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언어의 종주국이 강대국이라면 그 언어가 패권(覇權)을 쥐기 쉬운 조건이 되지만 '반드시'는 아님. 서로마가 무너지고도 거의 천 년 가까이 유럽에선 라틴어가 패권언어였지. 


어떤 언어가 패권을 잡으려면 단순한 일상생활만이 아니라 전문적이고 복잡한 개념까지 표현하는 어휘들이 제대로 있는가, 표준적인 문법이 있는가, 문화적인 역량이 쌓였는가 같은 요소들도 함께 작용해. 


그리고 한번 패권언어가 되면 그 언어로 많은 자료들이 쌓이기 때문에, 해당 언어의 종주국이 멸망하더라도 한동안 그 패권이 지속됨. 그래서 라틴어가 서유럽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패권언어였지. 


현대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영어가 패권언어, 그것도 전무후무한 패권언어임. 인류역사상 이 정도로 강력하게 패권을 잡은 언어는 존재한 적이 없었어. 물론 영어가 패권언어가 된 가장 강력한 요인은 세계최강대국 미국의 언어란 점이야.


하지만 말도 안 되는 가정을 해보자. 


내일 당장 미국이 갑자기 세계 최빈국 수준으로 몰락해버린다면,

영어도 덩달아 패권을 내려놓고 피래미 같은 쩌리 언어가 될까? 


절대 그럴 리가 없음. 영어가 패권언어가 된 이래로 영어로 축적된 자료들은 엄청나. 영어로 제작된 논문, 학술서적은 물론이고, 소설책, 영화, 드라마 등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엄청난 자료가 축적되었어.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한문으로 쓴 불교 논문이 영어로 번역된 것을 보고 ㅎㄷㄷ했다. 


이런 자료들까지 함께 날아가버리지 않는 한, 영어로 축적된 자료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설령 내일 당장 미국이 몰락해버린다고 해도 여전히 영어는 꽤나 오랫동안 패권언어로 작동할 게 분명해. 



영어는 전지구적 패권언어지만, 지역 패권언어도 존재함. 러시아어는 슬라브권의 패권언어야. 슬라브권에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주장을 널리 알리고 싶으면 러시아어로 써서 퍼트림. 그러니까 당연히 슬라브 언어들 중에서 자료가 가장 많이 축적된 말은 단연코 러시아어임. 그리고 러시아어를 배운 사람도 많고 말이야. 따라서 러시아가 이대로 몰락한다고 해도, 한동안 슬라브어권의 '지역패권'은 여전히 러시아어가 쥐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