 인이니, 도하(서울)의 군대만 모두 합쳐 4만 8천 명 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조선]는 훈국(訓局)을 새로 설치한 뒤로 5영(五營)의 군대를 제외하면 곧 오합지졸(烏合之卒)이니, 이것으로 적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정조실록 12권, 정조 5년 11월 2일 경자 5번째기사』
"들은 것을 따로 적은 단자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그리고 더욱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수레 이용인데 우리 나라[조선] 영문(營門)에서 쓰고 있는 큰 수레는 애당초 중국 것을 본뜨지 않았기 때문에 소나 말의 힘은 곱 이상이 들면서도 쓰기에 아주 불편합니다. 혹자는, 우리 나라 지형이 수레를 이용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고려 현종(顯宗) 때 강조(康兆)는 검거(劒車)를 이용하여 거란을 격파했고, 선종(宣宗) 때 유홍(柳洪)은 병거(兵車)를 이용해 적과 싸워 이겼습니다."
『정조실록 53권, 정조 24년 3월 9일 신유 1번째기사』
"내가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을 보니, 군신 상하가 음란하고 방탕하고 요괴하고 허탄한 정상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었으므로, 그 풍속과 인재가 옛과 같지 않은 것을 의심했다... 그러나 이따금 호걸스럽고 재덕이 있고 기예가 있는 사람이 뛰어나서 일세의 영웅이 된 자가 많았으니, 고려조의 인재와 풍속을 가히 상상할 만하거늘, 역사를 만드는 자가 승국[勝國: 고려]을 헐뜯고 깎는 데에만 힘써서 그 사실이 묻히고 말았다."
『이덕형, 송도기이』
"생각해보면 고려에서 나라를 세운 이래 물력의 풍부함은 우리 조선이 거의 미치지 못할 바이다. 석물을 세운 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바다[고려]를 보고 나면 다른 물[조선]은 시시하게 보인다더니 정릉의 석물을 보고 나니 길가의 소소한 석물들을 마주칠 때마다 저게 무슨 애들 장난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유만주, 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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