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을 보시지 않았다면, 먼저 보시고 나서 이 글을 보시는게 이해가 쉽고 더 재미있습니다.


 이전 글에서 통일신라의 폐쇄적인 왕경인(王京人) 중심의 지배체제를 파괴한 폐허 위에서 탄생한 보다 다원적이고 개방적인 고려사회에 대해서 소개했습니다. 


 신라와 달리 고려는 초기부터 과거제를 통해 지방의 재지유력자들을 중앙정권 내에 흡수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신라시대부터 이어져온 재지사회의 독립적인 성향은 고려가 재지유력자를 포섭한 광범위한 지배연합을 형성하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고려의 재지사회는 단숨에 고려라는 국가의 지배연합 내에 포섭되지 않았습니다. 그에 저항하기도 하고, 중세 일본처럼 지역간 무력분쟁을 일으키기도 했죠. 이런 자유분방하고 폭력적인 성격은 점진적으로 완화되어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변화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전근대 한반도의 지배층 "선비(士)"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고려는 중세 일본의 무사와 비슷해보이던 재지유력자들을 어떻게 우리가 알고 있는 선비의 모습으로 바꾸어나갔을까요?


 일반적으로 이러한 변모를 고려의 중앙집권화와 강력한 중앙군을 기반으로 독립적인 호족들에 대한 지방통치의 강화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신라도 한때 구서당(九誓幢)과 같은 강력한 중앙군을 갖추고 있었고, 군현제를 발전시키고 지방관을 파견해 상당한 수준으로 지방에 통치를 위임했던 고려에 비하면 오히려 지방통치가 직접적이고 강력했다는 걸 생각해보시면 이게 최선의 답안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결국 사고방식을 바꾸는건 힘과 강요가 아닌, 소프트파워입니다. 저는 교육, 특히 지방교육이야말로 고려가 한반도의 재지사회를 바꾸게 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신라의 지방교육의 취약성


 고려의 지방교육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이전까지 지방교육의 양상을 이해하는게 필요합니다. 신라의 지방교육에 대해 살펴봅시다.


 강수는 장성하면서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아 그 뜻과 이치를 훤히 깨달았다....

 마침내 스승을 찾아가 『효경(孝經)』, 『곡례(曲禮)』, 『이아(爾雅)』, 『문선(文選)』을 읽었다. 듣는 것은 비록 얕고 낮았으나, 얻는 것은 한층 높고 깊었다.

고려사 강수(强首) 열전


 이전 연재글에서 소개한 강수(强首)는 7세기 신라 사람으로 신라의 6부인 사량부의 왕경인으로서 현재의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중원경(中原京)에 거주한 사람입니다. 


 강수가 공부한 곳은 아마도 중원경에서 사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서라벌에 설치된 국학(國學)과 같은 공적 교육기관의 흔적을 지방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6~7세기 추정 김해시 봉황동 유적과 6세기 후반 이후로 추정되는 인천 계양산성 유적에서 논어(論語) 목간이 출토되어 신라시대에 지방에서도 유학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졌으리라 추측되고 있습니다. 


 다만 사교육이 이루어지더라도 신라는 왕경인의 호적에 등록되지 않은 이들의 관료로서의 출사가 불가능했고, 아마도 강수와 같이 지방에서 거주하는 왕경인 위주로 사교육이 진행된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왕경인이 아닌 재지유력자들의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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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41호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13.1m 높이. 절에 행사가 있을때 깃발을 걸어둔다.---


 고려시대 자료이지만 광종 13년(962년)에 건립된 충청북도 청주 용두사의 용두사 철당기(龍頭寺鐵幢記)에는 이 철당간을 만드는데 참여한 재지유력자의 관직으로 학원경(學院卿)과 학원낭중(學院郎中)이란 호칭이 나옵니다. 


 이는 나말여초 시기에 재지사회에 자체적인 교육기관으로 학원(學院)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하지만, 충분한 근거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재지사회의 불교사찰의 승려들이 지식인으로서 호족의 자제들에 대해 교육을 실시했을 가능성이 더 높겠죠.


 아마도 오랜 기간 왕경인이 아닌 재지유력자들은 강수와 달리 중앙정권의 관료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배층으로서 기본적인 소양을 쌓기 위한 사교육을 받는데 그쳤을 겁니다. 이후 고려, 조선의 선비들과 같이 열정적으로 공부했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이는 중세 일본의 지방교육과 유사했을 것입니다. 중세 일본의 재지무사들은 주로 사찰의 승려에게서 기본적인 교육을 받았습니다. 중세 초기의 일본 무사들은 가나(仮名)는 읽을 줄 알지만 한문(漢文)은 어려운 글자는 읽을 줄 모르는게 일반적이었죠. 어느 누구도 공부해서 조정이나 막부에 가서 출세하겠다는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중앙과 지방간의 이질성은 수도와 지방의 교육의 수준, 그 목적성 등의 격차에 의해 확대되었을 겁니다.


 물론 다 추측에 불과하다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려 초기의 사료들을 통해서 재지유력자들이 이런 교육에 대한 열정이 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려 초기 재지유력자들은 공부하기 싫어했다.


 광종의 조카이자 6대 고려왕인 성종(成宗)은 고려에 유학에 기반한 통치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시도한 인물입니다. 당시 중국의 제도를 정치체제에 도입하고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고자 했던 그의 정책을 중국풍,  화풍(華風)이라고 하죠. 


 성종의 시도는 거란의 침공과 그의  화풍(華風) 정책에 반대하고 고유의 풍속(土風)을 지키길 원하는 지배층의 반발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종은 그의 정책방향으로 고려가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씨앗을 뿌립니다. 바로 교육이죠.


 성종은 고려의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특히 재지유력자들의 자제들을 상경시켜 교육하는데 관심을 기울였죠.


 근데... 이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고려의 재지유력자들은 공부하길 싫어했거든요.


 짐(朕)이 평소에 덕이 부족함을 부끄러워하지만, 오히려 간절하게 유학(儒學)을 숭상하여,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학풍을 일으켜서 요(堯)·순(舜)과 같은 다스림에 이르기를 바랐노라.

 그랬기에 인재들을 학교[庠序]로 기르고 과거[科目]으로 뽑았다. 그런데 지금 여러 주(州)에서 올린 학사(學士)들 중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염려되니, 모두 편의에 따라 돌아가거나 계속 머물러 있기를 허락하노라.

 귀향[歸寧]을 원하는 학생 207명에게는 베 1,400필(匹)을 하사할 것이며, 남기를 원하는 학생 53명에게는 역시 복두(幞頭) 106매(枚)와 쌀 265석(石)을 하사하노라.

고려사, 성종 5년(986년) 7월


 성종은 집권 초기부터 재지유력자의 자제들을 상경시켜 교육시키는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260명에 달하는 학생들을 상경시켜 교육시켰는데 80%에 달하는 207명은 공부 하기 싫다고 집에 가고 싶다네요?


 고려의 중앙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은 992년(성종 11년)에 창설되지만 이미 태조 시기에 학교의 설치에 대한 내용이 있으므로 개경의 학교는 훨씬 그 이전에 존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성종은 지방 군현에서 자제들을 선발해서 개경에서 교육시키길 원했지만 호응이 별로였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만일 그 부모가 나라의 풍교(風敎)를 알지 못하고 가산(家産)을 경영(經營)하느라 다만 오늘 아침의 이익만 보고 다른 날의 영화를 생각하지 않은 채 이르기를, ‘배우고 익혀서 무엇을 하느냐? 책 읽는 것은 이로움이 없다.’고 하여 부모가 도리어 고생스레 공부[編柳]하는 것을 가로막고 오직 땔나무만 중요하다 한다면 그 자식은 이가 빠질 때까지 명성을 들을 수 없으며 그 부모 또한 영예로운 몸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고려사 성종 6년(987년) 8월


 이는 당시 재지유력자들이 그 자제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과거에 합격해 관료가 되는 것을 희망하기 보다는 재지사회에서 자신의 가산을 경영하는것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재글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재지성(在地性)이죠. 신라시대부터 이어진 재지유력자들의 사고방식에는 과거제도가 도입된 이후에도 수도로 상경해서 관료로 출세해야 겠다는 목적의식이 충분히 정착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재지성이야말로 고려시대 지역 자위공동체의 기반이었을 겁니다. 해당 지역의 유력자와 구성원들이 똘똘 뭉쳐 대대로 이어져온 자신의 고향을 지키는 원동력 말입니다. 


 요즈음 여러 주군현(州郡縣)의 자제(子弟)들을 널리 모아 개경(開京)에 와서 학업을 익히게 하였더니, 과연 바람을 타듯이 부름에 응하여 이르러와 강의하는 곳 안에 학도들이 자못 많아졌다.

 그들이 대부분 집을 떠나 먼 길을 와서 객이 된 지 오래되어 공부하려는 뜻은 산과 같이 게을러지고 도리어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흙을 품은 듯 깊어만 간다. 고향을 떠나 외로운 처지를 가엽게 여겨 유시(諭示)하는 말을 내리니, 머물기를 바라는 자는 뜻대로 개경에 머물고 물러가기를 구하는 자는 부모님 계신 고향으로 돌아감을 허락한다. 각자에게 선물을 내려줄 것이니 물러갈지 말지를 정하도록 하라....

고려사 성종 6년(98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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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의 80%가 고향으로 돌아간 다음해인 987년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학생들 때문에 성종은 집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이는 돌아가라고 재차 허락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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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근성가이 성종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집이 그립다고!! 오케이! 그럼 집 근처에서 공부하게 해줄께!

 

이제 경서에 통달하고 책을 두루 읽은 선비와 온고지신(溫故知新)하는 무리들을 뽑아 12목(牧)에 각각 경학박사(經學博士) 1명과 의학박사(醫學博士) 1명을 차견(差遣)할 것이다. 그들이 부지런히 행하여 잘 이끌고 여러 학도들을 잘 교육시키면 반드시 그 공적의 깊고 옅음을 헤아려 순서를 뛰어넘어 관직에 발탁하는 영예로 장려할 것이다. 여러 주군현의 장리(長吏)나 백성들 가운데 가르치고 배울 만한 재주 있는 아이가 있는 자들은 이에 응해 마땅히 선생으로부터 열심히 수업을 받도록 가르치고 경계해야 한다.  

 고려사 성종 6년(987년) 8월


 해당 관청에 명을 내리니 서로 좋은 땅을 얻어 널리 학사(學舍)를 세우고 전장(田庄)을 헤아려 나누어 주어, 그들에게 금을 단련하여 참되게 하고 옥을 갈아 그릇을 갈듯이 하도록 하라. 무릇 여러 유신(儒臣)은 바라건대 나의 뜻을 알아야 한다.” 라고 하였다.

고려사 성종 11년(992년) 12월, 각지에 학교의 설립을 지시하는 교서를 내리다


 성종은 지방에 설치한 지방관청인 12목(牧)에 교육자들을 파견해 재지유력자의 자제들을 교육시킬 것을 명령합니다. 지방통치가 제대로 정착하기도 전에 지방교육부터 시작되는 셈이죠.


 성종이 지방교육에 가진 열정이 그 이전 한국사의 어떤 국왕보다 뜨거웠음을 느끼게 해주지 않습니까?


 고려왕조는 단순히 지방을 피지배 대상으로만 본게 아니라 지배층으로 포섭해나갈 대상으로 봤습니다. 지방교육의 강화는 성종 이후에도 꾸준히 진행되어, 12목과 같은 계수관(界首官, 소속되는 여러 군현을 관활하는 지방관청) 뿐만 아니라 보다 소규모 군현으로 확대됩니다. 


 바로 향교(鄕校)의 건립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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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교동향교, 현존 기록상 최초의 향교라고도 합니다.---


 강화(江華), 교동(喬桐), 부평(富平), 김포(金浦), 통진(通津), 장단(長湍), 영변(寧邊) 등의 7개 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에 창건하였고, 원주(原州), 단성(丹城), 강계(江界), 이산(理山) 등의 4개 향교 역시 인종대에 건설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지방교육시설의 건립 방향성은 무신정권 시기에도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암(馬巖)에서 빈우(賓友)를 모아놓고 크게 취하여 밤에 돌아와 본 것을 기록하여 향교(鄕校) 제군에게 주다.


 12월에 보안현(保安縣) 진사(進士) 이한재(李翰材)의 집에 옮겼는데 향교(鄕校)의 제생이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므로 이를 사례하며 석상에서 지음.

이규보, 동국이상국전집.


경진년 봄에 나아가서 백령진장(白翎鎭將)이 되었는데, 청렴하고 공평하게 고을을 다스렸다. 그 고을에는 예부터 향교(鄕校)가 없었는데 이군이 처음으로 창건하고 아전들의 자제를 모아 글을 가르치니, 몇 해 안 가서 모두 인재를 이루었으며, 공거(貢擧)에 응시한 자까지 있게 되매, 온 고을이 그를 사모하였으며, 여러 번 글을 올려서 그의 아름다움을 포장하였다.

이규보, 동국이상국후집, 잡저(雜著), 이세화 묘지명


 이규보(李奎報, 1169~1241년)가 고향인 경기도 여주(驪州)에 내려와 있을 때 향교의 교사 및 학생들과 어울린 기록이나 전라도 부안에 파견되었을때 향교의 학생들과 술을 마신 기록은 지방 곳곳에 향교가 설치되고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세화(李世華, ?~1238년) 묘지명은 그가 현재 인천 백령도의 진장(鎭將)으로 있을 때 이 작은 섬에도 향교를 만들어서 지방관으로서 직접 향리들의 자제를 가르치고 과거에 응시하게 하기까지 했음을 보여주죠.


 아아! 품고 있는 재능과 안고 있는 그릇으로 임금을 섬김은 곧 충성의 시작이며, 입신양명(立身揚名)으로써 부모를 드러냄은 효의 끝이니 충효로 칭송받을 만하다면 총애와 영화를 어찌 아끼겠는가? 오늘 이후로부터 만약 어려운 중에서 공부[螢窓]에 힘쓰며 뜻을 두는 이, 학교[鱣肆]에서 경서를 열심히 공부하는 이, 효도와 우애로 소문이 난 이, 의술이 쓸 만한 이가 있거든 해당 지역의 목재(牧宰)·지주(知州)·현관(縣官)들은 모두 갖추어 기록하여 개경(京師)에 천거해 올리라.

고려사 성종 6년(987년) 8월



 성종의 중앙집권화 정책은 기득권층의 반발로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가 재지사회에 뿌린 씨앗들은 이후 고려왕조와 심지어 무신정권 치하에서도 계승되어 고려사회에 공부해서 관료로 나아가는 것을 꿈꾸는 유학의 나라를 만들어나갑니다. 


 향교의 설치는 고려가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가 지방교육의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의미입니다.


 기존의 정체가 모호한 지방교육이 지배층이 최소한의 교양을 쌓기 위한 사교육으로 이루어진다면 이제 지방교육의 방향성은 성종이 교육을 장려하는 교서에서 밝힌 바처럼 고려 조정에서 일할 인재를 육성하는 공교육의 성격이 강해집니다. 


 이제 향리자제들은 박사(博士)나 지방관, 지방의 하급관료인 사록(司錄)등에게 교육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과거를 통한 신분상승을 지향하는 선비(士)가 될 것을 주입받게 되기 시작하는거죠.


 한반도의 재지유력자가 호족(豪族)이 아닌 사족(士族)으로 전환되는 첫걸음이었습니다.


 그 선조는 본래 영가군(永嘉郡) 사람이다【지금 안동부(安東府)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호장(戶長) 권한렴(權漢廉)이고, 할아버지는 호장 권융(權融)이며, 아버지는 호장동정(戶長同正)이자 호장정조(戶長正朝)로 추봉된 권경(權璟)인데, 모두 선행과 덕을 쌓아서 대대로 명성이 전해졌다.

 군은 어려서부터 뜻을 지키는 데 무리 중에서 뛰어났다. 자라서 자립하여서 향리(鄕吏)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나이 20세가 되기 전에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권정평묘지명(權正平墓誌銘 1085~1160년) 


 12세기에 대대로 경상도 안동 지방에서 호장직을 세습해온 안동권씨 가문의 권정평은 향리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樊恥爲鄕吏) 향시에 응시한 다음 개경에 상경해서 공부하기를 10년, 과거에 합격해 관료가 되는데 성공합니다. 


 고려왕조의 교육정책은 지방의 향리층 자제가 대대로 이어지는 가업을 계승하기보다는 상경하여 사대부가 되는 것을 꿈꾸도록 만듭니다. 호장(戶長)이 최고위 향리직이라는걸 생각하면 재지유력자의 사고방식을 상당히 효과적으로 전환시켰음을 알 수 있죠.


 이런 변화는 고려왕조의 지방관 파견과 지방통치 강화정책과 병행하여 이루어집니다. 점차 조금씩 지방을 실질적으로 지배해온 호족(豪族)은 향리(鄕吏)로 전환되어 실질적인 영향력이 약화될 뿐만 아니라 선비(士)보다 하층계급으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관료가 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는 것만으로 이러한 사고의 전환이 가능해졌다고 보는건 너무 순진한 생각입니다. 재지유력자가 관료가 되는건 확률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니까요. 


 고려사 백관지에 따르면 고려 전기인 11세기 문종 시기를 기준으로 문관의 수는 532명, 무관의 수는 3,867명으로 모두 합해 4,399명이라고 합니다. 


 고려왕조의 역사 전기간을 걸쳐 진행된 과거는 1회 평균 25.3인의 합격자가 존재했으며, 연평균 14.6인에 불과했습니다. 문관의 수가 500여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과거의 최종합격자의 수는 제한될 수밖에 없고, 합격하더라도 실제 관료로 임용되지 못하고 산직(散職)이라고 해서 토지만 지급되고 실제 업무는 없이 대기해야 할 수도 있었죠.


 게다가 지방의 과거응시자는 보다 부유하고,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배경도 좋은 개경 거주 사족들과 경쟁해야 했고 고려-조선 통틀어 항상 서울에 거주하는 이들의 합격률이 대체로 높은 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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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도 지역별 서울대 진학 현황, 서울 편중은 현재보다 고려, 조선시대에 더 심했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에 대한 지역별 통계에 따르면 서울 거주자의 비중은 전체의 45.93%에 달합니다. 서울의 인구는 전체 인구의 2.55%에 불과한데도 말입니다. 개경, 한양 학군은 강남 8학군 따위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는거죠.


 이는 과거제도가 재지유력자의 유입을 허용하긴 하지만 관료가 되는건 매우 어려운 일이란 이야깁니다. 고려와 조선의 과거제도는 기득권층인 재경사족이 관직을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 독점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지역할당제가 최종합격에도 영향을 미쳤던 중국의 과거제도와 다른 점이죠.


 즉 최종적으로 중앙정권에 합류한다는 메리트는 재지사회의 대부분의 유력자들에게 어필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바늘구멍같은 과거 합격을 통과하지 못할 절대다수의 재지유력자들을 어떻게 과거공부를 하는 선비들이 되도록 유인할 수 있었을까요?




고려 과거제에서 진사(進士)와 향공진사(鄕貢進士)


 초기 고려의 과거제에서는 관료가 되기 위해서 최종 시험만 통과하면 되는 단순한 구조였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점차 제도가 발전하면서 고려의 과거제도는 큰 틀에서 3가지 단계로 진행됩니다. 


 먼저 조선의 초시(初試)에 해당하는 시험으로 서경(西京)이나 지방의 주요 관청소재지인 계수관(界首官)에서 시험을 진행합니다. 개경에서도 유사한 시험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서는 개경에서 이 시험을 통과한 이를 토공(土貢)이라고 하고 지방에서 뽑힌 이를 향공(鄕貢)이라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시험에 통과한 사람들은 개경의 국자감(國子監)에서 치르는 예비고사인 국자감시를 치를 자격을 얻습니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여기서 400명을 선발했다고 합니다.


 국자감시를 통과한 이들은 관료가 되는 최종 시험인 예부시(禮部試, 또는 東堂試)를 치릅니다. 여기에 합격한 극히 소수의 인원들이 관료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이 바로 지방에서 진행되는 1차 시험인 계수관시(界首官試, 또는 鄕試)와 2차 시험인 국자감시(國子監試)입니다.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한 이는 실질적인 지배층으로서의 선비(士)의 자격을 인정받아 진사(進士)가 되며, 예부시에 응시할 자격이 계속 유지됩니다. 또한 상당한 특권이 부여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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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과거급제해서 금의환향하는 그림, 山水風俗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급제 진사가 주(州)에 들어오는 날, 주관(州官)은 먼저 장교(將校)·영인(伶人)을 경계 근처에 보낸 다음 주리(州吏)를 거느리고 오리정(五里亭)까지 나가 공복(公服)을 갖춰 입고 향탁(香卓) 및 배위(拜位)를 진설한다.

고려사 예지(禮志) 가례, 새로 급제한 진사를 영친하는 의식


 고려사에는 급제한 진사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 지방관이 관료와 향리들을 이끌고 5리 밖으로 나아가 맞이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관료가 되지 않았더라도 그를 선비(士)로 인정하고 예우함을 보여줍니다. 


묘정(廟庭)의 악부(樂部)의 공인(工人)에게 차등을 두어 물품을 하사하고, 진사과(進士科)와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지 못하여 군대에 있는 자는 면제하여 주었다.

고려사, 숙종 3년(1098년) 10월 10일


“진사(進士)는 비록 음직(蔭職)이 없더라도 가벼운 죄는 속동(贖銅)하게 하고, 오직 도둑질을 하거나, 아첨하는 죄를 범하거나, 강_간하거나, 다른 사람을 때려서 상처를 입혔을 때에는 율(律)에 의거하여 단죄하라.”

고려사 형법지, 숙종(肅宗) 10년(1105)


무릇 진사(進士)와 생도(生徒)는 모두 방수(防戍)에 나가는 것을 면제하라. 

고려사 충렬왕 22년(1296년) 1월 15일


 가장 중요한 것은 진사에게 주어지는 면역(免役)의 특권입니다. 관료들만이 군역이나 향역과 같은 역(役), 즉 국가가 대를 이어 계속 부여하는 노동 의무의 부과가 면제되는데 진사 역시 이를 면제할 뿐 아니라 법률 위반시에도 혜택을 부여합니다. 


 즉 진사(進士)는 관직을 얻지 못한 이들이라도 국가가 요구하는 선비(士)로서 학문을 닦아 일정 자격을 갖춘 이를 지배층으로서 인정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이러한 신분상 혜택은 고려의 중앙집권과 지방통치가 강화하면서 향리의 지배층으로서의 신분이 직역(職役)화 되면서 더욱 가치있어집니다. 기존에 재지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지배층이었던 향리는 점차 국가가 부과한 향리역(鄕吏役)을 수행하는 신분으로 하락하게 되었기 때문이죠.


 고려왕조는 향리의 신분을 떨어뜨리는 대신, 부족한 관직에도 불구하고 향리층이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경로를 제공함으로서 그들을 지배연합 내부로 포섭시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향리층은 지방관 파견으로 점차 신분하락이 발생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중앙의 관료사회로 진출하거나 지배층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통로를 제공받음으로서 지배를 거부하기보다는 지배층에 합류하는데 좀 더 골몰하게 되죠.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이 바로 1차 시험인 계수관시, 또는 향시입니다. 


 고려 초기에 시작된 계수관시(界首官試)는 지방 교육 못지 않게 재지유력자를 포섭시키는데 중요했으리라 추측됩니다. 교통이 불편하던 당시 개경에서만 과거를 진행할 경우 일반적으로 재지유력자가 상경하여 과거를 보는 것은 높은 불합격률을 생각할 때 참여율을 저조하게 만듭니다. 


 수도인 개경이 아닌 지방의 주요 군현인 경(京)·목(牧)·도호부(都護府)에서 1차 시험을 진행하는 것은 단순히 국자감시 자격을 검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교육수준이 낮은 지방에 일정한 쿼터를 보장하기 위한 의도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러 주(州)·현(縣)에서 1,000정(丁) 이상은 해마다 3명을, 500정 이상은 2명을, 그 이하는 1명을 공거(貢擧)하게 하되, 계수관(界首官)으로 하여금 시험하여 선발하도록 한다...

 예(例)에 따라 개경(開京)으로 보내면 국자감(國子監)에서 다시 시험하여, 합격한 사람은 과거(科擧)에 응시하도록[赴擧] 허가하고, 나머지는 뜻에 따라 본처(本處)로 돌려보내 학습하도록 한다. 만일 계수관이 적합하지 못한 사람을 공거했다면 국자감에서 조사하여 밝히고 처벌하라.

고려사 선거지(選擧) 과목, 현종 15년(1025년) 


 국자감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지역별로 구분하여 시험을 치르고 인구별로 합격자 수를 설정함으로서, 지역별로 일정한 수의 응시자를 보장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죠.


 계수관시의 응시 자격은 상급 향리의 손자, 아들을 대상으로 제한되었습니다. 이 쿼터제는 재지유력자에 대한 우대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지방에서의 1차 시험은 12~14세 합격자가 나올 정도로 커트라인이 낮았습니다. 이렇게 지방에서 합격하여 상경하는 사람을 향공(鄕貢)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관련된 독특한 호칭이 고려시대 문헌에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향공진사(鄕貢進士)죠.


 향공진사(鄕貢進士)는 계수관시에 합격한 사람이라는 해석도 있고, 계수관시에 합격한 사람이 국자감시에 합격했을 경우를 지칭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진사의 복식은 네 가닥 띠가 있는 무늬비단 두건[四帶文羅巾]을 쓰며, 검은 명주[皂紬]로 갖옷[裘]을 만들고 검은 띠를 두르고 가죽신을 신는다. 토공·향공[貢] 등에 오르면 모자[帽, 복두]를 더 쓰고, 급제하면 푸른 햇빛가리개에 노복(奴僕)이 끄는 말을 타서[靑蓋僕馬] 성안에서 노닐며 영광을 드러내도록[榮觀] 하였다.

선화봉사고려도경, 백성[民庶] 진사(進士)

 

 그 복식은 무늬비단[文羅]으로 두건을 하고 검은 명주로 갖옷[裘]을 삼으며, 검은 뿔로 만든 띠[黑角束帶]에 검은 가죽의 네모난 신발[句履]을 신으니, 아직 토공(土貢)이나 향공(鄕貢)에 오르지 않은[未預貢] 진사(進士)의 복식과도 비슷하다.

선화봉사고려도경, 백성[民庶] 민장(民長)


 고려도경의 기록을 보면, 고려의 진사(進士)는 3단계로 구분됩니다. 아직  향공에 이르지 못한(未預貢) 진사가 있고, 향공에 오른 진사(鄕貢)가 있으며, 예부시에 급제하여 합격한 진사가 있어서 각자가 다른 신분입니다. 


 아마도 계수관시, 1차 시험에 붙어서 상경한 이도 고려에서는 진사라고 지칭하고, 국자감시에 합격한 진사(預貢)는 복두를 써서 1차 합격자와 구분합니다. 향공진사(鄕貢進士)는 둘 다에 해당할 수 있죠.


  정가신(鄭可臣)은 자(字)가 헌지(獻之)이고 초명(初名)은 흥(興)이며, 나주(羅州) 사람으로 아버지 정송수(鄭松壽)는 향공진사(鄕貢進士)였다.....

 천기가 가엾게 여겨 그를 부잣집에 데릴사위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응하는 집이 없었다. 태부소경(太府少卿) 안홍우(安弘祐)가 허락하였지만, 약속을 정한 뒤에 후회하며 말하기를, “내가 비록 가난한 사족(士族)이긴 하나, 어찌 향공의 아들(鄕貢子)을 받아들일 것인가?”라고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안홍우가 죽고 집안이 날로 가난해지니 그제야 허락하였다.

고려사 정가신(1224~1298년) 열전


 고려사 정가신 열전을 보면, 안홍우는 자신을 사족(士族)으로서 정가신의 아버지의 직위인 향공진사(鄕貢進士)를 자신과 동격이 아닌 향공(鄕貢)이라고 표현합니다. 물론 그가 관료라는 것을 고려해야겠지만 향공진사가 국자감시에 합격한 정식 진사가 아닐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향공진사(鄕貢進士)는 고려시대 호적 기록에 조상의 관직을 기록하는데 남아 있습니다. 동일한 호적이나 과거합격자 기록에서 향공진사와 진사가 같이 등장하는 사례도 나타나죠. 과거에 급제하거나 관료가 된 향공진사 출신이 아닌 향공진사로 남아있는 기록은 주로 지방거주자에서 나타납니다.


 이를 고려할 때 향공진사란 계수관시 합격자를 지칭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관료들한테 공공연히 인정되지는 못했지만, 계수관시에 합격한 것만으로도 진사(進士)로서 적어도 향촌사회에서는 지배층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향리의 직역(職役)에서 해제되는 기회가 제공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국자감시에 합격한 진사(進士)와 같이 군역이 면제되지는 않은것 같습니다.


 원충갑(元冲甲)은 원주(原州) 사람으로 작은 체구지만 날쌔고 용감하였는데, 눈에는 전광(電光)이 있었으며 능히 어려움에 처해서는 몸을 잊었다. 향공진사(鄕貢進士)로서 원주 별초(別抄)에 예속되었다. 

고려사 원충갑(1250~1321년) 열전


 충렬왕 때 카다안의 침공 과정에서 전공을 세운 원충갑의 사례는 고려후기에도 여전히 무위를 자랑하는 재지유력자가 존재했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향리는 아니지만 지방에서 군역을 수행하는 향공진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과거가 아닌 전공을 세워 출세하게 됩니다. 


 이처럼 지방의 향시와 개경의 국자감시, 예부시로 이어지는 과거제도와 진사(進士)로의 신분상승은 고려후기 향리의 신분이 점차 하락하고 지방통치가 강화되던 시기, 재지유력자들의 불만을 완화시키고 그들이 신분상승을 추구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합니다. 


 국가가 합법적으로 신분상승이 가능한 통로로서 "공부"를 제시하고 공교육을 강화시킴으로서 활과 칼을 차고 말을 내달리면서 주변 지역과 항쟁을 벌이기도 했던 재지유력자들이 점차 어릴 때부터 한문을 배우고, 향교에 나가서 공부하며 과거시험을 준비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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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원충갑처럼 무인기질이 넘치는 이도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갈궈대서 향공진사가 된 걸지도 모릅니다. 


 재지유력자들이 향리와 선비(士)의 신분격차를 인정하고 선비(士)가 되고자하는 열망은 이런 과정에서 형성됩니다. 고려후기 재지유력자들은 과거 뿐만이 아니라 전공을 세우거나 권세가와 결탁하는 불법적 수단까지 사용하며 관직을 취득하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재지사회를 대표하는 최고위 향리인 호장(戶長)들은 고려 말기에 호장직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관직을 취득하는 경향이 강해지는데 이는 그들이 단순히 향리의 직역(職役)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배층의 신분을 회복하고, 유지 강화하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 


 고려왕조가 만들어낸 지배체제와 프로파간다는 재지유력자인 향리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피지배층으로 점차 하락시키는 것에 반발해 들고일어나게 하는게 아니라 어떻게든 국가가 보장하는 지배층 신분을 가지길 희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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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프로파간다는거친 호족들을 선비로 바꿔내는데 성공합니다----


 이러한 소프트파워를 통해 여말선초의 혼란기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중앙집권화는 점점 더 강화되었고, 지방세력이 중앙정권에 도전하거나 지배를 거부하는 일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만 보면, 고려의 호족들은 중앙정권의 프로파간다와 교육정책에 세뇌된 나머지 "선비"라는 신분에 대한 명예욕에 얽매인 이들처럼 보입니다. 


 중세 일본의 무사들은 재지사회에서 자신의 토지와 예속민에 대한 소유권이란 실질적 가치를 중시했습니다.


 이를 지키기 위한 그들의 행동은 일본의 중앙정권의 지방통치를 어렵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봉건제 사회를 발전시키고 최종적인 통일정권 조차 봉건적 연방제국가체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죠. 


 고려 재지사회의 호족, 향리들은 왜 이런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중앙정권의 지방통치를 점점 더 받아들이게 되었을까요?



참고자료

김병남, "한국 고대의 교육적 기초와 지방 교육의 흔적"

박재복, "고려시대 향교건립의 추세와 김승인의 강릉향교 설립에 대한 고찰"

이원명, "문과급제자 거주지 분석 - 주요성관의 문과방목을 중심으로"

이선철, "명, 청의 사례를 통해 본 조선 과거제도의 실상"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이태경, "조선초기 호장의 향촌지배와 그 변화"

류호석, "고려시대 진사의 개념에 대한 검토"

허흥식, "고려의 국자감시와 이를 통한 신분유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