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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 고위 지휘관들을 둘러싼 ‘상식’ 또한 재고, 재검의 여지가 존재한다.


당시 프랑스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모리스 가믈랭 장군은 오랜 기간 1940년 5월 프랑스군의 졸전에 대한 비난이 제기될 때마다 자동으로 끌려나오는 일종의 피뢰침이었다.


실제로 가믈랭은 종종 군사적 무능의 전형일뿐만 아니라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프랑스 군사 기계의 정점으로 묘사되어왔다.







물론 1940년 3월 가믈랭이 딜-브레다 계획을 채택하면서 그의 군대를 심각한 작전적 위험에 노출시켰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 결정조차도 당시 그가 확보 가능했던 최상의 정보를 기반으로 한 최선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1939~1941년의 독일군은 예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도박적이기까지 한 위험한 전술들을 자주 채택해 사실상 모든 적수들을 작전적으로 기습할 수 있었다는 사실 또한 중요하다.


결국 가믈랭의 실수는 진주만의 월터 쇼트 중장과 킴멜 제독처럼 심각한 패배에 책임이 있는 여타 다른 지휘관들과는 달리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독일과의 전쟁을 대비해 프랑스군을 준비시키고자 한 가믈랭의 10년간의 노력은 그가 적군의 능력과 의도에 대한 통찰이 탁월했던 훌륭한 계획가였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프랑스 산업은 가믈랭과 다른 프랑스 최고위 장군들의 추천에 기초해 소뮤아 S35 중형전차와 호치키스 47mm 대전차포와 같은 1940년 최고의 무기들을 생산해냈다.


가믈랭은 당시 프랑스군에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었고 새로운 기술의 가치를 알고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명철했다. 







따라서 가믈랭과 다른 고위 프랑스 지휘관들이 현대전에 적응하지 못했고 1918년의 전술에 집착했다는 평가는 역겨울 정도로 불공평한 것이다.


그는 마지노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고 따라서 1935년부터 프랑스군 최초의 기갑사단 창설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가믈랭과 막심 베강 장군이 없었다면 프랑스 육군의 전차 보유 대수는 실제 역사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며 기갑사단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가믈랭은 군사 발전을 주의 깊게 따라갔고 독일군의 능력과 전술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패배의 책임 여부를 논하기 위해 비시 정부가 개최한 리옴 쇼 재판을 시작으로 가믈랭의 명성이 더럽혀지기 시작했다. 1940년의 패배 그 자체뿐만 아니라 3공화국의 위험한 정치적 격류를 헤쳐야 했던 전문 군사 관료로써의 성향이 가믈랭의 발목을 낚아챘다.


프랑스군 내부는 물론 정치 엘리트들 사이에서도 가믈랭의 강력한 비방자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모든 책임을 오롯이 가믈랭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분투했다.


하지만 독일군조차도 가믈랭의 군사 관리자로써의 능력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다만 가믈랭은 어떻게 보더라도 전투를 좌우하는 전장 지휘관으로써의 재능을 갖고 있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작전을 부하들에 위임하는 것을 선호했으며 이러한 성향은 이후 역사가들에게 가믈랭의 “나약하고 무능한” 행동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소련 연방 원수 게오르기 주코프 정도를 제외하면, 2차 세계대전에서 최고사령관이 모든 작전을 직접 지휘하는 사례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따라서 전장 지휘권을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한 가믈랭의 행동은 당대 고위 사령관들에게 허용된 표준적이고 상식적인 규범 내의 행위였다.







또한 1940년 가믈랭의 지휘는 동맹과 협력할 수 없고 적을 이해하지도 못했던 영국 고위 육군 지휘관 에드문드 아이언사이드보다는 훨씬 뛰어났다.


그러나 가믈랭과 프랑스 최고사령부가 1940년 연합군의 재난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게 되면서 재앙에 대한 영국의 책임분은 역사의 그늘 저편에 묻히고 말았다.


결국 가믈랭은 미국내전 연방군 장성 조지 B. 매클렐런과 마찬가지로 군대를 조직하고 구축하는 데 있어 상당히 유능했지만 실전에서 군대를 승리로 이끄는 데에는 미숙했다.







1940년 3월, 30개에 달하는 연합군 사단들을 벨기에 영내로 진격시킨다는 딜-브레다 계획을 채택한 가믈랭의 결정은 적의 기습에 대응할 예비대 전력을 크게 감소시켜 이후 독일군의 계획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또 가믈랭은 전선 중앙에 지나치게 부주의했고 아르덴 숲을 통과하는 독일군의 기동이 제때 대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느릴거라 예측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치명적인 작전적 실수였다.


하지만 가믈랭의 이런 작전 실수들조차도 1934년 국방장관으로써 유사시 벨기에로 진격해야 한다 주장하며 아르덴 지역의 위험 또한 일축한 필리프 페탱의 오판에 근거한 것이었다.


벨기에 또한 중립적인 비협조라는 자멸적 정책을 침공 직전까지 채택함으로써 가믈랭의 계획을 훼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군, 군단, 사단 차원에서 당시 프랑스의 지휘 수준은 드골, 드 라트르 드 타시니, 터치온, 델레스탱과 같은 유능한 장교들에서부터 그랑드, 코라프, 레퀸과 같은 평범하거나 무능한 장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평시에서 전시로 전환하는 다른 모든 군사 조직과 마찬가지로, 프랑스군에는 서류 작업과 기타 업무에는 탁월하지만 전장 지휘엔 적응하지 못하는 여러 장교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대 전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국방군의 손아귀에 완전히 압도당한 고위 책상물림 펜대들을 보유하고 있었던 건 1941~1943년의 미국, 영국, 소련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들과 프랑스의 유일한 차이점은, 1940년 프랑스에겐 실수에서 배우거나 쭉정이를 정리할 시간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뿐이다.







독일인들 또한 1940년 무명의 참모장교였다가 2년 후 군 하나를 스탈린그라드의 재앙으로 이끌게 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소장과 같은 그들만의 무능한 장교들이 있었다.


1940년 5월 제1SS기갑연대 '총통경호대 SS 아돌프 히틀러(LSSAH)' 연대장을 지낸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요제프 “제프” 디트리히는 이후 야전원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에게 ‘괜찮지만 멍청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실제로 군사 지도를 읽을 줄 몰랐다.


4년 후, 디트리히는 똑같은 아르덴 숲에서 이번에는 6 기갑군을 패배로 이끌었다. 프랑스군에만 군사적으로 무능한 ‘간첩’들이 있는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