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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프랑스 내부의 정치적 분열과 도덕적 퇴폐라는 상호 연관된 주제는 프랑스 육군이 내부에서부터 무너졌다는 결론을 만들어내고자 한 많은 사람들에 의해 부추겨졌다.
필리프 페탱은 1940년 5월 17일 ‘조국은 패배했고 이제 평화를 애걸하며 휴전협정에 서명하기 위해 나를 부르고 있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 30년의 결과물이다.’라고 말하며 이러한 비난을 최초로 명문화했다.
보수주,의자였던 페탱은 프랑스의 급진적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특히 1936~1938년의 인민전선이 전간기 프랑스인들의 사기를 악화시켰다 비난했다.
확실히 장 마테와 같은 좌.익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1930년대 일련의 파업을 통해 무기 생산을 방해했고 일부 공장에서는 거의 무정부 사태가 초래되었다.
또 프랑스 공.산당의 지도자였던 모리스 토레즈는 추종자들로 하여금 프랑스의 전쟁수행 노력에 반대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프랑스 정치권 내부의 분열은 확실히 상당했고 당연히 징집 및 예산과 관련된 전쟁 전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1940년 실전에서 병력이 배치되고 사용되는 방식은 결국 군사 지도부, 지휘관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 정치권의 분열이 이러한 군사 행위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증거는 거의, 혹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1940년 당시의 모든 프랑스 군사 지도부가 최소한 표면적으로나마 보수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적 원한은 가짜 전쟁 기간 일부 군대의 사기에 확실히 악영향을 초래했을 수 있지만, 1940년 5월 10일 마침내 전투가 시작되고 삶과 죽음이 한순간에 갈리는 극한 상황이 도래하면서 병사들은 더 이상 그런 하찮은 추상적 공상에 열중할 시간이 없었다.
또한 상술한 노동문제가 1938~1940년 프랑스의 군사물자 생산에 영향을 끼친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정도는 프랑스의 자체 방어 능력을 훼손하는 수준까지 가지 못했다.
프랑스의 군사적 패배와 관련해 제기된 그 모든 논쟁들 중 정치적 분열이야말로 전장에서 벌어진 사건과 가장 연관이 없는 주제인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패배가 ‘도덕적 퇴폐’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은 특히 전쟁 중 영국과 독일에서 인기가 있었지만 결국 실제 전장의 진실과 하등 동떨어진 광범위한 일반화에 불과하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의 ‘도덕 부족’을 시민들에게 더 큰 희생을 촉구하기 위한 반면교사로 이용했고 나치 정권에게 이로 인한 신속한 승리는 3제국의 도덕적 우월성을 확인시켜주는 훌륭한 선전거리였다.
결국 양측 모두가 스스로의 전쟁수행을 유지하기 위한 용도로 프랑스의 ‘도덕적 타락’이라는 허구를 앞다투어 꾸며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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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이 마지막이고 프랑스가 결국 왜 패배했는지 드디어 나옴
프랑스 패배에서 이 파트가 제일 중요하긴한데 잘 안다뤄지긴 함 제3공화정 정치체제랑 대전 이전 정치상황도 같이 엮여 있어서 군사 주제로는 깊게 다루기는 어려움 요약하면 절대 권력이 나오지 않도록 견제의 견제를 해둔 시스템이 오히려 리더십과 책임감 부재를 낳았다고 보면 됨 1936년 의석만 해도 6개의 정당은 물론 무소속으로 보이는 집단조차 2개의 파벌을 형성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