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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민들은 파울루스가 불멸의 영웅으로 남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는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6군 장교들과 병사들이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독일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죽었다'는

끝까지 믿고싶지 않았던 비보를 1943년 2월 3일 접했을 때 독일 국민들이 떠올린 것은 참극이 일어났다는 것이었고 참패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었다.

친구와 가족들을 잃은 사람들에게 '영웅적 희생'이라는 공허한 구호는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뉘른베르크의 여인들도 남편과 아버지와 아들과 형제들을 6군에서 잃은 수많은 사람들 중 일부였다.

2월 3일 보도를 접한 그들은 판매원의 손에서 신문을 빼앗아 갈기갈기 찢으면서 비통함에 울부짖었다. 남자들은 나치 지도부를 비난했다.



"히틀러는 지난 석 달 동안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다"



사람들은 소리질렀다. 게슈타포가 군중 속으로 섞여들었지만 분노와 비탄에 젖은 사람들을 체포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상부에서 이를 자제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보안국은 6군의 비극으로 온 국민이 '깊은 충격'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이들은 깊은 슬픔에 잠겼고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지원군을 보내거나 철수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도 많았다.

사람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만연했던 낙관적 보고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지에 대해 따졌다.

지난 겨울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전력을 과소평가했다고 비난했다.

이제 전쟁에서 이기기는 틀렸다면서 패전 뒤에 닥칠 결과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스탈린그라드 이전까지 독일인들은 정권을 욕할지언정 히틀러는 웬만해선 비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6군의 전멸이 히틀러의 책임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했다.

"처음으로" 울리 폰 하셀은 목격했다.

"사람들이 히틀러를 직접 겨냥하여 수군거린다. 지도부가 제대로 위기를 맞은 것이다. ......쓸데없는 체면, 범죄적 체면 때문에 그 아까운 피들이 희생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했다."






사람들은 1월 30일 있었던 연설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국민에게 분명하게 말하기를 꺼려하자 비난이 고조되었다.

반체제 세력들은 고무되었다. 히틀러를 '스탈린그라드의 살인마'로 공격하는 낙서는 지하 저항세력이 아직 소멸하지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심상치 않은 사태에 놀란 상당수의 장교와 고위 관리들은 1938~1939년 세웠던 음모 계획들을 되살렸다.





출처 히틀러 평전 2권, 이언 커쇼, 교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