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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살펴본, 기존 역사학자들이 1940년 프랑스의 군사적 붕괴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표준 인과 요인들의 세부 분석 결과 우린 한가지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러한 요인을 제거할 경우 프랑스가 독일에게 불과 6주 만에 패배했다는 역사적 결과가 과연 바뀌었을지에 대한 여부를 거의 고찰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1940년 프랑스 육군에 가믈랭보다 더 나은 고위 지휘관이 있었다면, 독일군의 행동을 더 잘 예측하고 여기에 대응할 수 있었던 장군들이 대신 있었다면 전역의 결과 자체가 완전히 뒤바뀌었을까, 아니면 항복협정의 날짜를 단지 몇 주 뒤로 미루는 정도에 불과했을까?
혹은 프랑스가 50억 프랑을 마지노선에 투자하는 대신 더 많은 기갑사단을 편성하는 데에 썼다면 과연 프랑스군이 실제 역사보다 더 훌륭하게 싸울 수 있었을까?
이러한 지적을 염두에 두고 분석하면, 1940년 5월 프랑스가 그토록 신속하게 패배하고만 진정한 원인을 크게 네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1. 1940년 프랑스의 패배를 초래한 근접, 혹은 직접적인 원인은 a) 육군 병력에 대한 효과적인 항공 지원의 미비와 b) 야전군의 불충분한 전술 수준 방어 화력(대전차포, 대공포, 박격포, 지뢰 등)이었다.
2. 이런 물질적 부족을 초래한 궁극적인 원인 중 하나는 프랑스 군부와 정치 지도자들의 연합 전쟁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었다. 그들은 프랑스 스스로의 자원을 동원해 온전히 홀로 싸울 계획을 애초부터 수립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미래 분쟁 계획에 내재되어 있었던 분쟁 초 해외 동맹국에 대한 지나친 의존 때문에 프랑스 본토 군대와 공군의 현대화는 1938년 9월 뮌헨 위기 이전까지 예산 우선순위에 들지 못했다.
본토 군대와 공군을 재건하려는 마지막 최후의 노력마저도 프랑스 산업계가 신형 무기를 대량 생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군 지도부가 병사들을 적시에 훈련시키거나 신형 장비를 보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프랑스 육군은 적절한 화력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예비 장비 또한 결핍되어 있었다. 이미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지원화기 면에서 독일 육군은 동단위 프랑스 육군 부대를 시종일관 압도하고 있었다.
결국 프랑스는 전쟁 초기 모든 부대를 완전히 무장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현대식 무기를 생산하지 못했고, 손실을 대체할 예비 장비 또한 모자랐기 때문에 단위 부대별 충분한 방어 화력을 확보할 수 없게 되었다.
3. 패배의 또다른 궁극 원인은 강대국으로서의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프랑스의 오랜 집착이었다.
프랑스 지도자들은 독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해외 동맹국들과 협력할 일관적인 계획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거나 스스로의 내실을 다지기보다는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벨기에 등의 연합을 이끄는 행위 자체에서 일종의 위안을 얻었다.
4. 1940년 연합군이 겪은 패배의 마지막 궁극 원인은 지상과 공중에서 프랑스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한 영국의 실패였다. 영국 육군은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한 소수의 원정군만을 프랑스 전역에 투입했으며, 이들은 당연하게도 지상전의 향방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또 스핏파이어를 프랑스 전역에 투입하는 것을 거부한 영국공군 전투기 사령부의 결정으로 인해 이미 파일럿 부족, 정비 미흡, 신형기 부족으로 독일 공군에 비해 질적으로 열세였던 프랑스 전투기 부대는 절망적인 수적 열세에까지 놓이게 되었고 이는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육군에 대부분의 투자를 집중하며 독일 공군과 맞서는 임무에 영국 공군과의 협력을 크게 의지하고 있었던 프랑스 지도부의 입장에서 이와 같은 전개는 말그대로 청천벽력이었다.
전후 영국 전투기 사령부는 프랑스 작전이 무의미했고 영국 전투를 대비해 스핏파이어를 아껴야 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결과론일 뿐, 1940년 여름 영국 전투가 아예 벌어지지 못하게 할 방법이 엄연히 존재했다.
200대의 스핏파이어를 프랑스에 투입하는 것은 전역의 결과 자체는 바꾸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독일 공군의 작전환경을 실제 역사보다 확실하게 악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며, 그랬을 경우 독일 공군은 이후 수개월간 영국에 대한 주요 작전을 실행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영국은 1939년~1940년 내내 자신이 무능한 동맹국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실제로 영국은 진짜 전투를 벌이겠다는 정치적 의지가 전무한 상태에서 독일과 전쟁을 시작했다.
체임벌린 내각에게 있어 전쟁은 실제적인 행동보다는 히틀러가 국제 협약을 어겼다는 실수를 최대한 빨리 깨닫도록 만들 상징적인 행위였을 뿐, 그들은 실제로 유혈사태와 피해가 발생하는 것은 최대한 회피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파리의 달라디에 내각은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에 동의했을 때 영국의 이러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후 처칠이 수상이 되었을 때 그는 영국의 전쟁 수행에 확실히 활력을 불어넣었으나 그 역시 1940년 여름 영국의 군사 자원이 얼마나 제한적인 상태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병력의 완전한 투입은 자제했다.
최후의 순간 레노는 영국군이 기꺼이 투입하고자 하는 병력이 얼마나 소규모인가를 알고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이 모든 궁극 원인들이 딜-브레다 계획을 채택한 가믈랭의 작전적 실수와 스당의 두 3류 예비사단의 패주와 함께 맞물리면서 멈출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퍼펙트 스톰을 완성시켰다. 그렇게 프랑스는 항복하고 말았다.
결국 한때 페탱의 “화력 격멸”이라는 구호를 지지했던 군대는 전장과 전장 상공에서 화력 우위를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화력 부족의 근본적인 원인은 히틀러를 저지할 책임이 모호한 연합이 아니라 온전히 그들 어깨에 달려 있다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고 내실을 다지기보다 겉치장에 열중했던 프랑스 군-정치 계층의 의식적인 결정이었다.
또 프랑스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지만 대영제국 또한 동맹으로써의 의무를 제대로 완수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1940년 연합군의 파멸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1940년 프랑스가 더 발전된 전투기와 더 많은 대전차포를 보유해서 당장의 패배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할지라도 진정한 요점은 그들의 군대가 전쟁 억제라는 최중요 임무에서 실패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이 실패가 프랑스만의 것은 아니었다. 정치인과 시민들이 전쟁을 혐오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착각한 당대 모든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이 전쟁의 억제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1940년의 수치는 양보를 통해 평화가 유지될 수 있고 말이 무장 침략에 대한 적절한 방어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거짓 복음을 퍼트린 모든 정치인, 논설가, 평화주의 작가, 독선적인 학생, 사회주의 선동가들의 수치였다.
이후 히틀러가 결국 이 빈약한 껍질을 부쉈을 때, 그간 스스로의 군사 기계가 약화되도록 허용했던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은 순식간에 무방비한 상태로 전락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히틀러는 처음부터 그의 국민들에게 보복 전쟁을 천명했고 이 생각에 도전하는 요소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했다. 실제로 파시스트 사회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전쟁을 위해 사람들을 신체적, 정신적으로 강화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영국이 가잘라와 싱가포르에서 배웠고 미국이 카세린 고개에서 배웠듯 우행과 제도적 실패가 프랑스 육군에만 국한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40~1942년 영국군 전차 교리는 1940년 프랑스군의 그것보다도 한심했고 수차례 패배를 겪은 뒤에야 수정되었다.
결국 1940년 프랑스군의 패배는 서구 민주주의가 21세기 직면한 위협과 관련해서도 여전히 중요한 교훈들을 제공한다.
지도력보다 관리 능력을, 전투력보다 행정 기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행태는 지속적으로 군사적 재앙을 불러오는 원인이었다.
또한 자국 영토를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었던 1940년 프랑스의 무능력은 집단 안보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 치명적인 실수가 될 수 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결과적으로 프랑스가 벨기에에서 발견한 것처럼, 의미 있는 기여를 원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구성원을 추가하여 집단 안보 체제를 확대하려는 것은 대체로 역효과를 낳는다.
이것이 우리가 단순한 조롱과 유치한 우월감 충족을 넘어 프랑스의 패배에서 배워야 할 진정한 가르침일 것이다.
지도력보다 관리 능력을, 전투력보다 행정 기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행태는 지속적으로 군사적 재앙을 불러오는 원인이었다. <- 이 대목 너무 무섭네요
그 대목에서 나도 소름돋았음
이거 ㄹㅇ 정곡을 찌르는 대목인듯
어?... - dc App
이거 진짜 걱정되는게, 전시에 군대는 어찌보면 필연적으로 합리적이지만, "낭비적인 조직"이어야 함. 식량도 탄약도 병력도 넉넉하게 퍼부어야 승리하는데 평시에 행정형으로 예산/물자 아끼고 손실에 일일히 벌벌 떨고 사유서쓰던 장교/부사관들이 과연 전시 마인드로 On/off가 그렇게 잘 될 리가 있냐?...
물론 잘 돌아가는 군대는 그래도 관리 철저히 할 방법도 찾아야하고, 관리를 일부러 소홀히하자는 건 아님. 근데 주객이 전도된 행정관료화된 조직에 익숙한 인원들이 과연 전시에 정반대의 대응을 잘 하길 바라는게... ㅠ
그 행정기능 강조의 원인도 무책임과 두려움이 낳은 행동이었지 나는 책임지기 싫다
어어 - dc App
프랑스군이 6주 당한게 단순 정치적인 거 때문은 아니었네... 여튼 이래저래 많이 배움
프랑스는 생각보다는 유능했고 영국은 생각 이상으로 트롤했구나 - dc App
예전에 몽고메리 벽돌책 볼때 아무리 해군 집중했다 쳐도, 프랑스랑 같이 싸운 병력이 너무 차이나는데...? 싶어서 의아하긴 했음. 스핏파이어도 일부러 투입 안했다는건 좀 혐성이네 근데 ㅋㅋㅋ...
정 반대임 저 시점 가도 영국의 국방비는 해군으로 매번 빨려나갔는데 쓸 돈이 안나옴 역으로 프랑스가 전략에 지좆대로 겐세이 놓아서 개판 만들고는 위기에 빠지니까 영국도 악깡버 한건데 그 악깡버에서 못버텼던걸 지적할 뿐
안그래도 독일 엉뚱한 생각 못하게 베르사유 조약 수정하려고 영미가 계속 부채 탕감 등으로 노력했는데도 자꾸 독일 들쑤시는 혐성으로 개판만들어서 부추긴게 프랑스 ㅇㅇ 소협상국같은 개소리로 독일 부추겨서 힛통이 톡톡히 재미봤고
ㄴ본문에서 말하는 주제는 전간기 정치가 아니라 개전이후 군사적 요소니까. 육군뿐만 아니라 영국이 예산을 집중한 공군에서도 실패했다는거고.
다른 편에서 나오지만 전략이 개판나고 동맹간 손발이 안맞았던 데에 영국도 알려진 것보다는 책임이 있었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거나 스스로의 내실을 다지기보다는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벨기에 등의 연합을 이끄는 행위 자체에서 일종의 위안을 얻었다." "정치인과 시민들이 전쟁을 혐오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착각한 당대 모든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이 전쟁의 억제에 실패하고 말았다."ㄷㄷ
이번 전쟁을 생각하게 하네.
와 그러네...;;
체임벌린 재재평가행 - dc App
그건 아님 체임벌린이 쥐어짜서 그 정도라도 나온거고 진짜 문제는 프랑스는 저거 이전에도 이래저래 기회를 스스로 말아먹었음
참고로 체임벌린 아니었으면 재무장 군비 자체가 안나왔음 그 양반이 원래 재무성 출신이라 전시체제 구축이나 국방 예산 확보 등등 기획력은 기막혔고
본문에도 나오지만 처칠조차도 영국이 동원가능한 군사적 자원이 얼마나 적은지 알아서 사려야 했으니까. 체임벌린이 "혐성"을 부린것처럼 보이는 건 전체적 평가야 어떻건 영국만의 입장에서는 재건 과정에서 필요했던 일인것도 있음 결국 근본적 원인은 영국도 프랑스도 전간기 군사 부문을 너무 방치했었던거.
결국 영국이 시발롬들이라는 결론이네 ㅋㅋㅋ
대중에 알려진것보다는 책임이 컸다는거지 영국때문에 다 졌다는 소리는 아님
ㄴㄴ 엘랑 ㅈ같은 새끼들이 자기들은 ㅈㅈ대로 놀면서 영국에게 기댔다는 말임. 영국이 엘랑 기대만큼 도와주지 않은 건 엘랑이 페전하는 결과에는 변화를 주지 않을 거라고 써놨자늠.
당시의 벨기에는 지금의 헝가리인가..
다 읽고 느낀 점 : 전격전과 마지노선 두 가지 키워드만 가지고 6주 신화를 설명하는 모델이 훨씬 단순하고 명쾌하다 고로 대중에게 먹히기 쉽다. 이 정도로 복합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하는 글을 이해 할려면 능지 이슈로 간다
진실, 혹은 진상은 보통 드럽게 꼬이고 복합적인게 문제라면 문제지...
뭐 하나 간단한게 없는데‘심플한 설명’너무 좋아하는 애들이 문제임
그것도 이유지만 하나의 결론으로 종결해서 교조적 교훈으로만 전승하면 우리가 더 배울 것이 없지
프랑스 정치사 쪽에서는 이 패배는 1차 대전 이후로 자신들이 믿어온 제3공화정 시스템의 한계에 얽매인체 국가적 ptsd와 책임회피 상태가 만든 결과라고 보더라 요약하면 군인과 정치인들 모두 1차 대전의 참사는 막아야한다며 도망가기 바빴고 한 때 1차 대전의 엘랑을 이끈 용감한 지휘관과 참모들이 자신들의 상관과 장군 자리가 된 6주 상황에선 몽상을 꾸는걸로 과거의 ptsd를 극복하려는 무책임한 겁쟁이들이 되버렸고 정치계는 과거의 공화정과 제정 시절에 대한 두려움으로 절대 권력을 막기 위한 만든 견제와 견제만의 시스템이 리더십 부재와 정치적 무책임을 낳아버렸고 결국 국가적 영웅에 기대버리는 도피 심리와 공포심에 페탱을 선택해버린거라고 함
좋은 글 정말 잘 봤고, 결국 '6주'의 원인은 대충 이렇게 정리되는거 같네. 1. 프랑스군은 단위 부대의 화력 보충 같은 내실을 다지기보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을 끌어들여 외/교적 연합으로 국방을 해결하려 들었다. 2. 1의 연장으로 프랑스의 강대국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식민지 전쟁 같은 외형적인 투자에만 전념하고, 통신, 화력, 공군력 등의 투자를 소홀히 했다. 3. 그렇게 '연합 전쟁'을 철석같이 믿은 프랑스의 명치를 오목하게 만든 원인 중 하나가 매우 도움 안 된 1940년 대영제국. 4. 여기에 큰 그림은 잘 그리지만 작전술 이하 단위에서 치명적인 실책을 한 프랑스 군 수뇌부(브레다 안을 밀어붙인건 가믈렝 이전부터니까.) 5. 막타를 후려갈긴게 스당에 배치된 프랑스군 최약체 2개 예비사단
와 깔끔한정리 ㅆㅅㅌㅊ
행정적 군대 음 북괴는 몰라도 중국은 어쩌지 시바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