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을 보시지 않았다면, 먼저 보시고 나서 이 글을 보시는게 이해가 쉽고 더 재미있습니다.

이전 연재글에서는 중세 일본의 봉건적 질서와 자력구제의 사회 속에서 공권력의 부재로 인해서 신의 뜻을 묻는 신명재판이 분쟁을 중재하고 판결을 내리는 수단으로서 활용되는 과정들을 소개했습니다.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 600여년의 시간 동안 일본에서는 율령제 해체 이후 봉건적 질서 하에서 자력구제 사회가 형성됩니다.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무기를 들고 실력행사를 서슴치 않게 되고 단순히 무사와 무사간이 아니라 촌락과 촌락간에도 유혈투쟁이 빈번한 시대였습니다.


만약 중세 일본에서 지방 곳곳까지 공권력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면, 이러한 사적인 무력투쟁(私戦)을 제어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성공시키지 못했습니다.


근성으로 똘똘 뭉친 한 남자가 이러한 사회구조를 바꿔보려는 시도를 하죠.




고다이고 천황, 율령제의 부활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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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성가이 고다이고 천황, 막부타도에 성공하지만 새로운 막부에게 패배한다.----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기 위해 거병한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은 반복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와 행운 덕분에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킵니다.


그 후 1333년 율령제의 부활을 선언하고 연호를 겐무(建武)로 하면서 천황에 의한 친정체제를 선언합니다. 겐무 신정(建武の新政)이라 불리는 2년 반의 짧은 시도였죠.


고다이고 천황은 기존의 봉건적 질서를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체제로 교체하려 시도합니다. 기존 봉건제에 의한 복잡하고 간접적인 지방통치를 중앙집권적인 통치로 개혁하려고 시도하죠.


과거 율령제 해체 이후 국가소유지인 공령(公領)은 명목상 국가소유지라고 부를 뿐이고 지방관인 고쿠시(国司)는 단순히 조세를 수취하는 과정에서 수익을 얻는 수단에 불과하게 되어 가문이 대를 이어 세습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실상 장원영주가 지배하는 장원(荘園)하고 점점 다르지 않아져 버립니다.


고다이고 천황은 기존에 공가귀족 가문에게 세습되던 고쿠시(国司)를 회수해서 직접 임명하고자 시도합니다.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조정이 지방 통치를 강화하는거죠. 또한 주요 지방에 자신의 아들들을 파견해 쇼군으로 삼고 지방통치를 강화하려고 했습니다.


이제 지방관인 고쿠시(国司)를 특정 공가귀족이 세습하는게 아니라 천황에 의해 공가귀족들이 임명됩니다. 이전의 고쿠시가 조세를 수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이제 고쿠시는 해당 지역의 재지무사들에 대한 지휘 명령권, 영지 및 재산분쟁에서의 처분 권한을 가집니다.

무가정권에서 지역의 치안 및 군사권한을 가졌던 슈고(守護)는 범법자의 체포나 영지, 재산의 몰수를 담당할 뿐 사실상 고쿠시에 의해 통제되게 됩니다. 가마쿠라 막부 토벌의 핵심 공신인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나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고쿠시는 공가귀족이 임명되었습니다. 반면 슈고는 주로 무사들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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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공가귀족으로부터 유래한 일본의 공놀이 게마리(蹴鞠), 같은 지배층이지만 공가와 무사는 복식, 문화등 여러면에서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이 놀이를 하는 무사는 백안시 당하는 경향이 중세 일본에 있었던것 같다.----


즉 지방통치에 있어서 공가귀족에 의해 무사들이 다시 지배당하는 시대가 시작됩니다. 고쿠시는 재지무사로서 지방의 유력자들인 지토(地頭)나 고케닌(御家人)들에 대한 지휘권 역시 슈고에게서 가져오게 됩니다.


중앙집권의 역사에 익숙한 우리 입장에서는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중앙조정이 지방관을 임명하고, 지방관에 의해 행정, 사법권한이 행사되는건 당연하잖아요?


고다이고 천황의 이러한 정책은 수백년간 점진적으로 형성된 봉건적 지배질서를 변화시키려는 시도였습니다. 문제는 이 지배질서의 기반을 구성하는 재지무사들이 천황의 권위에 따라 공가귀족에 의한 지배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였죠.


나라~헤이안 시대에 장원(荘園)이 발달해 온 이유 자체가 공가귀족인 고쿠시(国司)의 개입과 조세수취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앙과 연줄을 만들려 한 재지유력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걸 고려하면 고다이고 천황의 개혁은 재지무사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1185년 무가정권을 성립시켜 무사들의 시대를 열어 무사들을 귀족들의 지배에서 해방시켰다는 이미지라면, 고다이고 천황은 다시 무사들, 슈고, 지토, 고케닌들을 중앙의 공가귀족의 지배하에 넣고자 하는 것으로 당시엔 느껴졌겠죠.


무사들이 이를 납득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이 연재글로 설명하고자 하는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일본의 율령제 해체 이후 중앙의 공가귀족과 지방의 재지무사들은 점점 더 다른 집단을 형성합니다. 물론 중앙에서 활동하는 무사들도 존재했습니다. 일명 무가의 동량(武家の棟梁)이라고 불렸던 무가귀족들이 존재했었죠.


무가정권이 이런 무가귀족, 대표적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의해 성립된 것은 중앙조정을 구성하는 공가귀족들과 재지무사가 점차 서로 이질적인 집단으로 분화되어간 것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가귀족들은 재지무사의 지지를 기반으로 무가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죠. 공가귀족에 비해 그들은 재지무사들과 좀 더 동질적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중앙과 지방간의 지배계층이 이질적이 되고, 인적교류가 적어질수록 중앙의 지배를 지방이 받아들이고 납득하는건 어려워집니다. 중앙의 지배층과 재지유력자가 체제를 유지함으로서 공유하는 가치나 이익이 모호해지죠.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이 주목해 주시길 기대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중세 일본과 중세 한국의 중요한 차이점이거든요. 이익을 공유하는 전국가적 지배연합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 여부가 두 나라의 역사적 분기를 갈랐기 때문입니다.


재지무사들은 고다이고천황의 개혁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대체제로 그 시대의 새로운 무가의 동량(武家の棟梁)을 선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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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막부의 1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같은 무가귀족 겐지(源氏)의 혈통을 이은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는 고다이고천황이 가마쿠라막부를 쓰러뜨리는데 있어서 막부를 결정적인 순간 배신, 승기를 거머쥐게 하는데 공헌한 1등공신입니다.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이번에는 천황의 겐무신정 체제에 도전합니다.


그는 고다이고 천황을 지지하는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같은 무사나, 기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顕家)같은 공가귀족 출신 무장에게 패배하여 규슈로 도주하기도 했습니다만 재지무사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복귀해 무로마치 막부를 성립하죠. 천황과 공가가 아닌 무가정권이 다시 복구된 것입니다.


율령제의 부활이라는 고다이고천황의 시도는 중세 일본의 자력구제 사회를 타파할 적합한 대안이 될 수 없었죠. 자력구제를 타파할 씨앗은 중앙세력이 아닌 지방에서 생겨납니다.



무로마치 막부, 슈고(守護)의 권한을 강화하다.


가마쿠라 막부에서 일종의 지방 무관직인 슈고(守護)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요리토모공이 정한 이래 슈고(守護)의 임무는 자신의 담당 지역의 고케닌을 지휘해 교대로 교토를 경비하는 것(大番催促)과 모반인(謀反人)과 살인범(殺人犯)을 체포하는 것이다. 또한 도둑(夜討ち), 강도(強盗), 산적(山賊)、해적(海賊)의 단속을 담당한다.

슈고 중에 대관(代官)을 마을에 보내 마을사람들을 함부로 부리거나 세금을 갈취하는 자들이나, 고쿠시(国司)도 아닌데 지방을 지배하려 하고, 지토(地頭)가 아닌데 세금을 받는 이가 있는데 이 모두는 불법행위이며 금지한다. (생략)

어성패식목 제 3조, 슈고(守護)의 임무에 대해


슈고는 해당 지역인 쿠니(国)의 치안을 담당하지만 기존 연재글에서 소개했던 것과 같이 장원영주의 장원(荘園)이나 고쿠시가 담당하는 고쿠가(国衙, 공령의 지방관청), 신사(神社)나 사찰(寺)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개입하지 않습니다. 일종의 치외법권인 수호불입(守護不入)의 권한이라고 하죠.


슈고가 각 지역에 임명되어 재지무사 중 막부와 주종관계를 맺은 고케닌(御家人)을 지휘통솔하기는 하지만 그 권한은 제한적이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 시기 지방통지의 중핵은 교토의 로쿠하라단다이(六波羅探題)나 규슈의 진제이단다이(鎮西探題)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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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4년경 호죠 일족이 슈고직을 차지한 지역이 노란색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다만 슈고 자체는 무사들의 지휘권을 가진다는 면에서 중요하므로 가마쿠라 막부의 호죠가문은 이를 점차 자기 일족으로 채워나갑니다. 초기에는 유력한 고케닌들이 임명되었던 슈고는 1333년이 되면 호죠씨가 38개 쿠니를 독점하고, 다른 가문은 15개 쿠니를 점유합니다.


이런 면에서 가마쿠라 막부는 지방통치력이 제한적이긴 했지만 무로마치 막부에 비해 중앙집권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호죠씨는 지방통치의 핵심인 단다이(探題)와 슈고(守護) 직위를 독점하고 있는데다가, 슈고의 권한이 제한되어 있어서 막부의 영향력이 재지사회에 보다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반면 무로마치 막부는 입장이 좀 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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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조시대의 세력분포, 붉은색이 남조측 세력이고 푸른색이 북조측 세력입니다.--


고다이고 천황에게 맞서 거병한 아시가카 다카우지는 1336년 고묘천황(光明天皇)을 새로운 천황으로 세우고 무로마치 막부를 만듭니다. 근성가이 고다이고천황은 포기하지 않고 탈출해 남조를 수립하여 1336년~1392년간 일본은 둘로 쪼개져 60년간의 전쟁이 이어지는 남북조시대가 시작됩니다.


무로마치 막부는 남조와의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슈고(守護)의 권한을 확대합니다. 1346년 무로마치 막부는 슈고(守護)가 단순히 군사 및 치안을 담당하는데 그치지 않고 카리타로우제키(刈田狼藉), 즉 소령분쟁에서의 실력행사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고 사절을 파견하여 판결을 집행할 수 있는 사절준행(使節遵行)의 권리를 부여합니다.


또한 1352년에는 전시에 해당 쿠니(国)에 있는 장원(荘園)과 공령(国衙領)에서 수취되는 조세(年貢)의 절반을 군량미 용도로 수취할 수 있는 반제(半済) 권한을 부여하죠. 이후 이는 단순히 조세수취가 아니라 아예 장원의 토지를 분할하여 영속적으로 장원영주와 슈고가 나눠가지도록 하는데까지 이릅니다.


남북조시대의 전란은 슈고(守護)의 권한을 확대시켰고, 가마쿠라 막부에 비해 무로마치막부는 슈고(守護)들에 의한 연합정권의 성격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권한 강화를 기반으로 슈고(守護)는 해당 지역에서 중앙의 공가귀족이나 사찰등 장원영주나 고쿠시가 가진 장원과 공령의 지배권을 침탈하게 되고, 이 지배권을 대행하는 재지무사들을 자신의 피관(被官), 일종의 주종관계로 끌어들이게 됩니다.


가마쿠라시대의 슈고가 재지무사 중 막부와 주종관계를 맺은 고케닌을 제한적으로 지휘통솔하는 존재였다면 무로마치시대에 들어서 슈고는 해당 지역의 지배자라고 불릴 만큼 성장합니다.


슈고 다이묘(守護大名)는 이렇게 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지방에 대한 지배질서는 일원화되지 못하고 중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슈고는 지역의 확고한 지배자라기 보다는 막부도 대표되는 중앙과 지역사회를 매개하는 존재에 머물러 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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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0년대 기준 무로마치 막부의 슈고 분포, 붉은색이 아시카가 일족이 슈고직을 세습한 지역----


무로마치 막부는 쇼군의 일족인 아시카가 일족들에게 막부의 중심지인 기나이와 가마쿠라를 중심으로 슈고로 임명해 세습시켜 막부의 세력기반을 형성했습니다. 하지만 위의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일족이 아닌 해당 지역의 유력자들도 슈고직을 차지하고 있었고 무시못할 실력을 가지고 있었죠.


오우치씨(大內氏)나, 쇼니(少弐氏), 오토모씨(大友氏), 시마즈씨(島津氏), 다케다씨(武田氏)같은 유명한 무사 가문들이나 기타바타케씨(北畠氏) 같은 공가귀족으로 남조에서 고쿠시(国司)를 담당했던 가문도 재지사회에서의 실력 덕분에 슈고로 임명되어 세습이 이루어집니다.


막부는 슈고의 권한을 필요에 따라 확대하긴 했지만 동시에 견제하기도 했습니다. 슈고가 지토(地頭)나 고케닌(御家人)과 같은 재지무사들의 영지를 침해하거나 사절권을 함부로 사용하거나 막무가내로 세금을 부과하면 슈고직을 빼앗겠다고 말이죠.


또한 무로마치 막부는 기존의 수호불입(守護不入), 슈고가 해당 지역에서의 사법, 치안권 행사에 있어서 개입하지 못하는 치외법권제도를 유지했습니다.


막부는 슈고를 통하지 않고 직접 재지무사들과 주종관계를 맺고 이들에게 수호불입(守護不入)의 권한을 부여하여 일정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함으로서 지역사회에서 슈고의 지배권 확대를 견제할 수 있었습니다.


막부가 슈고를 견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양자는 협력관계였습니다. 막부는 슈고를 통해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고, 슈고 역시 막부를 통해 지역사회에서 권위를 획득하고 치안권과 재판권 행사의 정당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막부의 권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권위가 있었을 때 슈고들은 해당 지역에서 계속 머무르는게 아니라 교토에 출사하는 재경(在京), 또는 막부의 관동통치거점인 가마쿠라에 출사하는 재창(在倉)이 이루어집니다. 이 시기의 슈고는 중앙에 주기적으로 머무르면서 중앙정치에 참여하는 등 중앙과의 연계가 매우 중요했죠. 그들의 권위는 중앙으로부터 나오니까요.


이러한 특징들은 무로마치 막부 시기의 슈고다이묘가 자기 지역에 일원적인 지배질서를 형성하는 것을 제한했습니다. 이 시기까지 슈고다이묘들은 지역에서 자력구제를 타파할 만한 공권력을 만들어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슈고의 권한확대와 이를 기반으로 슈고다이묘가 지역의 재지무사들을 적극적으로 가신으로 만들고 지역에서 자신의 직할지인 슈고령(守護領)을 확대해 나가는 과정은 점차 중세 일본의 중층적이고 복잡한 지역지배질서를 타파할 씨앗을 만들어나갑니다.


이 씨앗을 싹틔울 환경이 필요했을 뿐이죠. 바로 센고쿠시대(戦国時代) 말입니다.




센고쿠시대, 지방에 독자적인 국가(領国)가 출현한다.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가 늦둥이로 아들을 얻게 되기 전에 후계자로 지정한 동생 아시카가 요시미(足利義視)와 늦둥이 아들 아시카가 요시히사(足利義尙) 중 누가 후계자가 될 것이냐로 막부와 막부체제를 떠받치는 슈고들 사이에 갈등이 형성됩니다.


이 갈등은 유력한 아시카가 일족이자 슈고직을 세습해온 하타케야마씨(畠山氏)의 후계분쟁에 의해서 폭발, 1467년에 막부와 슈고들이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는 오닌의 난(應仁の亂)이 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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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닌의 난을 묘사한 그림, 1524년작 真如堂縁起絵巻-----


이후 전란은 1477년까지 계속되며, 무로마치 막부는 이 과정에서 그 실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권위를 상실합니다. 막부는 이제 슈고를 견제하거나 또는 슈고가 재지사회를 지배할 정당성을 담보하는 역할을 수행할 영향력을 상실합니다. 전국시대가 개막하는 겁니다.


중세 일본의 중층적이고 복잡한 지배질서를 형성하게 만든 어정쩡한 중앙권력이 무너지면서 재지사회에서는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지배질서가 필요해집니다. 기존의 불완전한 지배질서를 형성했던 슈고다이묘들 역시 여기에 적응할 수 있느냐의 시련에 봉착합니다.


일부 슈고다이묘들은 여기에 비교적 잘 적응했습니다.


오우치씨(大內氏), 오토모씨(大友氏), 시마즈씨(島津氏), 다케다씨(武田氏), 이마가와씨(今川氏)등 아주 슈고직을 세습하면서 재지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형성한 명문가문들은 지역의 재지무사들인 고쿠진(国人)들을 가신으로 흡수하면서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로의 전환에 성공합니다.


그렇지 못한 슈고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을 일명 하극상(下克上)의 대상이 되어 몰락하죠.


무로마치 시기 슈고의 권한 확대는 재지사회에서 슈고의 영향력을 확대시키지만, 사실 중앙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은 슈고는 재지유력자를 가신으로 삼아 슈고다이(守護代)로 임명해 실무를 대행시키곤 했습니다.


당연히 슈고다이는 재지사회에서 아주 빠르게 영향력을 증가시키겠죠?

무로마치 막부 시기 슈고다이로 슈고를 주군으로 보좌했던 많은 가문들이 전국시대의 혼란기에 주군인 슈고 가문에게 하극상을 일으키거나 세력을 강화해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로 성장합니다. 센고쿠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누대의 명문들은 더 이상 그들의 권위를 보장하는 중앙권력이 없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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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의 초상화, 오다씨는 딱히 명문가문은 아니었다.-----


슈고다이(守護代) 출신으로 주군인 슈고 가문을 제치고 센고쿠다이묘가 된 대표적인 가문이 바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秀)이 속한 오다 가문(織田氏)입니다.


막부의 아시카가 가문의 일족이자 관령(管領)직위를 교대로 역임한 그야말로 명문인 시바 가문(斯波氏)은 에치젠(越前), 오와리(尾張) 도토미(遠江)의 슈고를 세습해왔지만 전국시대의 난세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에치젠은 슈고다이인 아사쿠라씨(朝倉氏)에게, 도토미는 슈고다이묘에서 센고쿠 다이묘로의 전환에 성공한 명문 이마가와씨(今川氏)에게 빼앗기죠. 13대 당주 시바 요시타츠(斯波義達)는 도토미를 공략하려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오와리 슈고다이 오다 타츠사다(織田達定)가 반기를 들자 이를 제압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이후 이마가와 가문에게 포로가 되어 권위가 떨어지고 그 아들 시바 요시무네(斯波義統)는 오다 노부나가의 경쟁자인 오다 노부토모에게 살해당하고, 손자 시바 요시가네(斯波義銀)는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추방당해 오와리 슈고를 역임한 명가 시바씨의 오와리 지배는 끝장나고, 슈고다이였던 오다 가문이 오와리를 장악합니다.


아사쿠라씨(朝倉氏), 나가오씨(長尾氏), 아마고씨(尼子氏)등 슈고다이들의 센고쿠다이묘로의 전환은 중앙권력과 지방사회를 이어주면서 막부와 상생관계였던 슈고 가문들의 몰락을 상징합니다.


슈고(守護)나 슈고다이(守護代)와 같이 막부의 권위에 기반해 누대에 걸쳐 나름의 정당성을 축적한 이들만 센고쿠 다이묘가 된건 아닙니다.


그러한 혈통과 과거의 권위 없이 순수하게 실력과 행운을 기반으로 센고쿠 다이묘가 되기도 합니다. 모리가문(毛利氏)이나 조소카베가문(長宗我部氏), 류조지가문(龍造寺氏), 아사이 가문(浅井氏) 은 재지무사인 고쿠진(国人)이거나 슈고의 가신 출신으로 센고쿠 다이묘가 되는데 성공하죠.


다만 이런 사례가 일반적인 건 아닙니다.


전국시대에서도 중세 일본의 봉건적 지배질서의 발전과정에 형성된 중앙권력에 의한 관직부여가 주는 정당성, 그리고 이를 누대에 의해 세습해온 혈통에 대한 권위가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힘에 의한 지배가 통하는 세상은 아니었다는거죠.


센고쿠다이묘(戦国大名)는 슈고다이묘에 비해서 중앙권력의 권위에 상대적으로 덜 의존하며, 자신의 영국(領国) 내부에서 훨씬 독자적인 권력을 가지고 재지무사인 고쿠진(国人)들을 가신단으로 흡수하게 됩니다. 일족이나 기존의 가신에 그치지 않고 지역 내의 영주와 무사들인 구니슈(国衆)를 가신단(家中)으로 재편하여 영역 전체를 통치하는 영역권력을 구축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기반으로 센고쿠다이묘는 중앙정치와 무관하게 독자적인 외_교권과 사법, 행정, 군사권한을 행사합니다. 그들의 지배영역은 슈고다이묘와 달리 하나의 나라처럼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중앙권력의 몰락이 역설적으로 중세 일본 특유의 봉건적 질서로 형성된 중층적이고 복잡한 지배권력구조를 타파하고 보다 일원적인 지배질서로 가는 길을 열었다는게 재미있죠.


전국시대 이전의 중세 일본의 재지사회가 중층적이고 복잡한 지배질서를 형성했을 때는 해당 지역의 명확한 지배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장원(荘園)의 지배자인 장원영주, 국가소유지인 공령(国衙領)의 지방관인 고쿠시(国司), 그리고 무가정권의 수장인 막부와 막부가 임명한 슈고까지 다양한 권력주체가 존재하고 재지무사들은 이들의 피관(被官)으로서 다양한 직책을 가지고 부대껴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복잡한 구조에서 중세 일본의 다양한 권력주체들은 이 사이에서의 분쟁을 굳이 자신의 피를 흘리고 돈을 써가며 공정하게 중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와 주종관계로 이어진 인연(縁)의 대상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게 더 합리적입니다.


반면 전국시대에 센고쿠다이묘가 지배하는 영국(領国)은 보다 하나의 국가에 가까워집니다. 각각의 국가들은 이를 견제할 중앙권력의 부재 하에서 다른 국가들과 영역분쟁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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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 하나의 지배자!!!! 영국을 하나의 나라로 결집시키는건 센고쿠다이묘의 생존에 매우 중요했을겁니다.-----


센고쿠다이묘들은 다른 센고쿠다이묘들과의 분쟁에서 승리하고 생존하기 위해서 영국(領国) 지배를 강화하고, 영국(領国) 내에 존재하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최대한 동원해야 했습니다. 자기 일족이나, 특정한 인연(縁)의 대상만을 챙겨서는 이런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영국 내에서 재지무사나 촌락이 토지문제나, 농사에 필요한 용수(用水) 문제가 발생해 무력분쟁이 일어나면 내적 역량이 훼손됩니다. 심지어 영국 내 분쟁의 확대로 인해 야기되는 불안정은 다이묘의 권위를 훼손해서 하극상으로 이어질 우려까지 존재하죠.


센고쿠다이묘는 이전시대와 달리 적극적으로 영국 내 분쟁을 조정하고 자력구제를 타파해야 하는 이유가 매우 분명했습니다.


센고쿠다이묘들은 자신을 지역의 공적 권력(公儀)이라고 자칭하기 시작합니다. 중앙집권화가 아닌 지방분권화로 인해 오히려 공적 권력의 개념이 태동하는거죠.


이를 위한 수단 중 하나가 바로 분국법(分国法)이었습니다.



참고자료
佐藤進一, "日本の歴史9➰南北朝の動乱"
堀川康史, "室町幕府地方支配の研究"
静岡県教育委員会, "資料に学ぶ静岡県の歴史"
福井県 "福井県史 通史編2 中世"
久保田順一, "戦国上野国衆事典"
https://blog.naver.com/kduncan/201842972
https://blog.naver.com/kduncan/87044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