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알아두어야 할 개념들이 있어서 설명함.


1. 한자란? 

한문을 쓰는 데 사용하는 글자들의 총칭. 글자 하나하나가 한 음절이면서 한 단어, 또는 한 형태소, 또는 뜻 없이 그냥 소리의 음절을 표시함. 

2. 한문이란?

한자를 모아서 쓴 문장, 텍스트. 


그런데 한문도 다 같은 한문이 아님. 전근대 한중일 지식인들이 사용한 '지식인의 모범적인 한문', 즉 '정격한문'이란 상고한어... 그러니까 고대 중국어에 기반한, 사서삼경의 문체에서 정립된 글쓰기임. 


중국어도 시대에 따라 입말이 계속 변해왔고 글말도 여기에 따라 변해왔거든. 그래서 정격한문이 아닌, 입말에 맞추어 쓴 한문을 '백화문'이라고 불러. 당연히 백화문은 중국인 입장에서는 정격한문보다 쓰기 쉬움. 한자만 알면, 그 한자를 자기가 평상시에 말하는 대로 배열해서 쓰면 되니까. 당연히 백화문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후대에 쓰인 백화문일수록 현대 중국어에 가까워짐.


하지만 백화문은 제대로 배운 지식인들 사이에선 품위 없는 글로 취급받았어. 그래서 소설책이나 자기만 보는 글을 쓸 때나 사용했고, 각 잡고 격식을 갖추어 쓰는 글이나 공문서는 정격한문으로 써야 인정을 받았지.


(조선시대에 정조가 했다는 '문체반정'도 여기에 관련돼. 조선의 사대부들이 정격한문으로 쓰인 고전을 안 읽고 백화문으로 쓰인 중국의 가벼운 소설책 따위를 읽으니까, 자꾸 정격한문이 아니라 천박한 백화문에 가까운 문체로 글을 쓴다고 정격한문으로만 글을 쓰라고 명령했지.)


세월이 흐를수록 입말이 사서삼경이 쓰여지던 시절의 언어와는 달라졌기 때문에, 후대로 갈수록 중국인들이라고 해도 정격한문을 배우기는 어려워졌어. (물론 한국인이나 일본인처럼 아예 기원부터 다른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들보단 쉽지만 말이야.) 게다가 전근대 한자 문화권 지식인들은 고서의 표현을 인용해서 문장을 수식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고서를 폭 넓게 읽지 않으면 한자 자체와 정격한문의 문법을 알더라도 이게 뭔 의미인지 해석을 못하는 경우가 흔했어.



그래서 과거는 쉽게 말하면 초급시험과 고급시험으로 나뉘는데, 초급시험에서는


▷ 사서삼경 등 고전을 충분히 읽었는지

▷ 정격한문으로 얼마나 작문을 잘하는지


하는 정도를 시험했음. 시 쓰기를 시험하는 것도 작문 솜씨 평가의 일환임. 


초급시험 합격자 = 국가 공인 정격한문 익스퍼트

라고 생각하면 돼.


초급시험에 합격하면 고급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생기는데 여기서는 '논설문'을 쓰도록 함. 임금, 또는 임금에게 권한을 받은 고위 벼슬아치가 시사와 관련된 어떤 주제를 주면, 그 주제에 맞추어 정격한문으로 논설문을 써야 함. 



고급시험의 논설문 쓰기에서, 중국의 과거제도에서는 팔고문(八股文)이란 형식이 등장해. 글쓰기의 각 단계를 고(股)라고 불렀기 때문에, '팔고문'이란 '8가지 단계로 나뉜 글'이란 뜻임. 


팔고문은 명나라 때 등장해서 청나라가 거의 멸망하기 직전까지 과거의 고급시험용 글쓰기가 되었어. 그런데 팔고문은 논설문은 논설문이지만, 현대 기준의 '논설문'과는 쓰는 방식이 많이 달라. 


일단 고급시험의 책임자가 사서삼경의 한 구절을 뽑아서 발표하면, 그 구절과 시사를 연결지어 '나라가 이러이러하게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는 식으로 결론을 재는 글을 씀. 이때 글의 초입부터 결론까지 총 8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팔고문'임. 


팔고문은 철저하게 사서삼경에 기반한 정격한문으로 써야 하고, 각 경전의 해석도 국가 공인 해석서(?)를 따라야 하며, 내용도 '옛 유가의 성현들이라면 이런 결론을 내리셨을 것이다.' 하는 입장에서 진행해야 해. 게다가 글을 쓰는 과정에서 '대비'를 중요시했음. 그럼 여기서 말하는 대비가 뭐냐?


1. 군자는 나라를 웅혼하게 발전시키지만

2. 소인은 나라를 졸렬하게 망가트린다


1행과 2행은 내용과 구성이 정확하게 대칭되지? 이렇게 문장을 대비해서 써야 하는 부분이 '반드시' 들어가야 함. 안 그러면 팔고문 형식 위반으로 자동 탈락임. 


사실 팔고문은 전근대 중국의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글공부 한 사람들을 전부 팔고문싸개로 만든다.' 하는 악명이 높았어. 청나라 시절의 장수생(?)인 포송령이란 사람이 쓴 '요재지이'란 소설책이 있음. 그런데 요재지이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 


어떤 시장통에 장님 거지가 한 명 있었는데, 장님이지만 글솜씨 평가를 기똥차게 해주기로 유명해서 그걸로 먹고 살았음. 장님이 글솜씨 평가를 어떻게 해줄까? 글을 쓴 종이를 그 장님 앞에서 태우면, 장님이 그 연기를 맡고서 솜씨를 평가한다는 거지. 그래서 어떤 사람이 시험해 보려고 옛날 중국 대가들의 글을 태워봤더니 "오오, 내 혈관이 다 시원해지는군! 이건 틀림없이 OOO가 쓴 글일 거요." 하더라나. 그래서 팔고문으로 장원급제한 사람의 글을 태웠더니, 장님이 연기를 냄새 맡고는 토악질을 하면서 "이 따위 글을 왜 내 앞에서 태우는 거요? 도저히 못 맡겠군. 저리 꺼지쇼!" 하더라는 거지. 


포송령이 저런 이야기를 쓸 만큼, 전근대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높았어. 물론 팔고문 잘 써서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은 이런 악평을 '과거 고급시험에 합격 못한 놈들의 징징징'으로 간주하며 팔고문은 좋은 글쓰기라고 옹호했어. 


명-청시대에 걸쳐 몇백 년간 팔고문으로 고급시험을 치렀기 때문에, 나중에는 잘 정리된 족보가 나왔어. 사서삼경 중 어떤 구절이 과거시험 주제로 나올 만하고, 그 구절로 합격한 '모범 팔고문'은 무엇이라고 싹 정리해서 모은 종합 팔고문집.... 과거시험을 공부한다는 것은 팔고문 족보를 달달달 외운다는 것과 같았어.


위에서 옛날 정격한문 글쓰기에선 고서의 표현을 많이 인용했기 때문에 고서를 많이 알아야 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글공부 = 과거 시험 공부 = 팔고문 족보 암기


이렇게 되다 보니까 팔고문 족보 암기만 달달달 했기 때문에 과거 고급시험에 합격했는데도 상상 외로 무식한 놈들도 있었다고 해. 팔고문을 두고 현대 중국은 어떻게 평가할까? '전족'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부끄러운 역사'로 간주할 지경임. 과거시험을 팔고문 암기능력 시험으로 치렀기 때문에, 지식인들을 팔고문밖에 모르는 바보로 만들었단 거지. 


청나라 말기에 가면 서구 열강이 몰려오던 광서제 때에 결국 팔고문을 과거시험에서 폐지함. 이때 팔고문 폐지론자들이 광서제에게 이런 투로 상소문을 올려서 관철시켰어.


"글공부 하는 이들이 과거시험에 합격하겠다고 팔고문 족보만 가져다 놓고 달달달 외우기만 하니, 미국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 스위스가 뭐하는 나라인지도 모르면서 감히 세계의 정세를 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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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현대 중국은 아예 팔고문뿐만이 아니라 정격 한문 글쓰기를 폐지하고 백화문 기반 글쓰기로 전환했음. 그래서 현대 중국인들도 따로 정자체 한자와 함께 고전 중국어 문법을 배우지 않으면, 정격한문으로 쓰인 고서를 읽지를 못해. 오늘날 정격한문은 역사학자, 또는 서예가들의 특수분야이고, 대다수 일반인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지.


우리나라 사학과 박사과정 중인 사람에게 들으니까.... 우리나라 사학과에 중국인 유학생들이 은근히 많이 온대. (역사 해석에서 정치적 요소가 많이 개입하고, 따라서 학자들이 공산당의 공식 해석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중국 사학계의 수준이 한국의 중국사학자들보다 평균적으로 많이 떨어진다고 함) 


그런데 중국 유학생들은 '내가 한자의 종주국 중국에서 온 사람인데, 한자도 안 쓰는 한국인들에게 밀릴 리가 있겠어? 한문 과목 대충 신청해서 룰루랄라 점수 따고 가야지' 하고 고전한문 강독 시험을 신청하는데..... 


한국인 학생들은 '아, 고전한문 강독이라니 어렵겠구나.' 하고 처음 신청할 때부터 각오를 하고 들어오지만, 중국인 유학생들은 가볍게 점수 따고 갈 생각으로 대충 신청했다가 상상 외로 어려워서 우수수 드랍한다고 하네. 자기가 본 중국인 유학생들 중 고전한문 강독 과목을 끝까지 이수한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