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 (Афанасій Іванович Середін-Сабатін)
사실 러시아 제국이 건재했을 때니 엄밀히 말하면 당시엔 러시아 사람이었음.
그는 1860년 우크라이나 폴타바주 루비니에서 태어남.
아들 표트르가 그에 대해 저술한 자서전에 따르면 14세에 삼촌을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했고, 거기서 아버지가 원양항해사가 되면서 그도 니콜라예프스키 해양전문학교를 다녔다고 함.
이후 페테르부르크 예술아카데미를 1년만 다니고 나머지는 독학으로 때웠다고 하는데, 공부를 잘하진 못한 걸로 보임.
나중에 주한 러시아 공사관에 조선의 러시아어 학교에 교사로 넣어달라는 편지도 썼는데 학력미달로 컷 당하기까지 했으니까.
1880년대초 그는 상하이에서 머물렀는데, 해운회사 항해사로 일했다는 주장과 건축 관련 기술 용역 회사에서 일했는 주장이 있음.
한편, 1883년 1월 22일, 묄렌도르프는 건축기술자를 구할 목적으로 청에 감. 이후 기술자를 찾는 일은 보좌인 하스에게 일임했는데, 이때 사바틴이 하스에게 발탁되면서 조선과 처음으로 연을 맺음.
1883년 9월, 사바틴은 인천해관에서 승감원 (tide waiter)로 근무함.
1885년 3월에서 5월 무렵, 그는 한양으로 가 경리영조직역 이라는 직을 맡아 경복궁 증건소에서 일하게 됨.
그가 한양으로 불려간 이유는 묄렌도르프의 후임 ㅇㅚ교고문인 미국인 오웬 데니가 그에게 신왕궁 증축을 지시했기 때문으로 추정됨.
1888년 3월 25일부터 1892년까지 사바틴은 경복궁 관문각 증축의 관리 감독을 맡음.
비슷한 시기에 러시아 공사관 설계 의뢰도 받은 걸로 추정되는데, 아관파천의 그곳 맞음.
이외에도 러시아 아치, 독립문, 돈덕전, 제물포구락부, 인천해관청사, 독일 영사관, 손탁호텔, 홈링거양행 등등이 사바틴의 작품이라는 추정이 있지만, 확실하게 증명된 건 관문각이랑 러시아 공사관밖에 없음.
그렇게 조선에서 건축가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던 1894년 6월, 사바틴은 뜬금없이 미국인 군사고문 윌리엄 다이와 함께 경복궁 시위대의 지휘관 직을 맡게됨.
경복궁 시위대는 경복궁 경비와 왕실 호위를 하는 부대인데 윌리엄 다이는 처음부터 군사고문이니 그렇다쳐도, 사바틴은 조선에서 군경력이 전혀 없는 외국인 건축가인데 갑자기 시위대 부대장 직을 맡게된 거임.
사실 이는 고종의 노림수로, 당시 일본 제국의 영향력이 왕실까지 미치자 이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일본군이 외국인은 함부로 하지 못할 거라는 계산으로 시위대 대장으로 세운 거라고 해석됨.
실제로 1894년 7월에 경복궁이 청일 전쟁 중에 일본군에게 함락당하기도 했으니까 고종의 우려가 어느정도 맞았던 셈임. 너무 늦었지만.
사바틴은 이후에도 다이와 함께 시위대 지휘관 직을 역임하는데, 덕분에 그는 1895년 을미사변을 직접 목격한 두 외국인 중 하나가 됨. 다른 하나는 당연히 윌리엄 다이였고.
사바틴은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껴 조선을 떠남.
이후 베이징에서 머물다가 톈진으로 갔고, 톈진에서 1898년까지 머문걸로 추정됨.
1899년 사바틴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인천에서 러시아 동청해상기선회사의 인천지점장으로 일함.
1902년엔 대한제국으로부터 3년간 강화도의 화강암 채굴권을 따냈다고도 하더라.
하지만 1904년, 러일전쟁이 터졌고, 사바틴은 다시 조선을 떠남. 아들 표트르에 따르면 조선을 떠나 우크라이나에서 몇 달 동안 살았음.
1905년 포츠머스 조약 체결 직후, 사바틴은 모종의 일을 얻어 가족 모두와 나가사키로 이주했다함.
1907년 사바틴은 신경쇠약으로 가족과 나가사키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고, 거기서 신문 기자로 37편의 기사를 기고한 것으로 추정됨.
이후 사바틴의 행적은 러시아 서부 지역으로 갔다는 사실 외에는 불분명한데, 1921년 로스토프 나도누 또는 볼고그라드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됨.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은 해관원, 건축가, 군부대 지휘관, 기자 등등 온갖 직업을 가지며 나름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음.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으며, 장자인 표트르는 인천 제물포에서 태어났었듬. 둘째 아들도 제물포에서 태어났지만 이질로 죽어 제물포에 묻힘. 사바틴 사후 남은 가족들은 미국으로 이주함.
지금도 멀게만 느껴지는데 구한말의 굵직굵직한 역사를 함께한 우크라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참 묘함.
쓰면서 두번이나 날아가 세번째 쓰는거라 문장이 좀 짧은 거 양해부탁함 씨발
사실 러시아 제국이 건재했을 때니 엄밀히 말하면 당시엔 러시아 사람이었음.
그는 1860년 우크라이나 폴타바주 루비니에서 태어남.
아들 표트르가 그에 대해 저술한 자서전에 따르면 14세에 삼촌을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했고, 거기서 아버지가 원양항해사가 되면서 그도 니콜라예프스키 해양전문학교를 다녔다고 함.
이후 페테르부르크 예술아카데미를 1년만 다니고 나머지는 독학으로 때웠다고 하는데, 공부를 잘하진 못한 걸로 보임.
나중에 주한 러시아 공사관에 조선의 러시아어 학교에 교사로 넣어달라는 편지도 썼는데 학력미달로 컷 당하기까지 했으니까.
1880년대초 그는 상하이에서 머물렀는데, 해운회사 항해사로 일했다는 주장과 건축 관련 기술 용역 회사에서 일했는 주장이 있음.
한편, 1883년 1월 22일, 묄렌도르프는 건축기술자를 구할 목적으로 청에 감. 이후 기술자를 찾는 일은 보좌인 하스에게 일임했는데, 이때 사바틴이 하스에게 발탁되면서 조선과 처음으로 연을 맺음.
1883년 9월, 사바틴은 인천해관에서 승감원 (tide waiter)로 근무함.
1885년 3월에서 5월 무렵, 그는 한양으로 가 경리영조직역 이라는 직을 맡아 경복궁 증건소에서 일하게 됨.
그가 한양으로 불려간 이유는 묄렌도르프의 후임 ㅇㅚ교고문인 미국인 오웬 데니가 그에게 신왕궁 증축을 지시했기 때문으로 추정됨.
1888년 3월 25일부터 1892년까지 사바틴은 경복궁 관문각 증축의 관리 감독을 맡음.
비슷한 시기에 러시아 공사관 설계 의뢰도 받은 걸로 추정되는데, 아관파천의 그곳 맞음.
이외에도 러시아 아치, 독립문, 돈덕전, 제물포구락부, 인천해관청사, 독일 영사관, 손탁호텔, 홈링거양행 등등이 사바틴의 작품이라는 추정이 있지만, 확실하게 증명된 건 관문각이랑 러시아 공사관밖에 없음.
그렇게 조선에서 건축가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던 1894년 6월, 사바틴은 뜬금없이 미국인 군사고문 윌리엄 다이와 함께 경복궁 시위대의 지휘관 직을 맡게됨.
경복궁 시위대는 경복궁 경비와 왕실 호위를 하는 부대인데 윌리엄 다이는 처음부터 군사고문이니 그렇다쳐도, 사바틴은 조선에서 군경력이 전혀 없는 외국인 건축가인데 갑자기 시위대 부대장 직을 맡게된 거임.
사실 이는 고종의 노림수로, 당시 일본 제국의 영향력이 왕실까지 미치자 이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일본군이 외국인은 함부로 하지 못할 거라는 계산으로 시위대 대장으로 세운 거라고 해석됨.
실제로 1894년 7월에 경복궁이 청일 전쟁 중에 일본군에게 함락당하기도 했으니까 고종의 우려가 어느정도 맞았던 셈임. 너무 늦었지만.
사바틴은 이후에도 다이와 함께 시위대 지휘관 직을 역임하는데, 덕분에 그는 1895년 을미사변을 직접 목격한 두 외국인 중 하나가 됨. 다른 하나는 당연히 윌리엄 다이였고.
사바틴은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껴 조선을 떠남.
이후 베이징에서 머물다가 톈진으로 갔고, 톈진에서 1898년까지 머문걸로 추정됨.
1899년 사바틴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인천에서 러시아 동청해상기선회사의 인천지점장으로 일함.
1902년엔 대한제국으로부터 3년간 강화도의 화강암 채굴권을 따냈다고도 하더라.
하지만 1904년, 러일전쟁이 터졌고, 사바틴은 다시 조선을 떠남. 아들 표트르에 따르면 조선을 떠나 우크라이나에서 몇 달 동안 살았음.
1905년 포츠머스 조약 체결 직후, 사바틴은 모종의 일을 얻어 가족 모두와 나가사키로 이주했다함.
1907년 사바틴은 신경쇠약으로 가족과 나가사키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고, 거기서 신문 기자로 37편의 기사를 기고한 것으로 추정됨.
이후 사바틴의 행적은 러시아 서부 지역으로 갔다는 사실 외에는 불분명한데, 1921년 로스토프 나도누 또는 볼고그라드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됨.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은 해관원, 건축가, 군부대 지휘관, 기자 등등 온갖 직업을 가지며 나름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음.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으며, 장자인 표트르는 인천 제물포에서 태어났었듬. 둘째 아들도 제물포에서 태어났지만 이질로 죽어 제물포에 묻힘. 사바틴 사후 남은 가족들은 미국으로 이주함.
지금도 멀게만 느껴지는데 구한말의 굵직굵직한 역사를 함께한 우크라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참 묘함.
쓰면서 두번이나 날아가 세번째 쓰는거라 문장이 좀 짧은 거 양해부탁함 씨발
글로벌하게 살았던 사람이네
윌리엄 다이가 그 미군출신 준장인가 그 양반인가
ㅇㅇ
옛날 폴란드판 토지도 그렇고 신기한 인연들이 많네
덕수궁 정관헌도 사바틴의 작품이라는 얘기가 있던데... 정관헌의 건축양식은 다소 서양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동양의 건물같은 느낌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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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에 따르면 석조전은 영국인 존 레지널드 하딩이 설계했다네. 게다가 1900년부터 공사가 이루어졌다니까 사바틴이 건축에 참여하기는 어려웠을 거임
ㄴ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에서 사바틴이 석조전 초기 감독관으로 참여했다고 하네. 근데 그 외의 다른 석조전 관련 논문들에서 사바틴이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설명이 없고 사바틴이 언급조차 안되는 것도 있어서
그리고 이시기의 사바틴의 건축 관련 활동이 불분명하기도 하고 사바틴이 1904년에 다시 조선을 떠나니까 그가 감독으로서 어떤 뚜렷한 활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음
그리고 사바틴이 왕실과 사이가 좋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거든.
근데 진짜 모르겠어서 그런데 저건 러시아 제국출신 러시아인이지 왜 우크라인임? 저번에도 비슷한말 하면서 시콜스키는 우크라이나인이라고 반쯤 발작하던놈도 있었는데, 러시아 제국이나 소련시기에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사람을 가지고 무조건 우크라이나인이다 하는게 이해가 안가서 그럼
일단 나도 너 말에 어느정도 동의하는게 일본 치하의 조선인들을 전부 일본인이라고 안 치는 것처럼, 나도 그 사람의 정체성에 따라 분류해야 한다고 봄. 그래서 두번째 줄에서도 언급한거고. 그리고 사실 제목은 어그로용임
사바찐을 우크라이나 출신이라곤 할 수 있어도 우크라이나 인이라고 하긴 뭣하지 않나 출신지가 오늘날 우크라이나 영토인 지역이어도 그거랑 별개로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나서 러시아 제국의 수도에서 성장하고 본인 일생동안의 주요한 활동도 현대의 우크라이나나 당시의 우크라이나 지역보다는 러시아 제국의 정책과 연관해서 이해되는 사람이잖음 활동과는 별개로 본인이 우크라이나를 특별히 의식했다는 기록이 따로 있는거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윗댓에서도 썼지만 제목은 어그로로 봐주셈
이새끼는 가는데마다 지옥보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