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는 Case Red by Robert Forczyk
1940년 여름 프랑스가 겪은 충격적인 패배를 설명하려 한 기존의 시도들은 인과 관계 면에서 지나치게 일반화되어 복잡한 실제 전장 상황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프랑스의 패배가 군사적 무능력이나 도덕적 해이에 기인했다고 보며, 특히 재앙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되는 여섯가지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1. 만연한 평화주의와 패배주의로 인한 사기 저하
2. 특히 기동전과 전차 활용에 관한 잘못된 프랑스 군사 교리
3. 평시 예비군의 불충분한 훈련
4. 프랑스군의 공격 의지를 오염시키고 기갑사단을 발전시킬 자원을 소모해버린 마지노선의 악영향
5. 이미 여러 차례 실수를 저질렀고 또 역동적인 현대전장에 대응할 수 없음을 여실히 입증한 무기력한 고위 군사 지도부
6. 국가가 침략에 맞설 통합적 능력을 약화시킨 프랑스 내부의 화해 불가능한 정치적 분열과 부패
프랑스 3공화국의 군사적 패배에 대한 이 모든 전통적인 설명들은 물론 수긍할 부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평화주의와 패배주의적인 태도는 일부(특히 스당 전투에서) 프랑스 예비군들의 사기를 분명히 악화시켰지만, 이런 태도는 당시 프랑스 야전군의 40%를 구성하고 있던 정규군과 식민지군 대부분에서는 결코 분명하지 않았다.
북아프리카 2보병사단 예비역 장교 다니엘 바론 대위는 일기에서 일부 사단 참모 장교들을 가차없이 비판했지만 한편으로 병사들 사이의 사기는 양호하다고 기록했으며, 34세의 현역 장교 프랑수아 위 대위는 프랑스가 여전히 용감무쌍한 군인을 배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위 대위는 1940년 전역에서 기병대 지휘관으로써 여러 차례 두각을 나타냈고 이후 레지스탕스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또 다른 기병이자 식민지군 베테랑인 로베르 뇌체즈 소령 또한 당시 프랑스 정규군 중하급 지휘관들이 모든 면에서 진정한 전사였다는 추가적인 증거가 된다.
1940년 당시 프랑스군은 세 종류로 구분된(현역, A급 예비역, B급 예비역) 다양한 수준의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는 독일 육군이 사용하는 분류(현역, 예비역, 지방군Landwehr)와 정확히 동일한 체계였다.
또 40,000명이 넘는 아프리카계 병사들이 1940년 전역에서 싸웠는데 독일군 기록조차도 세네갈 저격병(tirailleurs)들과 다른 식민지 병사들의 용맹함을 인정했다.
물론 55e 보병사단과 71e 보병사단과 같은 B급 예비역 부대들은 스당 전투에서 그랬던 것처럼 급속도로 붕괴하는 경향이 존재했다. 하지만 14e 보병사단 같은 현역 사단들은 많은 경우 무시되곤 하지만 레텔(Rethel) 교두보 방어전과 같은 여러 전투에 맹렬하게 임했다.
하지만 1940년 프랑스군이 내부에서부터 무너졌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싶었던 많은 저작물들이 프랑스군의 분전 사례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누락했고, 이러한 종류의 서술들이 대중에 퍼지며 결국 1940년 프랑스의 비겁함, 무능력, 투지 결여에 대한 인식이 고착되었다.
그러나 당시 스당에 있었던 두 3류 사단의 사례만으로 230만에 달했던 프랑스 야전군 전체를 대표할 수 있다는 주장은 불공정한 것을 넘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또 많은 증거들은 1940년 프랑스 해군과 프랑스 전투기 조종사들의 사기와 투지 또한 양호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모든 근거들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 평화주의나 패배주의가 프랑스군 내부에서 절대 지배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가 평화주의에 젖어있었다는 여러 서술들은 1925~33년 모로코와 시리아에서 프랑스군이 보여준 대게릴라 작전에서의 잔혹함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이들 식민지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본토 프랑스군 부대를 포함한 100,000명의 군대가 투입되었고, 이들은 6개월 만에 3,700명의 사망 및 실종을 포함한 11,000명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다.
이러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 프랑스 3공화국은 군사적 성공의 대가로 손실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또한 1940년 프랑스군이 겪은 패배의 핵심 요인으로 사기를 강조하는 설명은 한 군대의 사기와 군율을 측정하는 객관적 수단으로 탈영, 자살, 군사재판과 관련된 통계를 조사하는 방법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통계적 증거보다는 일화적인 사례 관찰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다.
가짜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군에서는 질병과 사고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원인으로 총 12,62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이중 자살과 처형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독일군의 경우 구체적인 수치가 존재하는데, 이들은 가짜 전쟁 기간 약 10,000여명의 비전투 사망자가 발생했다. 1939년 9월과 1940년 4월 사이 모두 777명의 병사들이 자살했으며 600명이 넘는 수가 탈영해 군사재판에 넘겨져 300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패배주의와 평화주의로 인한 사기 차이가 승패를 갈랐다고 보기에는 두 군대 사이의 연관 수치가 생각보다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1940년 프랑스군의 나쁜 사기가 패배를 불러왔다는 논리는 당시 상대편의 사기에 대한 숨겨진 진실 또한 간편하게 무시해버린다.
하지만 당시 독일 육군 고위 지휘관들은 1938년 블롬베르크 프리치 사건 이후 히틀러에 대한 은밀한 저항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고 또 황색 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거의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 준비 또한 적극적으로 방해했다.
칼 하인츠 프리저에 의하면 대부분의 독일군 고위 장교들은 히틀러가 1939년 안에 프랑스를 공격하겠다 발표했을 때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이를 격렬히 반대했다.
총사령관 브라우히치, 참모총장 할더를 포함한 육군 최고위 지휘관들까지 반정부 음모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히틀러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가짜 전쟁 기간 C집단군 사령관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장군과 1군 지휘관 에르빈 폰 비츨레벤 또한 반히틀러 음모를 알고 있었다. 이들은 황색 작전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는 히틀러를 제거하기 위한 군사 쿠데타를 적극적으로 논의하기까지 했다.
국방군 내 주요 반히틀러 공모자 중 한 명인 한스 오스터 대령은 1939년~40년 겨울 황색 작전에 대한 세부 작전 정보를 베를린 주재 네덜란드 무관에게 제공하기도 했다.
물론 1940년 프랑스군 일부에서 사기는 확실히 골칫거리였지만, 동시에 독일군의 사기 또한 멀쩡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 모든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 내 누군가가 레노를 전복시키고 가믈랭을 암살할 음모를 꾸미거나 적국에 비밀 계획 문서를 제공한 사례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사기는 1940년 프랑스군만 가지고 있던 문제가 아니었다. 대치하고 있었던 양군 모두가 사기 문제를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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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머전 정보글 대회라는걸 이제 알아서 늦게나마 급속번역. 이후 내용도 있는데 대회 끝나기 전까지 다될지 안될지 몰라서 번호는 안붙였음
스톤에서는 진짜 처절하게 싸우더라 - dc 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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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나오는데 거기까지 기간안에 될지 모르겠다
ㅠㅜ
얘들 적색작전 막아낼때 투지 엄청 높았음
근데 엘랑 사기와 별개로 낫질 작전으로 40만 증발, 파리 함락, 솜-앤강 방어선 돌파, 샌강 방어선 돌파, 마지노 요새 주둔 병력 포위섬멸, 서부군 포위섬멸 이 모든 게 '6주'안에 일어난 일인게 참...
이후 내용도 존나 궁금하니까 빨리 번역좀
그런데 현장의 병사들이 사기충천 했던 것과는 별개로 지휘부가 간첩급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서...
호호호호
진짜로 한심했던건 아니기 때문에 엘랑스가 더 이슈가 되는거지 ㅋㅋ... "그래서 얘네 대체 뭐땜에 이렇게 처발렸냐?"
ㄹㅇ - dc App
1머전급 피해를 또 감당했으면 프랑스미래는 없으니 대충조약맺고 빠지는게 답일수도있겠다싶지
뻔한 소리지만 양이 이끄는 늑대 vs 늑대가 이끄는 양
열심히 싸웠는데 독일군이 좀 더 잘 싸웠을 뿐
사실 이탈리아 절망편급으로 드골같은 이레귤러빼고 거즘 어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