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de99e2cf5d518986abce895408876645a




당대에 그를 무찌른 카이사르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로마의 가장 위대한 장군이었던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위대한 폼페이우스)는


술라가 내전을 일으켰을 때, 가문의 '영지'나 다름없었던 피케눔 지역에서 막대한 재산과 무수한 클리엔테스(피보호민)들을 이용,


불과 20대 초반의 나이에 무려 3개 군단에 달하는 사병을 모집, 술라군에 가담함으로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기 시작했다.






20대 청년 폼페이우스는 그가 이른 나이에 손아귀에 쥔 막강한 힘과는 별개로


인간적으로는 아직 미숙한 티가 역력한, 빈말로도 매력적이라고는 못할 악랄한 애송이였다.


술라가 정치적으로 더 유리한 아내를 얻을 것을 권하기가 무섭게, 폼페이우스는 조강지처를 가차없이 버렸다.


또한 과거에 그가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을 때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던 친구들이


이제 자기가 보는 앞에서 술라에게 공격을 당하는데도, 그들을 위해 변호하는 말 한 마디 해주지 않았다.


한술 더 떠서, 그는 패전 후 시칠리아로 도망쳤던 민중파 적장 카르보를 잡아다 공개재판 후 처형한 것을 비롯해


술라의 정적들을 색출하는 데 얼마나 집요하게 앞장섰던지


청년 백정(adulescentulus carnifex, 아둘레센툴루스 카르니펙스)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얻었다.


심지어 폼페이우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속주민들의 대표가 찾아와 이건 로마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호,소하자


"칼을 찬 우리 앞에서 법 타령은 집어치우시지?" 라는 희대의 망언까지 남겼을 정도였다.






기원전 75년, 스페인에서 민중파 최후의 저항을 이끌던 명장 세르토리우스의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파견된 폼페이우스는 발렌시아 지역을 무자비하게 유린했는데


현대에 이 유적이 발굴되면서, 당시에 어떤 비극이 일어났는지 보여주는 참혹한 유골이 출토되었다.


물론 원래부터 로마군이 항복을 거부한 도시를 함락시켰을 때 저지르는 학살과 약탈은 


"개 한 마리 살려두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철저하고 잔혹했고


이런 약탈을 막은 명예로운 장군은 "공화국 제2의 건국자" 카밀루스, 설명이 필요없을 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세계의 재건자" 아우렐리아누스 대제 등 굉장히 드문 영웅들이긴 했다.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해도 폼페이우스 휘하 군단병들의 만행은 도가 지나쳤던 듯하다.


발렌시아 유적의 학살 현장에서는, 뒤로 손이 묶인 채 필룸이 항문으로부터 쑤셔박혀서 목까지 꿰뚫린 


처참하기 그지없는 유골이 발굴되었던 것이다.






물론 폼페이우스가 평생 이런 잔인하고 역겨운 인간이었던 건 아니라, 


점점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일수록 눈에 띄게 성숙해져 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휘하 군단병들이 더 이상 행군 중에 지나는 마을을 함부로 약탈하는 것을 금하고, 


아예 행군 중에는 명령 없이 칼집에서 칼을 빼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고


폼페이우스 인생 최대의 업적이었던 지중해 해적 대토벌 작전을 불과 40일 만에 대성공시켜 


2만 명에 달하는 해적들을 사로잡았을 때는, 무지성 십자가형 난사나 원형경기장에서 사자들이 수육파티를 벌이게 하는 대신


진정한 만악의 근원은 극도의 가난 때문에 굶어죽기/해적되기의 양자택일을 강요당한 속주민들의 현실임을 깨닫고


죄질이 비교적 가벼운 많은 수의 해적들을 그리스와 소아시아의 버려졌던 도시에 정착시켜 새 삶을 시작하게 함으로서


"마그누스(위대한 자, 대장군)"란 칭호에 실로 걸맞을 만큼 성장한, 가슴이 웅장해지게 만드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역시, 젊은 날의 치기어린 과오 정도로 퉁치고 넘어가기에는 "청년백정"의 업보는 무거운 것이었고


결국 그가 카이사르와의 결전에서 패한 뒤, 피신했던 이집트에서 배신당해 비참하게 난도질당하는 최후를 맞았던 것도


어찌 보면 인과응보였던 걸지도 모른다.







- "하이켈하임 로마사",


필립 마타작 저 "로마 공화정",


오사다 류타 저 "고대 로마 군단의 장비와 전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