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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랑"의 신화와 진실 - 모랄빵의 프랑스군?출처는 Case Red by Robert Forczyk1940년 여름 프랑스가 겪은 충격적인 패배를 설명하려 한 기존의 시도들은 인과 관계 면에서 지나치게 일반화되어 복잡한 실제 전장 상황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하고 있gall.dcinside.com





출처는 이전과 같음.


1940년 프랑스의 패배를 그 군사 교리의 결함과 연관짓는 주장은 1940년 프랑스 육군의 체계전투(bataille conduit) 교리가 1918년 8월 아미엥 전투에서 얻은 전술적 교훈을 전간기 더욱 발달한 전차와 항공기를 포함시켜 단순히 약간 개선, 수정한 결과일 뿐이라는 설명과 함께한다.


이들에 의하면 체계전투는 기동보다 화력을 강조했고 최고 사령부가 세밀히 통제하는 포병대를 비롯한 핵심 자산들을 활용해 엄격하고 통제된 전투를 추구했다.


또한 교리는 1914년 8월 프랑스 군대에 막대한 피해를 초래한 조우전과 같은 성격의 전투를 피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결과적으로 느리고 불균형했던 프랑스군의 교리는 1940년의 전쟁에 적합하지 않았고, 독일군의 ‘기동전(Bewegungskrieg)’을 막을 수 없었다. 한 학자는 ‘독일군의 신속한 대열이 굼뜬 프랑스군 부대를 산산조각냈다’는 신랄한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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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잘못된 교리가 프랑스의 패배를 초래했다는 이러한 분석은 거의 곧바로 여러 방면, 단계에서 모순에 봉착한다.


우선 체계전투 교리는 1918년 있었던 성공적인 공세 작전을 그 기반으로 삼고 있었지만, 1940년 프랑스군은 방어 전략을 채택했다.


프랑스군은 1940년 2개 사단을 동원한 국지적 반격 이상의 공세 작전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체계전투 교리는 사실상 적용, 실행된 적이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둘째, 프랑스군이 정말 긴밀하게 중앙집중화된 전투를 벌이고자 했다면 그들은 1930년대 전간기 기간 동안 현대식 통신 장비에 대한 막대한 투자를 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투자는 결코 이뤄지지 않았다.


1929~39년 사이 프랑스 육군이 통신장비 구입에 사용한 예산은 전체 예산의 불과 0.15%에 불과했다.


뱅센에 위치한 프랑스 최고사령관 모리스 가믈랭 장군의 사령부에는 무전기나 전신기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토바이 전령에 모든 지시를 의존했기 때문에 작전에 대한 엄격한 통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알폰스 조르주와 같은 다른 프랑스 지휘관들의 경우 무전기와 전신기 자체는 보유했지만 1940년 프랑스군이 시행하고 있었던 명령 및 통제(C2) 방법은 여러 면에서 중앙집중식 전투에 적합하지 않았다.


셋째, 교리 이론은 급격하게 기동하는 독일군 기갑사단에 대처하지 못하는 프랑스 사단들의 추태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지만, 이러한 주장은 황색 작전에 참가한 독일군 사단의 90%가 기동성 면에서 프랑스 사단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프랑스군과 마찬가지로 국방군 지상병력 대부분은 여전히 도보로 행군하는 보병과 말이 끄는 포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학자는 ‘1940년 독일 국방군 병력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반 보병사단과 마주한 연합군 병사들은 거의 모든 경우 자리를 지켰다’라고 올바르게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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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러한 주장은 프랑스 육군이 적절한 대전차포와 대전차지뢰를 설계하고 시험하고 전쟁 전 훈련에서 그 방어적 가치를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최전선 전투부대에 제때 적절한 수량을 배치하는 데 실패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실제로 프랑스 장교들은 전쟁 전 연습 훈련에서 대전차포와 지뢰로 구성된 종심 방어로 기갑 공격을 방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음에도 이러한 무기들을 실제 충분한 수량만큼 배치하는데 기이할 정도로 여유로웠다.


심지어 프랑스 장교들은 천연 장애물을 통해 지지되는 연속적인 대전차 포격 화망을 통해 전차들을 유도하고, 지연시키고, 결국 저지하는 개념 또한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군이 화력을 중시했다는 교리 이론의 주장과는 달리 프랑스 보병부대는 독일군 보병부대보다 현저히 낮은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독일 보병사단이 72문의 야포를 보유하고 있던 것에 반해 프랑스 보병사단의 그것은 고작 60문 뿐이었으며 야포의 구경 또한 독일군의 105mm에 미치지 못하는 75mm였다. 결과적으로 프랑스 보병사단의 포병화력은 상대 보병사단 화력의 63% 수준에 불과했다.


연대 수준 지원 화력은 훨씬 심각해서 프랑스 보병연대의 박격포 보유량은 15문인 반면 독일 연대의 보유량은 무려 45문에 달했다. 프랑스 보병연대는 독일 보병연대와는 달리 근접화력지원을 위한 보병포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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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 지향적인 프랑스 교리에 대한 해당 주장을 감안할 때 마찬가지로 기묘한 것은 프랑스 육군이 적절한 수준의 대공무기를 개발하고 배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가믈랭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대공방어 및 훈련의 중요성을 반복적으로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육군은 이를 실천하는 데 실패했다. 또한 체계전투 교리에 대한 비판은 프랑스 공군이 육군에 적절한 수준의 공중 엄호를 제공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잘못된 교리가 1940년 프랑스의 모든 패배를 불러왔다는 주장은 프랑스군이 왜 그토록 빨리 무너졌는지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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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징병 복무기간을 12개월로 단축하고 1930년대 대부분의 기간 예비군 훈련에 시간과 자원을 투입하기 거부한 프랑스의 결정 또한 심심찮게 심판대에 오르곤 한다.


한 학자는 실제로 1919년부터 1933년까지 예비군 훈련은 전혀 실행되지 않았으며 1934년 훈련이 마침내 재개되었을 때 예비대는 그리 만족스러운 성과를 이루어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훈련의 부적절성에 대한 논의 이면에 묻혀있는 중요한 요점 중 하나는 프랑스 육군이 그 자원과 시간을 부사관과 예비역 초급장교 육성에 대신 투자했다는 사실이다.


훈련이 부족한 병사는 물론 군대의 골칫거리지만, 훈련이 부족한 부사관과 소대장은 한 군대의 기반 자체를 붕괴하게 만든다.


그러나 예비군 훈련의 부족이 1940년 전역의 결과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는 불분명하다. 물론 스당의 두 B급 예비사단의 행태와 관련이 있었지만, 전문 군인의 수가 더 많았던 타 부대에도 과연 비슷한 영향을 끼쳤을지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프랑스군에게 예비군 훈련 부족을 시정할 8개월의 시간(1939년 9월의 동원과 1940년 5월 독일군 공세 개시까지의)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막간을 활용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결국 예비군 훈련 부족에 대한 책임의 일부를 전쟁전 정치인들로부터 일선 군사 감독관, 특히 사단 이하 지휘관들에게 전가하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1930년대 중반 예비군 훈련 부족에 대한 논쟁은 본질적으로 1940년의 여러 실패와 명확한 연관성을 확립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