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철교의 폭파(3)>
https://www.joongang.co.kr/article/1243110 - 원문 링크
한강다리는 처음에는 27일하오 4시쯤에 끊을 계획이었다. 이날 하오께에 창동저지선이 무너지자 육본지휘부는 참모회의를 거쳐 시흥으로 후퇴를 결정, 하오 1시께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공병감최창식대령은 27일상오 9시에 공병학교장 엄홍섭중령에게 폭파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엄중령은 한-남동에서 부대를 남한강파출소로 옮겨 지휘소를 설치하고 폭파준비에 착수했다. 폭파장교인 황원회중위는 4개의 다리 절단용으로 도합 7천파운드의 폭약을 제1공병단 창고에서 인수해와서 3시30분까지 준비를 끝냈다.
<처음 계획은 하오4시 폭파>
이제 30분후면 명령 일하 4개의 다리는 끊기는 것이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육본지휘부가 왜 폭파시간을 하오4시로 잡았는가 하는 점이다. 최대령 군재기록을 보면 참모총장은 적전차가 시내로 들어오면 즉시 폭파하라고 명령한 것으로 돼있다. 그러나 27일하오 4시에 실제로 적탱크는 아직 수유리 북쪽에 있었다.
육본지휘부는 27일 아침에 아마 하오 4시께면, 적탱크가 시내에 도달하리라고 적남침속도를 계산한 모양이지만 엄청난 오산이었다. 여기서 육본지휘부라고 했지만, 사실 한강폭파는 처음에는 참모총장과 참모부장, 공병감, 그리고 실제 폭파 관계장교만이 알고 있었다. 수도사단장이었던 이종찬대령(현코리어엔지니어링사장·55) 조차도 『다리를 끊는다는 이야기를 상부로부터 전혀 통고받지 못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여하튼 하오4시로 예정되었던 폭파가 무기연기 된 것은 맥아더 전방지휘소가 설치되고 미해·공군의 한국지원이 확정되어 육본이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됐기 때문이었다.
이 폭파 연기는 참모부장 김백일대령이 직접 현장에 나와서 전달했다. 김대령은 폭파 교관 황원회중위로부터 장치한 폭약을 해체했다가 재장치하는데 20분내지 40분의 시간이 걸린다는 말을 듣고, 『명령이 난후 다리가 안 끊겨도, 그리고 명령전에 다리를 폭파해도 너는 총살이다』라고 말했다. 이때 김대령은 폭파 명령권자는 참모총장 자기, 공병감, 엄홍섭중령, 김홍일소장이라고 밝혔다.
<다리 안끊게 된다는 낙관론도>
그러나 김홍일씨는 『참모학교 교장의 입장으로서 자기에게 그런 권한이 없을뿐더러 그런 권한을 위임받지도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서울로 복귀한 육본이 미해·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를 매우 낙관하고 이제 다리를 끊지 않아도 될지모른다는 희망을 품은 것은 사실이었다. KMAG의 육본 파견 미고문 하우스먼대위는 시흥으로부터 돌아온 채참모총장과 서로 얼싸안으며 이젠됐다고 기뻐하는 것을 보았다고 이선근정훈국장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미아리 전선의 붕괴로 이런 희망은 어이없게도 무너졌다.
채참모총장이 다시 한강교 폭파준비를 명령한 것은 27일하오 11시30분이었다. 이때의 상황을 이선근국장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방송국 처리문제로 총장실에서 협의하고 있을 때입니다. 총장은 공병감에게 전화를 걸고는 곧 오라고 했어요. 출두한 최대령을 보고 한강교 폭파를 다시 준비하라고 명령하더군요. 최대령이 준비는 다 돼있는데 언제 합니까 하니까 다음에 또 내가 지시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후 둘이 함께 총장실에서 나왔어요. 거의 자정이 다 됐을 때입니다.』
참모총장이 공병감에게 마지막으로 폭파명령을 내린 것은 육본을 떠나기 직전인 28일 새벽 1시40분께였었다. 소파에서 졸다가 돈암동에서 허겁지겁 후퇴한 강문봉대령으로부터 적탱크가 시내에 침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채참모총장은 즉시 전화로 공병감에게 탱크가 동소문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리고 한강현장으로 가서 다리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최대령은 새벽에 곧 실시하겠다고 다짐했다.
<최후 명령은 상오 1시40분>
그후 채참모총장은 각 참모들의 강권으로 육본을 뒤로했고, 그 다음부터의 참모총장 권한은 사실상 참모부장 김백일대령이 행사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문제점이 있다. 즉 몇가지 기록(군재기록포함)과 몇증인들 말에 의하면 참모총장이 인도교를 건너 남한강 파출소를 지나면서 최창식대령에게 자기가 떠나고서 2, 3분후에 점화하라고 명령했다고 돼있다. 이것이 폭파의 마지막 명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 연재 제33회에서 다룬바와 같이 참모총장 후퇴때의 동행자는 인사국장 강영훈대령과 부관장 대위 운전병의 세명뿐이었는데 강대령은 『참모총장이 절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증언하고 있다.
강영훈씨는 참모총장 차가 다리를 건넌지 5, 6분후에 폭파소리를 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강영훈씨의 증언대로라면 최공병감이 폭파시간을 결정하는데 있어 상당히 재량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최대령 자신의 책임은 더 무거워 지는 것이다.
<참모총장 부작위 책임도 커>
참모총장이 건넜으니 이제 끊어도 좋겠지라고 혼자 결정하고 다른 주위상황은 고려치않고 점화를 명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참모총장 자신도 공병감을 남한강파출소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육본요원 철수후라든지 적탱크가 어디까지 침입한 후라든지등 좀더 구체적인 폭파지시를 하지않고 아무 말 없이 떠났다면 그 부작위의 책임도 또한 큰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참아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은 부지기수였지만 한강폭파현장만큼 아비규환의 참경도 드물었다.
소름이 끼치는 이야기지만 세목격자의 증언을 기록에 남기로 하겠다.
이창록씨(당시소위·정훈국정훈과·현전우신문논설위원·47)
『27일 저녁에 나는 서울신문에 가서 그 맥아더 전방지휘소 한국설치 결정의 비라를 찍고 있었습니다. 밤9시쯤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해서 정훈국에 전화를 걸었더니 불통이에오. 급히 국으로 갔더니 윤봉의중위가 막 트럭에 오르면서 이게 막차니 빨리 타라는 거예요. 삼각지까지 가니까 차파와 인파가 꽉 차서 가만히 있어도 저걸로 밀러가요. 하여간 5, 6시간이나 걸려서 지금 이원동상사의 동상이 있는 중지도까지 갔습니다. 시간은 새벽 2시반 전후예요. 이때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폭음이 났어요.
<아비규환의 피바다 폭파현장>
순간 나는 공습으로 생각했지요. 낮에 적 탱크기의 기총소사를 봤거든요. 그래서 윤중위와 함께 트럭문을 열고 뛰어나와 엎드렸지요. 그런데 비행기 프러폘러 소리가 안 들려요. 문득 낮에 시흥으로 후퇴했다 도로 올라올 때 공병대가 다리에 폭약을 장치한 것을 본 생각이 떠올라요. 그래서 다리를 끊었구나하는 생각이 나더군요.
윤중위와 같이 걸어서 폭파현장까지 가 보았습니다. 북쪽 두 째 아치쯤이 끊겼는데 그야말로 눈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의 참상이에요. 그 많던 차량은 온데간데없고 파란 인불길이 반짝거리며 타오르는데 일대에는 피바다위에 살점등이 엉겨있어요. 더우기 소름이 끼치는 것은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사람들이 손으로 다리 밑바닥을 박박 굵으며 어머니를 부르고 있어요. 아마 죽을때 어머니를 부르는 것은 사람의 본능인가보지요. 나는 이런 끔찍한 광경을 보면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럴 수가 있느냐? 국민에 대한 이런 폭거가 어디 있느냐고….
이렇게 만든 자는 마땅히 엄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재영씨(당시헌병대위·헌병사순찰대장·현대한종합식품회사총무부장·46)
『나는 27일 저녁부터 헌병 1개 분대를 거느리고 남한강파출소 부근에서 작전차량을 유도하고 있었어요. 말하자면 교통정리인 셈이지요. 28일상오 2시40분쯤으로 생각되는데 벼락치는 소리가 났어요. 다리를 끊는다는 얘기를 전혀 듣지못했기에 처음에는 비도 많이 오고해서 정말 벼락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그게 아니에요.
<폭파 불빛에 백사장 환해>
조금 있으니까 그 많던 차들이 딱 끊어졌어요. 그전에는 인도교를 차들이 6∼7겹으로 메워 내려왔는데…. 가만히 인도교 북쪽을 보니까 라이트를 켠 차들이 그대로 물 속으로 들어가요.
한 20분은 그랬을 거예요. 아마 50대이상은 빠졌을 겁니다. 다리가 끊기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 앞을 지나간 아는 사람으로는 법무감인 김완용대령이었고, 그전에 공병학교장 엄홍섭중령이 왔다갔다하는 것을 보았지만 다리 폭파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송일선씨(당시천안역운전사무소 본무조사·현건축업·44)
『27일 저녁에 용산역에 국군중령 복장을 한 자가 나타나 빨리 피난가라고 호통치는 바람에 기관사들이 많은 기관차와 화차를 버리고 도망갔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자는 적게릴라였답니다. 나는 28일새벽 2시께, 기관차를 가지고 한강까지 갔는데 중문단선 철교한가운데 기관사가 버리고 간 자동차 2대가 가로막고 있어 그것을 끌어내 뒤에다 달고, 막 전진하려고 할때 인도교가 폭파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길이 하늘에 치솟으며 자동차와 사람들이 붕떴다가 강물위에 떨어지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어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어요. 폭파의 불빛이 어찌나 강한지 그 넓은 한강 모래사장도 한때 환히 보였지요. 그때 내 시.계를 보니까 3시20분이었어요.(주=증인중에서 폭파시간을 가장 늦게 잡고있다). 나는 한참 멍하고 있다가 단선철교로 기관차를 몰고 강을 건넜지요.』
<한강교의 폭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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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교 폭파는 결과적으로 사후약방문격이 됐지만 마지막 순간에 가서 또 한번 연기될 뻔했다. 28일상오 l시40분쯤 채병덕소장이 육본을 빠져나간 후 서울에서 사실상 참모총장 권한을 행사하고 있던 참모부장 김백일대령은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미아리에서 육본에 온 전방사단장인 이응준소장과 유재흥준장이 아직 휘하부대가 그대로 남아있으니, 이들이 도강후 다리를 끊어야한다고 강력히 건의한 것이다. 의정부 전투에서 참모총장과의 의견대립으로 구두해임 된 제2사단장 이형근준장도 이 자리에 나타나 같은 의견을 말했다.
<전방사단장들 연기건의>
직책상으로는 자기가 상위지만 세 사람이 모두 계급은 위인데다가 건의사항도 정당한 만큼, 김백일대령은 어떤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적탱크가 시내에 들어오면 다리를 끊으라는, 그리고 육본 철수직전에 공병감에게 곧 현장에서 가서 폭파를 지휘하라는 채참모총장의 명령을 뒤엎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김대령은 이들 세장군의 의견을 받아들여, 작전국장 강창국대령을 보고 현장에 빨리 가서 폭파를 중지시키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을 집행하려고 장대령 일행이 지프로 현장으로 가다가 북한강파출소앞에서 폭파를 목격한 것은 이미 본 연재기사에서 기록한 대로이다. 결국 김백일대령의 폭파연기명령은 몇분의 차로 불발탄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유의할 점은 자기 휘하부대가 후퇴 도강한 후 다리를 폭파해야 한다는 일선 사단장의 의견은 백번 지당하지만 28일새벽 이 때의 일선상황은 혼효의 한 단어로 표현될 수 있었다. 지휘관의 휘하부대 장악이 전혀 돼 있지 않았다. 말하자면 지휘계통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조직적 후퇴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통신수단 이용 안한 것 의아>
그건 그렇다고 치고 김백일대령의 폭파연기명령이 집행됐더라면 6월28일 미명의 한강 참극은 미연에 방지했을 지도 모른다.
여기서 일반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때 육본에서 왜 통신수단을 소홀히 했는가, 즉 군 직통전화선을 한강폭파 현장과 가설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과 그것이 힘들 때엔 경찰경비전화라도 이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면 이제 각도를 돌러 한강교 조기폭파가 얼마나 한국군전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는가를 T·R·페런바크 저 『이런 전쟁』(This Kind of War)에 기록된 것을 인용하기로 하겠다. 『미군 고문 스코트중령은 28일 새벽에 육본작전과에 앉아 있었다. 서울시 북방의 저지선이 모두 무너졌다는 전화보고가 계속 들어 왔다. 이 보고를 받을 때 한국군 작전과 장교들은 서류를 덮어버리고 짐을 채기는 중이었다. 스코트중령은 채참모총장에게 육본철수를 명령했느냐고 물었던 바 아니라는 대답이었다. 거의 같은 시각에 KMAG단장 대리 라이트대령은 고문단 장교들에 잠시 휴식을 명령했다. 모두가 적 남침이래 잠을 못자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이때 KMAG 참모장 그린우드중령의 전화벨이 요란히 울렸다. 육본작전과 고문 세드베리소령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내용은 한국군이 한강다리를 끊으려 하므로 김백일대령에게 모든 부대와 군 보급품이 강이남으로 이동할 때까지 연기하도록 말했다는 것이었다.
<KMAG과 폭파연기 합의>
KMAG과 채참모총장 사이에는 괴뢰군 탱크가 육본앞에 당도할 때까지는 한강교를 폭파하지 않는다는 굳은 합의가 돼 있었다. 그러나 그린우드중령이 육본으로 달려갔을 때에는 채총장은 보이지 않았다.
서울을 지키고 있는 한국군은 모두 3개 사단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무기와 수송장비를 가지고 있었다. 28일 상오중으로는 북괴군이 서울시 도심가에 들어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나중에라도 다리를 폭파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KMAG의 해즐리트대령과 하우스먼대위는 동경과의 연락을 취하려고 한 밤중에 수원으로 내려갔다. 그들이 인도교를 건너고 시계를 보니 상오 2시15분이었다. 그때 다리가 폭파되었다.
이 폭파로 얼마나 많은 군대와 시민이 죽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짐작으로는 1천명에 이른다고 보고 있다.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사전 경고도 없었다.
<4만4천여 병력을 손실>
한강다리의 조기폭파로 강이북에 있던 4만4천명의 병력은 죽거나 실종됐다.
물론 장비도 함께 잃었다. 탈출한 부대는 적었다. 치열한 전투를 했던 유재흥준장의 7사단은 겨우 1천5백명과 기관총 4정밖에 한강이남으로 넘어오지 못했다. 육탄으로 탱크와 싸운 백선엽대령의 제1사단은 겨우 5천명이 김포쪽으로 넘어오고 포병대는 남겨두고 왔다.
<외국기자 2명도 부상>
동부의 춘천에서 용감하게 싸우던 제6사단은 한강교 폭파소식을 듣고 진지를 버리고 후퇴준비를 했다. 동해안의 제8단도 스스로 후퇴했다. 6월28일에 한강 남쪽에는 분산된 한국군부대들이 엉성하게 진을 치고 있었다』
미전사가 로이·애플먼 저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Yalu)에서도 한강교의 조기폭파로 한국군이 입은 손실이 아주 컸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다리가 폭파됐을 때 피난민과 차량은 생명의 탈출구인 인도교에 홍수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당시 폭파를 목격한 미군장교는 5백명내지 8백명이 폭사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4천명이상의 사람들이 다리위에 있었다고 한다.
그때 3명의 미국기자인 버튼·클레인 프랭크·기브니 카이즈·비치도 바로 눈앞에 있던 한국군 트럭이 폭풍으로 박살이 나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였다. 기자들이 탄 지프도 폭풍으로 유리창이 부서지고 앞에 탔던 클레인 가브니 두 기자는 이마에 상처를 입었다.
<6∼8시간뒤 끊어도 무방>
당시 피아의 상황으로 보아 한강다리를 6∼8시간후에 폭파해도 무방했를 것이며 그랬으면 3개 사단의 병력과 중장비·차량을 충분히 후송했을 것이다. 28일상오 6시에 나룻배로 도강한 한 미군장교는 적은 아직 먼 거리에 있다고 말했으며 그후 적 포로 진술에서도 북괴군 주력부대는 28일정오 이후에 시내에 들어왔다는 것이 밝혀졌다
다리의 조기폭파로 한국군이 입은 타격은 컸다.
<뗏목으로 질서없이 도강>
주력부대와 대부분의 차량보급품 및 중화기는 아직도 한강이북에 있었다. 철수를 강요당한 전투부대는 뗏목이나 나룻배로 제멋대로 도강하였기 때문에 전투서열의 유지가 곤란했다. 당시 한국군은 대대훈련을 마쳤고, 비록 소화기로 무장돼 있으나 전투요원들의 개인투지는 충천 왕성했다.
그러나 제6사단과 제8사단을 제외한 한국군 각 사단은 개전 3일만에 막심한 타격을 받고 반격능력을 상실했다. 초기 작전에서 살기등등한 괴뢰군에 대항하여 한국군은 오직 그들의 선천적인 투쟁심과 애국애족심만이 지연방어전의 전력이었다.』
이 두 외국자료의 기록을 더 볼 것도 없이 한강교의 조기폭파가 개전초에 물심양면으로 얼마나 큰 손해를 주었는가는 재언할 여지가 없다.
책임자는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엄단했어야 했을 것이다. 공병감 최창식대령에게만 책임을 지운 것은 아무래도 정치재판의 인상을 짙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대령의 미망인 옥정애여사는 4.19후에야 비로소 남편의 재심청구를 냈던 것이다. 이 재심을 맡아 변론한 옥황남씨(현 변호사·59)의 이야기를 잠깐 들어보기로 하겠다.
『최대령 부인 옥정애여인는 바로 나의 재종매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 사건을 맡은 것이지요. 옥여인는 4.19가 나던 해 9월에 정부에 탄원서를 내고 남편의 유해라도 찾게해 달라고 했지요. 옥여인은 절차와 그밖의 사정으로 꽤 시일이 걸렸어요.
<미망인, 남편 원죄풀고 사망>
64년10월23일에 가서야 원심판결을 뒤엎고 무죄로 확정됐읍니다. 장본인이 사형된후 무죄를 받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만 옥여인은 남편의 원죄를 풀어주는 것이 살아 생전의 자기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옥여인마저도 3년전에 죽었지요. 내 동생이어서가 아니라 옥여인이야말로 이 혼탁한 세상에 열녀였다고 생각합니다. 15년이란 긴 세월을 청산과부의 몸으로 갖은 고생과 수모를 겪으며 남편은 죽었을 망정 억울한 누명이나마 벗어주려고 안간힘을 썼으니까요.』
6·25 전란과 엉킨 여인들의 애화도 부지기수이지만 옥여사의 경우는 좀 더 가슴 메어지는 예라 하겠다.
- 6·25 20주 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가장 길었던 3일 36, 37편, 1970년,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1242703 - 1편
https://www.joongang.co.kr/article/1242926 - 2편
도 같이 읽어보자
킹직히 중앙일보는 저 시리즈 인터넷에서 보기 좋게 해줬음 좋겠는데... 매번 검색해서 찾아 읽기 힘듦
ㄹㅇ 연재분 목록화 좀 해놨음 좋겠단 생각은 들음. 사이트에서 검색으로 찾기도 불편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