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을 보시지 않았다면, 먼저 보시고 나서 이 글을 보시는게 이해가 쉽고 더 재미있습니다.


 이전 글에서는 중세 일본의 중층적이고 복잡한 지배질서를 파괴하고 단일한 지배질서를 자신의 영국(領国)에 정착시켜나간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가 제정한  분국법(分国法)의 성격과 그 한계를 설명했습니다. 


 통일정권의 수립이 어떻게 자력구제를 타파시켰는지 간단히 소개해보겠습니다.



도요토미 정권의 수립과 자력구제의 타파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는 1582년 혼노지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살해당한 이후 오다 가문 내부에서의 주도권 다툼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1585년에 본격적으로 천하인의 자리에 위치하게 됩니다. 도요토미 정권의 수립이죠. 


 도요토미 정권은 수백년간 이어온 자력구제 사회를 타파하게될 중요한 정책들을 진행합니다.


 첫째, 총무사령(惣無事令), 다이묘간 사적 전쟁의 금지입니다.


 다이묘간에 사적인 전쟁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이게 공식적인 정책이자 법령이냐는 일본역사학계에서도 논쟁이 있는 상황이지만, 히데요시가 다이묘간의 사적 전쟁을 규제하였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이후 에도막부로도 그대로 계승된다는게 중요합니다. 


7조 다이묘(国主)나 영주(領主)들은 사적인 싸움을 해서는 안된다. 항상 주의해야할 일이다. 다뤄야할 문제가 있다면 봉행소(奉行所)에 호_소하라.

에도막부의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 1635년


 도요토미 정권이나 에도막부는 일본 무가사회의 정점으로서 다이묘들을 주종관계 내에 넣고 이들의 사적 분쟁을 금지합니다. 분쟁이 발생했을때 다이묘들을 중재하고 판결을 내릴 공권력이 되는 거죠.


 둘째, 훤화정지령(喧嘩停止令), 마을간 무력행사의 금지입니다.


 총무사령이 무사들의 전쟁을 금지한다면, 훤화정지령은 마을간의 싸움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어떤 공식적인 정책으로 남아있다기 보다는 판례 기록에 남아있는 내용들이고 법령화되는 것은 에도 막부시기에 들어서 완성됩니다. 

 

 일본 근세사 연구자 타니 테츠야(谷徹也)는 이 훤화정지령이 임진왜란 당시 기나이(畿内) 일대에서 촌락이 치안악화로 인해서 마을간 분쟁이 빈발하고 있어서 히데요시의 조카였던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에 의해서 발령되었다고 추측합니다. 


 이는 자력구제가 토요토미 정권 시기에도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훤화정지령이 아직 일본 전국에 공통 적용되는 정책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즉 도요토미 정권이 명확하게 촌락간 무력분쟁을 철저히 규율한다는 치밀한 정책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기 보다는 당시의 상황과 여건에 맞추어 당시에 존재하던 마을간 무력분쟁을 금지하고 공권력에 의해 규율되는 "근세사회"로 조금씩 나아가는 과도기였음을 알 수 있죠.


 이후 에도막부는 1610년 촌락에서의 무기를 사용한 분쟁을 금지하는 명령을 최초로 내리고 1635년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이를 다시 기본법으로 정리하게 됩니다. 


 우물이나 용수, 들판이나 산의 경계 문제로 분쟁을 벌이는 경우에, 백성들이 칼이나 활, 창을 사용하여 무력분쟁을 벌이는 행위는 불법이다. 어떠한 경우라 하더라도 다른 마을이 이 분쟁에 가담했을 경우 당사자보다 더 무겁게 처벌한다.

도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의 훤화금지령


 도요토미 정권하에서 촌락의 분쟁금지 명령이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자력구제 사회를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는 걸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 정책은 또 있습니다.


 셋째, 칼 사냥(刀狩), 농민의 무기보유의 금지 명령입니다.


 도요토미 정권은 일반 백성이 칼이나 활, 창, 조총과 같은 무기를 가지는 것을 금지한다고 선언합니다. 백성은 농기구를 가지고 경작에 힘쓰라고 선언하죠. 사실 이 정책은 기나이 지방 특유의 반항적인 자치촌락의 봉기인 잇키(一揆)를 견제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칼사냥(刀狩) 정책은 이러한 훤화정지령을 포함해 도요토미 정권의 정책이 자체적으로 무장하고 실력행사로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는 자력구제 사회를 타파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에도시대 후기까지 촌락들은 여전히 조총을 비롯한 다양한 무기들을 해수구제 명목으로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1637년 발발한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은 향촌사회에서 여전히 대량의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다만 무기보유를 금지함으로서, 훤화정지령과 같이, 농민들이 활이나 창, 조총과 같은 전투용 무기를 가지고 분쟁을 벌이는 중세 일본의 전형적인 실력행사를 제어하고자 한 것이라고 봐야겠죠. 에도시대에 발생하는 농민의 잇키(一揆)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집결해 농기구를 가지고 강경하게 시위를 벌이는 강소(強訴)의 형태를 취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책들은 단숨에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중세 일본과 근세 일본을 구분지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실력행사로 보호하는게 아니라 공권력에 의한 재판을 통해 지키도록 하는, 자력구제 사회가 소송사회로 전환되도록 만든 것입니다.


 도요토미정권과 그를 후속하는 에도막부는 대체 이전의 중앙정권과 무엇이 달랐을까요? 어떻게 수백년간 이어진 자력구제사회를 타파할 수 있었을까요?


 역시 강력한 중앙집권이 답이었던 걸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에도시대의 정치구조인 막번체제(幕藩体制)는 중앙집권이 아니거든요.




중앙정권은 다이묘에게 압제자인가?



----1585년 당시 일본의 세력구도----


 도요토미 정권이 수립된 후 아직 일본 전국의 다이묘들을 완전히 지배하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도요토미 정권에 그나마 저항할 만한 가문은 큐슈통일을 위해 매진하던 시마즈 가문이나 관동지방의 호죠 가문 정도나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히데요시는 오토모 가문을 공격해 규슈 통일을 완결하기 직전의 시마즈 가문에게 1585년 10월 쌍방 모두 전투를 중지할 것이며 따르지 않는다면 처벌할 것을 지시합니다. 시마즈가문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히데요시는 2차례에 걸쳐 대병력을 규슈로 파견하죠.



----1587년 히데요시의 규슈 처분 결과----


 시마즈가문은 점령지 대부분을 상실하고 사츠마(薩摩)、오오스미(大隅) 2개 국과 휴우가(日向)의 56만석으로 영지가 감소하게 되죠. 


 1587년 동쪽의 관동지방과 오슈지역에도 일체의 사적인 분쟁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호죠가문은 처음에는 교섭을 시도하다가 사나다가문을 공격, 정전령을 위반하게 되죠. 히데요시는 1590년 총병력 20만에 달하는 병력으로 호죠 가문을 멸망시키게 됩니다. 시마즈 가문보다 운이 나빴죠.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소 다이묘들이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이던 혼란스러운 오슈(奥州) 지방에 대해서 어떻게 영지를 정리할지 오슈의 다이묘들을 불러들여 결정을 내립니다. 


 이에 따라 일부 영주들은 영지를 잃는 가이에키(改易)를 당하거나, 영지가 줄기도 하고, 일부 다이묘는 보유한 영지를 인정받았습니다. 


 이렇게만 봐서는 통일정권의 수립이란 각 다이묘들에게는 비참한 일일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영지를 빼앗기거나 복종을 강요당했으니까요. 그런 면만 있을까요?



-----1590년 오슈처분 직후의 세력도와 이후 발생한 잇키(一揆)와 구노헤 마사자네(九戸政実)의 반란----


 이후 이러한 도요토미정권의 영지처분이나 특정 다이묘, 당시 가독상속과 관련해 일족인 구노헤 마사자네(九戸政実)와 분쟁중이던 난부 노부나오(南部信直)를 다이묘로 인정한 사건은 오슈 지방의 무사들에게 큰 불만을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오슈 각지에서 대규모 잇키가 발발했으며, 구노헤 마사자네(九戸政実) 역시 난부 노부나오에 대해 무력분쟁을 일으켰죠. 다음해인 1591년 히데요시는 대규모 군대를 다시 파견해 이를 잔혹하게 진압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반발은 단순히 도요토미 정권의 압제의 결과라고 볼 수 없습니다. 각 지역에 다이묘에 의한 일원적 지배질서가 충분히 발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중앙권력이 쾌도난마로 지역의 영지를 배분하고, 토지조사(検地)를 통해 재지세력의 기존의 복잡한 향촌지배질서를 건드리게 된 결과였죠. 


 큐슈에서도 1587년 삿사 나리마사에게 부여된 히고국(肥後国)에서 토지조사에 반발해 재지영주들인 고쿠진(国人)들에 의해 히고고쿠진잇키(肥後国人一揆)가 일어났으며, 시마즈 가문의 영지인 오스미국(大隅国)의 고쿠진인 우메키타 쿠니카네(梅北国兼)가 임진왜란 도중인 1592년에 우메키타잇키(梅北一揆)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서쪽의 규슈나 동쪽의 변방인 오슈 지방에서는 센고쿠 다이묘의 영국지배가 상대적으로 확고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시마즈 가문(島津氏)의 경우, 규슈를 거의 통일할 만큼 강력한 위세를 발휘했던 것에 비해서 의외로 내실과 지배력이 그렇게까지 강력한 센고쿠다이묘가 아니었습니다. 시마즈 가문의 군사력은 영국과 가신단을 확고하게 지배하고 있었던데서 나온게 아니었거든요.


 시마즈 가문은 동시기 다른 센고쿠 다이묘와 비교했을때 직할령의 비중이 매우 작았습니다. 가문의 지배지역을 지배하고자 임명된 지토(地土)나 슈추(衆中)는 시마즈 가문의 가신이기는 했지만 사실상 독자적인 영지를 보유하고 경영하였습니다. 이들에게 영지를 지급해야 했기 때문에 시마즈 가문은 많은 직할령을 보유하기 어려웠고, 또한 외부와의 전쟁을 통한 영지확대를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죠. 



----시마즈 가문은 뛰어난 4명의 형제와 그 무력으로 유명하지만, 의외로 취약한 가문이었습니다.-----


 즉 당시 일본에서 나타나는 성하마을(城下町) 처럼 가신단이 영주의 성 아래 집단적으로 거주하여 점차 재지사회에서 분리되고 다이묘의 가신단에 대한 지배가 강화되었던 것과 달리 시마즈 가문의 경우 가신단의 재지성(在地性)이 보다 견고하고 다이묘의 지배력도 상대적으로 취약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전 연재글에서 분국법을 제정한 가문과 달리 전쟁으로 새로운 영지를 나누어줌으로서 가신들을 만족시킨 가장 대표적인 가문이 시마즈 가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신 내실이 영 형편없었죠.


 시마즈 가문은 규슈의 광대한 지역을 장악했지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지배를 강화해온 3개 쿠니 이외의 지역에서는 각 지역의 재지무사들인 고쿠진(国人)들이 명확한 주종관계라기 보다는 시마즈씨를 맹주로 추대하는 완만한 군사적 맹약관계로서 가신단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수준이었으며, 시마즈 가문과 맞서 싸우던 오토모 가문 역시도 마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슈 지방의 잇키나 구노헤 마사자네(九戸政実)의 난도 유사한 문제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오슈 지방에서는 다이묘가 다양한 일족과 지연으로 얽혀있는 재지무사들을 확고하게 지배하고 있지 못했고, 히데요시가 이러한 복잡한 구조를 쾌도난마로 결정해버린 것을 재지무사들이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킵니다.


 도요토미정권부터 에도막부에 이르기까지 통일정권은 여전히 중세 일본 특유의 중층적이고 복잡한 지배질서가 잔존해있는 재지사회의 질서를 파괴하게 됩니다.




다이묘의 지배력을 강화시켜주는 통일정권


 중세 일본사회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던 재지무사들은 전국시대에 고쿠진(国人)으로 통칭됩니다. 고쿠진들은 영지의 농민들에게 조세를 거두는 지행(知行)의 권한은 단순히 조세의 수취권이 아니라 농민에 대한 지배의 기반이었습니다. 


 센고쿠다이묘들은 이러한 고쿠진들의 농민에 대한 직접지배관계를 어떻게든 해소하기 위해 고쿠진들을 성하마을에 집주시키고 토지조사(検地)를 통해 실질적으로 농민을 다이묘의 직접지배하에 넣고자 노력했습니다. 


 전국시대는 이러한 다이묘의 지배질서 강화가 진행되는 과도기적 단계였죠. 기존 연재글에서 소개한 분국법(分国法) 역시 이러한 수단 중 하나였습니다. 분국법(分国法)을 도입하지 않은 가문들에서도 비슷한 기조가 나타났습니다. 



----전국시대에 시작된 이 메야스바코(目安箱)는 이후 에도막부 시기에도 도입되어 쇼군이나 각 번의 다이묘에게 직소할 수 있는 우리로 치면 신문고 같은 제도입니다.-----


 예를 들어 호죠가문은 1550년부터 메야스(目安)라는 소송제도를 도입했는데, 호죠씨의 영지에서 메야스바코(目安箱)를 설치하고, 호_소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소송장(訴状)을 넣어서 각 지역의 영주들을 거치지 않고 직접 호죠 가문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는 호죠 가문의 각 지역을 지배하는 가문이나 지성주(支城主)를 거치지 않고 호죠 가문에 호_소할 수 있게 함으로서 촌락간에 불필요한 분쟁을 막고, 호죠가문의 지배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전국시대에 자력구제로 인한 무력분쟁이 타파되지 못한 이유는 공권력으로서의 다이묘의 지배질서가 완전하지 않고 재지무사인 고쿠진(国人)들의 중층적인 지배가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연재글에서 반복해서 설명한 것처럼, 지역구성원들이 동의할 수 있는 단일한 공권력이 아니라 다수의 권력이 얽혀있어 복잡한 구조에서는 분쟁의 중재가 어려워지고 자신의 실력과 사적인 친소관계를 통해 분쟁이 에스컬레이션되기 쉽습니다. 이 구조가 파괴되고 일원적 지배질서가 성립되어야만 자력구제사회가 타파될 수 있는거죠.


 일본의 통일정권의 정책들은 이러한 고쿠진(国人)의 재지지배를 보다 완전히 파괴해 나갑니다. 이는 다이묘들의 지배력을 강화시키게 만들죠.



----도요토미 정권의 토지조사(検地)는 실측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 이전의 다이묘들의 토지조사는 가신들의 보고에 의존해 상대적으로 불완전했다.----


 도요토미정권은 전국적으로 토지조사(検地)를 통해 재지성이 강했던 고쿠진(国人)들의 재지연계에 큰 타격을 입히게 됩니다. 다이묘들에게 부과할 군역을 명확하게 하기 위한 토지조사는 다이묘들의 직할령을 늘이는 역할도 하게 되죠.


 임진왜란 당시인 1594년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보고한 기록에 따르면 시마즈 가문이 파병한 규모는 3천 30명에 불과했는데, 원래 부과된 군역인 1만명(20만석 기준)에 비해서 매우 부족한 수준이었습니다. 


 이는 시마즈 가문의 직할령이 협소하고, 실질적으로 가문의 영지에 대한 지배력, 토지에 대한 파악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이시다 미츠나리는 시마즈 가문에 대한 토지조사를 1594년 9월부터 1595년 2월까지 실행합니다. 


 그 결과는 놀라웠는데, 22만 5천석으로 추정되던 시마즈 가문의 석고는 55만 9533석으로 2배로 증가합니다. 증가한 석고 중 각 10만석이 요시히사, 요시히로 형제에게 주어져 시마즈가문의 직할령은 대폭 증가하게 됩니다.


 시마즈 가문의 가신단에 대한 지배가 상당히 불완전했었다는걸 보여주죠.


 이 토지조사 결과 시마즈 가문의 가신단들은 대부분 조상 대대로 내려온 토지로부터 다른 지역으로 영지를 이전하게 됩니다. 이는 가신단이 재지사회에 가졌던 권력을 박탈하고 시마즈 가문의 권력을 강화시키게 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토지조사는 여전히 중세적 성격이 남아있던 다이묘-가신단의 관계를 보다 근세적인 관계로 전환시키는데 중대한 역할을 했습니다. 무사들은 재지성을 점차 잃으면서 지역의 유일한 권력인 다이묘의 가신단으로서 보다 완전히 편입되는거죠.


 이 뿐만이 아닙니다.


 도요토미 정권이나 이후의 에도막부에서 진행한 영지를 상실하는 개역(改易)이나 영지를 통째로 이전하는 전봉(轉封)은 물론 당사자들에게는 끔찍한 일이었겠지만, 토지조사를 통해서 진행되는 다이묘의 지배질서 강화를 촉진하는 강력한 수단이었습니다. 


 중세 일본에서 지역의 지방관인 고쿠시(国司)나 군사책임자인 슈고(守護)가 교체되는 건 재지무사들하고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재지사회에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면 그뿐입니다.


 하지만 통일정권 하에서 다이묘가 내부의 분란을 일으킨다거나, 통치상의 문제가 발발하거나, 가문의 대가 끊겨서 개역(改易)당한다거나 전봉(轉封) 조치를 받을 경우 가신단은 모두가 영지나 봉록을 상실하고 낭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근세 다이묘와 가신단은 이제 보다 영속적이고 관료제적인 주종관계를 성립하며 공동운명체로서의 성격이 강해집니다. 통일정권의 정책은 중세사회와 달리 보다 안정적이고 일원적인 지배질서를 지역사회에 구축하게 됩니다.


 불완전했던 센고쿠 다이묘의 지배력은 역설적으로 그들을 제압한 통일정권에 의해 강화되어 근세다이묘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이는 자력구제를 타파할 수 있는 공권력을 지방에 구축하게 만들었습니다.


 막번체제가 성립하는거죠.




에도막부는 기존의 막부들보다 중앙집권적인가?


 어떤 사람들은 막번체제를 성립시킨 에도막부가 광대한 직할령을 보유하고 다이묘들에 비해 우월한 실력으로 개역을 시킨다거나 참근교대를 강요하는등 마치 중앙집권적 권력이 성립된 것처럼 오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에도막부는 그 이전에 중세일본사회에서 존재했던 중앙권력인 가마쿠라막부나 무로마치막부와 비교할 때 자체적인 실력의 우위가 더 명확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중앙집권적인 건 아니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는 규슈나 교토에 단다이(探題)라는 지방통치기구를 설치하고, 호죠 일족을 지역 무사들의 지휘관인 슈고(守護) 직위를 가능한 독점하였으며, 지방의 무사들과 직접적인 주종관계를 맺어 지방에 대해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습니다.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는 가마쿠라 막부에 비해 지방의 슈고(守護)들에게 보다 많은 사법, 행정, 군사권한을 위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로마치 막부 역시 슈고를 통하지 않고  지방의 재지무사들과 직접적으로 주종관계를 맺을 뿐 아니라 슈고의 지방통치 권한을 제한하고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투사하고자 했습니다.


 반면 에도막부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다이묘의 영국(領国)에서의 가신단에 대한 지배력을 오히려 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쇼군의 가신인 다이묘(大名)의 가신, 즉 가신의 가신인 배신(陪臣)과 직접적인 주종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즉 다이묘의 지배력을 훼손하고 가신단을 포섭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거죠.


 물론 에도막부는 다이묘들이 막부가 결정한 법도를 위반할 경우, 제재를 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에도막부가 다이묘들의 지방통치에 일일히 개입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에도막부는 초기에 무가제법도를 비롯한 막부의 정책이 다이묘들에게 잘 준수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순견사(巡見使)를 파견해 감찰을 실시, 악한 정치(悪政)를 한 경우 처벌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막부는 다이묘들의 통치에 과도한 개입을 삼가는 편이었습니다. 


 에도막부는 일반적인 중앙집권국가의 정부와 달리, 다이묘의 사법, 행정권에 개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이묘에게서 조세도 수취하지 않았습니다. 아게마이(上米)라고 해서 다이묘의 석고(石高)의 일부를 징수하거나, 덴가부신(天下普請)이라 해서 다이묘에게 특정 지역의 토목공사를 부담하게 하는 일은 있었으나, 대부분 제도화되어 반복되는 조세수취가 아닌 비정기적인 사건에 불과했습니다.


 막부와 다이묘는 주종관계로서 군역(軍役) 동원의 의무를 가지고 있었고, 다이묘의 참근교대 역시 군역의 일환이었습니다. 다이묘는 군역봉사의 의무를 지고 막부의 권력에 복종하는 대신 자신의 영지와 가신단에 대한 독자적인 사법, 행정, 조세권한을 보유하고 이에 대해 막부는 침해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도요토미 정권과 에도막부의 중요한 차이점이기도 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시마즈 가문을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시마즈 가문의 중신인 이주인 타다무네(伊集院忠棟)에게 8만석의 영지를 가봉해주고 직신(直臣)으로 삼아 시마즈 가문 내의 친도요토미 파벌을 형성합니다. 


 시마즈 가문은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인지하고, 히데요시 사후에 시마즈 요시히로의 아들이자 가문의 후계자인 시마즈 다다쓰네는 이주인 타다무네를 암살하고 이주인 가문이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도 터지죠. 


 도쿠가와 가문도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복속되는 과정에서 가신인 이시카와 가즈마사(石川数正)가 히데요시의 가신단으로 포섭됩니다. 또한 오토모 가문에서는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류조지 가문에서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난부 가문에서는 츠가루 타메노부(津軽為信), 모리 가문에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를 히데요시가 독립시켜 자신의 가신이자 독립 다이묘로 만들기도 합니다. 


 도요토미 정권은 이전의 막부들과 유사하게 통일과정에서 다이묘의 지배력을 강화시키기는 했지만 동시에 그들의 역량을 약화시키고 정권의 영향력 강화를 위해 가신단에 침투합니다. 이런 양상은 전국시대 센고쿠 다이묘들이 독자적인 가신단을 가진 영주들을 지배력 하에 두기 위해서 취하는 통제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에도막부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대규모 개역(改易) 때문에 오해받고 있지만 다이묘들의 가신단에 직접 접촉해 주종관계를 맺거나 다이묘들의 영국에 직접 영향력을 침투시키는 양상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제 막 통일을 완수한 과도기적인 도요토미 정권과, 보다 안정적으로 통일을 완수하는데 성공한 에도막부의 차이였던걸까요?




에도막부, 봉건적 연방제국가를 건설하다.


 만약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이후의 쇼군들이 기존의 막부들처럼 다이묘들의 영국지배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면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 이후의 에도막부 지배의 안정화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자력구제 타파를 위한 지역의 공권력 정착 역시 쉽지 않은 일이 되었겠죠. 중앙권력인 막부에 포섭된 가신과 다이묘에게 충성하는 가신간의 분쟁이 증가하고 다이묘들 역시 막부에게 복종하지 않고 저항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에도막부는 오히려 다이묘들의 지배권을 강화시켜주고 기존의 다이묘들의 가신단 내에 존재하던 재지영주(在地領主)의 지방지행(地方知行), 즉 영지에 대한 사법, 행정, 군사적 지배력을 타파해 다이묘가 이 권한을 독점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이로 인해 재지영주는 관료적 가신으로 흡수됨으로서 다이묘에게 권력이 집중화되게 되죠. 에도막부는 다이묘들이 전국시대와 달리 보다 안정적으로 가신단의 충성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에도막부의 쇼군별로 개역된 다이묘들의 수, 초기 이후로 개역사례는 빠르게 감소할 뿐더러 꼭 도자마다이묘들만이 표적인 것도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막부의 개역(改易)은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의 에도막부의 정권장악 과정에서 일어난 사례들을 제외하면 꼭 도자마다이묘(外様大名), 막부와의 연계가 크지 않은 이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었고 도쿠가와 일족이나 후다이(譜代), 즉 도쿠가와 가신단 출신의 다이묘(大名)들의 비중도 적지 않았습니다.


 막부는 결과적으로 극단적인 내정실패, 예를 들어 시마바라의 난과 같은 사태(一揆)를 야기한 경우나, 다이묘 가문의 대가 끊어지는 경우, 다이묘의 상속 과정에서 가문 및 가신단 내의 분쟁(御家騒動)이 심화되는 경우 개역(改易)을 실시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막부가 맘에 들지 않는 다이묘들을 제거하는 과정이 아니라 안정적인 막번체제를 정착시켜나가는 과정에 가까웠죠. 


 예를 들어 에도시대 초기에 일어난 다이묘 가문 내의 내부분쟁인 어가소동(御家騒動)의 경우 대부분 다이묘에 의한 근세적 지배질서가 정착되어 다이묘의 권력이 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다이묘의 상속과정에서 일족과 가신단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중세적인 의식이 여전히 존재하는 가신단과 다이묘 사이의 세력투쟁이 여전히 에도시대 초기에 존재했기 때문이죠. 


 막부는 이러한 사태에서 기회만 되면 다이묘들의 영지를 회수하려고 획책하지 않았습니다. 막부는 자신의 일족이나 대대로 가신인 이들 뿐만 아니라 도자마 다이묘들 역시 가문을 안정적으로 상속하여 통치가 이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거나 개입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18세기에 들어서면 보다 두드러집니다. 한국의 일본 근세사 연구자 양익모는 그의 연구들에서 에도막부의 개역(改易) 사례들을 조사하면서 에도막부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다이묘에 대한 통제보다는 다이묘가의 안정적 존속을 목표로 했다고 설명합니다. 

 

 에도막부와 다이묘는 중세 일본의 불안정하고 복잡한 지배질서를 타파하고 일원적인 지배질서를 지방에 구축함으로서 안정적인 평화와 자력구제의 타파를 가능하게 하는 근세 사회를 구축하는 동반자였습니다. 


 에도막부는 중앙집권국가가 아니라, 가신인 다이묘들에게 독자적인 사법, 행정, 조세의 권한을 허용하고 그들의 통치를 지원함으로서 근세 일본의 봉건적 연방제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중세 일본의 수백년간의 자력구제 사회는 우리 한국사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방식으로 타파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일본에서는 중앙집권화가 아니라 연방제, 즉 지방분권화를 통해서 자력구제를 타파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요?




중세-근세 일본은 동질적인 지배집단을 형성하지 못했다.


 에도시대의 일본은 난세가 종식되었으나, 중세 일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국가로서 동질적인 지배집단을 형성하지는 못했습니다. 무사들은 막부나 각각의 다이묘들과 주종관계를 맺고 해당 지역에 다이묘와 가신단이라는 이익을 공유하는 각각의 지배집단을 형성합니다.


 이론적으로 쇼군은 다이묘의 주군이므로, 다이묘의 가신은 쇼군의 배신(陪臣)의 관계를 가집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독자적인 지배체제를 가지는 다이묘의 가신단은 쇼군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습니다. 각각의 번(藩)의 가신단은 독자적인 이해관계와 공유이익을 가진 독립적인 지배집단을 형성하죠.


 물론 동시기 중국이나 한국에서도 지연이나 혈연을 통해서 나름의 이익을 공유하는 지배층간의 연계or꽌시가 존재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의 국가단위에서 거시적인 이익을 공유하면서 향촌사회 뿐만 아니라 중앙으로 진출하는 동질적 지배집단, 예를 들어 사족(士族)이나 신사(紳士)등으로 통칭되는 지배집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게 중세 일본과 중세 한국, 중국과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중세 일본에서 지방의 재지유력자는 중앙권력과 명목적인 주종관계를 맺지만 그 관계는 견고하지 않으며, 중앙권력인 천황, 막부, 공가(公家), 무가(武家)들과의 관계는 쌍무적인 계약관계에 가깝습니다.


 재지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지무사들은 수백년의 시간동안 중앙과의 연계는 약화되고 재지성(在地性)은 강화됩니다. 각 지역을 의미하는 율령국(国) 단위에서 혈연과 지연으로 얽혀 중앙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과 괴리된 복잡다단한 이익집단을 형성합니다. 


 이를 통제하기 위해 가마쿠라 막부나 무로마치 막부가 파견하거나 임명한 지토(地頭)와 같은 무사들은 2~3대만 지나면 재지무사들과 거의 다를바 없는 재지세력으로 전환되고 주군인 막부와의 연계는 빠르게 약화되죠.


 시마즈가문의 시조인 시마즈 타다히사(島津忠久) 역시 남큐슈의 시마즈 장원(島津荘)의 지토로 임명되어 처음에는 가마쿠라에 거주하는 막부의 고케닌이었지만 3대째 남큐슈로 하향해 얼마 안되어 재지세력화, 결국 시마즈 가문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중앙집권적인 지방통제를 시도했던 가마쿠라 막부나 겐무신정이 실패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기본적으로 중앙집권적 지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무력의 우위가 아니라 재지사회의 지배층이 하나의 국가의 동질적 집단을 형성하고 공유하는 이익이 존재해야 하며, 그 지배집단이 중앙권력의 지배에 동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중앙권력이 재지사회를 압도적 우위로 단기간에 파괴할 수는 있어도 이를 직접적으로 통제하는건 지배연합이 형성되어야 가능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지배를 위해 파견한 무사들이 재지무사가 되버린다면 중앙권력의 지방통제 붕괴는 필연이겠죠.



----1664년경 에도시대 막번체제의 다이묘 배치----


 에도막부는 무리하게 이런 구조를 바꾸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이묘들에게 영국의 지배권한을 위임하고, 무리한 직접적 통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지배층을 하나의 단일하고 동질적인 지배연합으로 묶는 불가능한 일을 하려 하지 않고, 각 영국별로 이익을 공유하는 다이묘-가신단의 봉건적 지배연합을 만들어내는 것을 인정하고 지원합니다.  중앙집권이 아니라 지역별로 쪼개진 지방분권을 통해 지역에 안정적 지배질서를 정착시키는 거죠. 


 막부는 천령(天領)이라 불리는 약 400만석에 달하는 직할령을 보유해 에도시대 초기 일본 전체석고 2200만석의 1/5을 차지했습니다. 이러한 실력우위를 기반으로 다이묘들의 상호충돌을 제어하고 안정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죠. 


 일본이 지역별로, 모시는 가문별로 쪼개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로서 동질적이며, 이익을 공유하는 지배층을 형성하는건 메이지유신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대체 일본 역사의 어떤 사건이, 어떤 요인이 중세 일본 사회가 동질적인 지배집단을 구축하지 못하게 만들고, 이로 인해서 수백년간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아래로부터 위까지 다들 무력행사를 거리끼지 않도록 만들게 했던 걸까요?


 그리고 중세 한국, 고려는 일본과 달리 어떻게 지배연합을 형성하였기에 자력구제 사회로 이어지지 않고 중앙집권화된 사회체제를 발전시켜나갈 수 있었던 걸까요?



참고자료

村井良介, "戦国期の大名分国における「戦国領主」の研究"

谷 徹也, "近世成立期の統治構造"

桐山浩一, "島津氏の財政構造と豊臣政権"

大山智美, "戦国大名島津氏の領国支配と権力構造"

양익모, "에도막부 다이묘의 가독 상속 기준의 변화"

양익모, "근세 다이묘가의 재흥으로 본 막번관계"

https://blog.naver.com/kduncan/122830120

https://blog.naver.com/kduncan/221972808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