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은 북한의 대남도발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해 중 하나임.


1월 21일,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부대 31명이 청와대로 쳐들어 갔다가 1명을 제외한 30명 모두 사살됨.


1월 23일, 미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공해상에서 납북당함.


10월 30일부터 11월 1일까지 3일 동안 무장공비 120명이 울진-삼척 해안 지구에 침투했었던, 휴전 이후 최대 규모의 대남 도발 사건인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까지.



이외에도 8월 20일에 북한이 통일혁명당 간부들을 구출하기 위해 제주 서귀포에 무장간첩선을 보냈으나 12명이 사살되고 2명이 생포된 사건 등도 있지만 다 설명할 수 없으니 넘어가자고.


1968년의 북한의 이러한 대남/대미 도발을 '군사적 모험주의'라고 평가되는데,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거임.



왜 북한은 이런 개짓거리를 했을까? 대체 무엇을 노리고?


그리고 북한은 이런 도발로 뭘 얻었을까? 위 사건들이 북한 내부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위 사건들이 남한에 미친 영향은 군붕이들도 알고 있을 거임.


대간첩 본부 창설, 250만명의 향토예비군 창설, 주민등록제 개정안 통과, 1.21 사태로 미국의 1억달러 추가군사원조+울진삼척으로 받고 1억불 더.



하지만 북한은? 소위 그 '군사적 모험주의'는 북한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배경



1960년대 초반, 북한과 소련의 관계는 별로였음.


이 시기 중소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은 다들 잘 알텐데, 북한도 거기에 맞춰서 친소 대신 친중 노선을 탄거임.



1957년, 제21차 소련공산당대회에서 중소간 이견이 나타남.


그리고 1961년, 제22차 소련공산당대회에서 이들의 관계 악화는 노골적이게됨.


흐루쇼프는 탈스탈린주의를 강조하며 스탈린 격하운동을 펼쳤고, 그와 동시에 알바니아의 스탈린주의자들의 폭정을 비난함.


뜬금없이 알바니아가 왜 나오냐고 할 수 있는데, 이 당시 알바니아와 중국은 우호적인 관계였음.


게다가 알바니아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의 이데올로기 노선이 유사했고, 북한은 스탈린주의를 차용한 김일성 유일지도체계를 추구하고 있었음.



사실상 알바니아를 표면적으로 둔거지 중국과 북한을 우회적으로 저격한 거임.



이후 1962년 10월, 중국은 쿠바 미사일 위기를 해결하려는 소련 지도부를 미제국주의에 투항한 것이라고 했고,


같은 해 북한은 최고인민회의에서 코메콘(COMECON) 총회에서 소련이 북한에게 요구한 코메콘 가입을 거부함.


역시 같은 해 10월에서 11월, 중국과 인도의 국경분쟁에서 소련은 공개적으로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북한은 즉시 중국 편을 들었으며,


인도에게 지지를 보내는 소련 지도부를 '전쟁 공포증에 빠져 미제국주의와 타협하고 투항했다'고 로동신문에 비난까지함.



이렇게 중소분쟁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노골적으로 중국 편을 드는 북한에 대한 소련의 반응은 단순했음.



북한의 원조 중단.



그러자 북한은 4대 군사노선 제시와 함께, 경제국방 건설 병진노선을 채택함.



이렇듯 소련과 북한의 관계는 중국만큼이나 악화일로를 걷는가했더니만,


의외의 사건으로 북소 관계는 빠르게 회복되고 반대로 북중 관계가 악화되게 됨.



흐루쇼프 실각 이후 브레즈네프-코시긴 집단지도체제가 들어섬.


중국은 이를 '흐루쇼프 없는 흐루쇼프주의'라고 비판한데 반해, 북한은 소련과의 관계 회복에 들어감.


'흐루쇼프가 싫었던거지 소련이 싫었던게 아니에요'라고.


소련 입장에서도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으니 다시 북한과의 관계를 이완함.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북중 관계의 경색을 불러옴.



1966년, 문화대혁명이 터짐.



북한은 이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음.



오히려 저 개지랄이 북한으로 퍼지지 않을까 크게 우려함.



당시 중국은, 소련뿐만이 아니라 문혁을 지지하지 않는 김일성까지도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함.


1966년 12월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해, 브레즈네프와의 대화에서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북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중적 광기'에 해당"한다고 발언하기도 함.



1967년 1월부터는 중국 공산당이 중국에 거주하는 북한 국적인까지 홍위병 활동에 동참하고 대규모 집회에 참여하라고 강요했으니


김일성 입장에선 좆같긴 했을거임.



이제 국제정세를 살펴볼 차례임.



당시 아시아의 정세는 좀 혼란스러웠음.



베트남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중국은 독자적인 핵보유를 추진하고 있었음.



그리고 소련은 북베트남에 즉각적인 군사 원조를 넣어줌.


중국은 이에 굉장히 불편하게 여김.


소련의 북베트남 원조는 베트남의 친소화를 불러올게 뻔함.


중국은 베트남전에 대한 소련과의 공동대응을 거부하는 한편, 독자적으로 원조를 넣어줌.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군사원조를 확대하기엔, 중국은 미국과의 군사적 충돌은 쫄려하고 있었음.


우선 핵이 없었고, 공군력과 해군력에서도 미국이 베트남에서 보여준 우세가 너무나도 확실했었던 거임.



그래서 중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이겨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소련이 지원하는 북베트남이 이겨도 좋을게 없는 딜레마에 놓인 거임.



이 상황에서 중국이 최우선으로 추진해야할 것은 오로지 핵, 독자적인 핵개발이었음.


핵만이 사회주의 국가로서 중국의 생존과 국익을 보장할 것이란 판단이었음.



근데 소련 이씨발놈이 미국이랑 손을 잡고 이걸 반대하네?



소련은 미국만큼이나 절대로 중국의 핵보유를 용인할 수 없었음.


그래서 베트남 전쟁 중에도 미소간 핵 비확산 및 핵실험 금지 조약 등이 체결되었고, 소련은 중국의 핵개발을 얽매임.



다음은 북한.



북한은 자신의 생존과 한반도 적화통일을 위해서 반드시 소련과 중국, 양쪽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지원을 받아야했음.



하지만 소련은 북한을 멸망 직전에서 구해준 중국을 자기 졸로 두려고, 핵개발 못하게 최악의 원수 미국과 손을 잡았고,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 중 최고 대빵인 소련에게 존나 개기면서 북한도 동참하라고 그러는데, 정작 미국 눈치 보면서 사리니까,



아시아에 점점 깊이 간섭하는 미국의 위협에 함께 대응하여 공동의 안위를 지켜야한다고 생각하는 북한 입장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거임.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의 혹부리 사이로 불안한 생각이 스침.



소련과 중국 둘 다 미국과의 전면전만큼은 피하려고 하는 상황에서,


자신은 사실상 미제와 국경을 맞닿은 최전선에 놓인 상태인데,


소련과 중국 모두 이미 베트남 때문에 골치가 아프니,


미국과 쓸데없는 긁어부스럼을 만들지 않기 위해,


북한이 중소 둘 다에게 유기당하는게 아닐까?


라고.



북한 입장에서 중국과 소련은 반드시 필요하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던 동맹이었음.


하지만 그렇다고 북한은 이 딜레마 속의 정세를 바꿀 역량이 없었음.


결국 김일성은 북한의 오랜 불치병이자 필살기를 꺼내들게됨.




그건 바로 관심 끌려고 지랄발광을 하는 것이었음.



(2)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