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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현충원은 1956년 서울 동작구 동작동의 공작봉 기슭에서 국군묘지로 개장됐음.


1965년에는 대통령령 제2092호 국립묘지령으로 국립묘지로 승격해 안장 대상자가 독립운동가, 경찰관, 향토예비군까지 확대됨.


이 글의 주제인 현충문 이전에는 무명용사문이 있었음.


무명용사문이 개수되면서 1969년 4월 30일에 무명용사문이 있던 자리에 헌충문이 증축된거임.



1970년 6월 22일, 북한의 무장공비들이 현충원으로 침투함.


이들은 기관단총과 권총, 대검 등으로 무장한 상태였고, 현충원의 누구한테도 들키지 않은 상태로 현충문까지 올라가는데 성공함.


이들의 목표는 현충문에 폭발물을 설치하는 것.


이후 대간첩작전본부의 분석에 따르면 이 폭발물은 크레모아와 유사한 폭탄으로,


안에 직경 8mm의 423개의 자탄이 들어있었고, 2km 떨어진 곳에서도 원격으로 폭발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졌음.


유효반경 사거리가 4~50m라서 격발 시 현충문은 물론이고 현충탑에 참배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죽일 수 있는 수준이었음.  


시기를 볼 때 정황상 북한이 6.25 전쟁 20주기를 맞아 현충원에 온 사람들을 살상하기 위해 무장공비들을 보낸거임.


정확히는 현충원을 방문할 대통령 등 정부수반을 노린거지.


하지만 현충원 측은 물론이고 중앙정보부나 군도 폭탄이 설치되서 폭발하는 순간까지도 그 사실을 몰랐음.



그렇게 폭탄은 터져버렸고, 그 폭탄으로 죽은 사람은 무장공비 1명뿐이었음.



폭탄이 6월 22일 새벽 3시 40분에 터진거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연히 아무도 모르게 작업해야하니 공비들은 새벽에 작업 중이었고, 폭탄 주위엔 공비들밖에 없었음.


폭탄의 결함인지 공비들의 실수인지 폭탄이 설치되자마자 폭발해버렸고, 작업 중이던 공비 하나는 폭발로 현충문에서 30m 떨어진 곳으로 날아가버림.  


남은 공비들은 바로 튀었고, 그렇게 북한의 테러 작전은 애먼 현충문 기와 박살과 공비 하나 폭사로 실패해버림.


근데 내가 웃기려고 썼지만 우리도 딱히 잘한 건 없는게,


일단 무장공비들이 서울 한복판이 동작구에, 그것도 국방부가 관리하는 현충원까지 침투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은 분명한 경계 실패 사건임.


유근창 대간첩작전본부장은 세계사적으로 국립묘지에 침입해 폭탄을 설치한 사례가 없어 미처 대비하지 못했다고 밝혔지만 결국 변명이지.



게다가 폭탄이 터지고 나서도 노량진 경찰서와 인근 부대 5분 대기조가 현장에 도착한건 폭발 이후 무려 1시간 40분이 지나고 나서임.


폭사한 공비를 찾아낸 것도 거의 2시간이 넘게 지나고서였고,


이후 현충원 근처에서 수상한 2인을 태워 관악산 입구에서 내려줬다는 택시 기사의 증언에 따라 관악산 포위망이 형성된 시각이 폭발 후 약 5시간 20분만인 오전 9시였음.


군경은 관악산 일대를 완전 포위한채 수색 작전에 나섰지만 결국 공비들이 현충원에 침투하기 이전에 취숙한 것으로 보이는 음식물만 발견하는데 그침.


이후 7월 7일에 김포에서 무장공비 두 명을 군이 사살하는데, 이들이 현충원에 침투했다가 도망간 그 둘일 수 있다고 추정됨.


그래서 지금까지도 6월 22일에 현충원에 침투한 공비가 총 몇 명이었는지 아직도 불분명함.


6월 21일에 수상한 사람 셋을 봤다는 중학생 증언이나, 사건 이후 택시 기사의 증언, 사살된 공비들의 무장과 복장으로 3명일 것이다라고 정설처럼 볼 뿐이지.



그래서 현충문 폭파 사건은 사실 남북 모두 서로 찝찝한 사건임.


북한은 성공 직전까지 갔던 작전이 폭탄이 터져버리는 대찐빠가 나면서 실패해버렸고,


남한은 반대로 폭탄이 터지지 않있더라면 아웅산을 13년 먼저 체험하게될뻔한 오싹한 일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