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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혁명당



1968년 중반, 북한이 정말 애지중지 키워냈던 남한의 통일혁명당이 괴멸됨.


8월 24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직접 통혁당 관련자 158명을 검거했다고 밝힘.


이 사건은 김일성에게 큰 충격이었는데, 때문에 푸에블로호 사건과 더불어 이 사건으로 대남전략과 군사적 모험주의의 목표 역시 달라지게 됨.



이 시기 북한의 대남전략의 방침은 남한 내 혁명역량 보존 및 축적으로, 통혁당이 괴멸당하면서 대남 혁명역량이 소멸당하게 생겼으니 어쩔 수 없었을 거임.



군사적 모험주의도 이에 맞춰서, 1.21 사태 같은 파괴 노선이 아니라 지역인민위원회 창설, 정치선전사업, 무장투쟁 거점 확보 등으로 노선을 바꿈.



하지만 군부강경파가 이걸 잘 해낼 수 있었을까?



인민군의 찐빠들



1968년 10월 30일, 민족보위성 정찰국 예하 124부대 소속 무장공비 120명이 울진-삼척 해안 지구에 침투함.



목적은 남한 내 혁명역량 유지를 위한 무장투쟁 거점 확보.



결과는 모두가 잘 알듯이 7명 생포, 113명 사살.



1.21 사태와 비교해도 말도 안 될 정도로 처참한 대실패였음.


공비들은 거점 확보도 실패했고, 주민 회유는 커녕 양민 학살이나 저질렀음.


이 찐빠가 너무 심하다보니, 북한 내부에서도 비판이 일어난걸로 추정되는데,



'근로자'의 1969년 제1호 발간지에서 항일유격대의 군중 친화적인 투쟁을 칭송하는 논문이 올라옴.  



아마 하라는 주민 회유는 안하고 애 입이나 찢는 미친 짓을 저지른 병신새끼들을 저격한 것으로 보임.



그리고 조선노동당 기관지에 이런 저격이 올라온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점은,


김일성의 군부강경파에 대한 신뢰가 깨졌다는 것임.



대숙청



1969년 1월,



조선인민군 당위원회 제4기 제4차 전원회의에서 군부강경파에 대한 비판이 진행됨.


죄목은 많음: 당지도 거부, 사업보고 거부, 당조직 및 정치기관 기능 약화, 간부사업에 해독을 끼침, '군사만능주의, 명령주의, 관료주의'를 퍼트림.



이 때 숙청된 사람들 일부만 대자면,


김창봉 민족보위상


허봉학 조선노동당 대남총국장


최광 인민군 총참모장


김철만 인민군 부총참모장


김양춘 제1집단군 사령관


등이 있음.



이후에 복권된 사람도 있지만, 이 때는 사실상 김일성이 군사적 모험주의의 모든 실패를 군부강경파에 뒤집어 씌운 거임.


그야말로 군사적 모험주의를 주도해 대남, 대미 도발을 기획하고 추진한 사람은 전부 숙청당했다고 보면 됨.


그만큼 울진 삼척의 대실패가 군사적 모험주의 노선이 폐기될 정도로 뼈 아팠다고 해석할 수도 있음.



그렇게 군사적 모험주의를 주도했던 군부강경파가 숙청되고 난 다음,


김일성은 표면적으로는 '당의 지도도 안 듣고 너무 막나가는 군부를 다스리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함.



여파



당시 인민군 작전지휘체계는 군사유일제였음.


이는 군 지휘관의 유일적 권한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사실상 군의 자율권이었음.



군부강경파가 득세하고, 김일성과 당이 군사적 모험주의를 지원해줄 때는 군사유일제가 인정되고 강화됐지만,


1968년의 처참한 실패는 더이상의 군사유일제를 용납할 수 없게 만듦.



그래서 김일성이 가지고 온 것은 바로 '정치위원제'였음.


정치위원은 '부대에 파견된 당의 대표'로, 김일성은 이를 연대급 부대까지 적용하도록 조치함.


사실 기존에도 총정치국이 있어 정치부장이나 정치일군 등이 군에 대한 당적 지도를 하고 있었음.


그러나 군사적 모험주의가 득세하고, 군사유일제가 강화되면서 기존의 총정치국 체제는 유명무실화되었음.



이걸 간접적으로 증명하는게, 숙청된 허봉학의 후임 총정치국장이었던 오진우는 숙청에서 피해갈 수 있었음.


만일 총정치국도 권한이 있었으면 군사적 모험주의에 연루될 수밖에 없었을텐데, 그러지 않았으니 살아남은 것.


즉, 당시 총정치국은 이름만 남은 상태라서 살아남음.



하지만 정치위원은 지휘권까지 가져 군 지휘관 중심의 군사유일제가 약화될 수밖에 없었으며, 당에서 직접 파견된 위원인만큼, 군에 대한 당적 통제가 더 강화되었음.



결국 숙청 이후 인민군은 가지고 있었던 자율권을 빼앗겨버렸고,


더나아가 1970년 제5차 당대회에서는 당중앙위원회 군사위원회가 모든 무력을 지휘하도록 하는 당규약을 개정함에 따라,


인민군은 독자적인 지휘권을 아예 상실하게됨.



솔직히 1968년에 개지랄 떨면서 사람들 죽인거 생각하면 자업자득이지만.



결말



사실 이 이후에도 북한은 EC-121 격추 사건이나 판문점 사건 등 대남 대미 무력도발을 이어감.


그래서 마땅히 결말이라고 할만한 건 없는데,


사실 군사적 모험주의의 종료로 유일하게 그 어떤 손해도 보지 않고 이득만 챙겨간 새끼가 하나 있음.




김정일




이새낀 군부강경파 숙청과 정치위원제의 도입으로 그동안 김일성만을 섬기던 인민군에 개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됨.



정치위원제의 도입은 총정치국의 위상 강화를 가져왔고, 또 인민군이 당의 군대로 귀속되는 결과를 가져옴.



김정일은 총정치국을 통해 자신이 조선노동당 내에 보유한 영향력을 인민군에게 미쳤고,



그 결과 김정일은 인민군 내 자신의 후계 구도를 점차 굳히게 됨.



결국 군사적 모험주의로 이득을 본 건, 김일성도, 인민군도 아닌, 김정일뿐이었음.



결론: 인민군은 병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