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6일과 9일, 일제가 원폭과 투폭을 쳐맞자
영국은 말라야와 싱가포르를 재점유할 긴급 계획을 강구하게 됨
그러하여 지퍼 작전, 급류 작전이 두 지역을 위해 각각 수립됨.
싱가포르 주둔 제7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장 (추후 만주사변 주동자로 극동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음)은 본디 옥음방송에 불복하여 모든 연합군 포로를 처형한 후 싱가포르에서 총원 옥쇄할 계획이었으나
8월 18일 사이공에서 데라우치 히사이치 남방 총군 총사령관 원수 (데라우치 총독의 장남)를 접견한 후, 항복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바꿈.
이후 이타가키는 8월 20일, 연합군 동남아 사령부 사령관 루이 마운트배튼 제독에게 황명에 따라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였고
마운트 배튼 제독이 이끄는
기함 중순양함 HMS 서식스
전함 3척 (HMS 넬슨, HMAS 혹스베리, 리슐리외)
호위항모 7척
기타 지원함 포함 90척으로 구성된 동양함대가 스리랑카에서 출항함
8월 28일, 페낭 주둔 일본군이 저항 없이 항복하였고
8월 30일, 구호품을 실은 PBY 카탈리나 9기가 싱가포르에 착륙하여 일본군의 항복 및 포로들의 구출을 준비하기 시작함.
9월 2일, 동양함대가 싱가포르 해협 서남쪽의 입구인
래플스 등대를 통과하였고
9월 4일, 동양함대는 저항 없이 싱가포르항에 입항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리슐리외가 기뢰에 손상되는 찐빠가 발생함.
9월 11일, 이타가키 대장이 기함 HMS 서식스에 승선하였고
필립 크리스틴슨 대장, 로버스 맨서 소장을 접견하여
항복 문서에 서명을 하였음.
이날 두 장성 사이에서 “당신들이 2시간 늦었군“, ”우리는 도쿄 시각대로 일하지 않는다네“ 식의 설전이 벌어졌다고 전해짐.
(싱가포르는 본래 말라야 표준시 GMT +7:30을 사용하였으나, 일제 점령 당시엔 도쿄 표준시 GMT +9를 사용하였음)
이튿날 9월 12일, 싱가포르 시청사에서
동남아 주둔 일본군의 공식적인 항복 조인식이
마운트 배튼 제독과, 데라우치 원수를 대리한 이타가키 대장 사이에서 거행되었고
77,000명의 싱가포르 주둔 일본군과, 26,000명의 말라야 주둔 일본군이 연합군에 포로로 인계되었음.
이타가키 대장은 머지 않아 극동군사재판 참석을 위해 일본으로 떠남.
이타가키 대장이 예하 장교들에게 항복 결정을 전달하던 날,
래플스 호텔에서 일본군 장교단의 송축연이 있었고
그 자리에서 300여명의 장교가 할복자살 하고, 1개 소대가 수류탄으로 자폭하였다 전해짐.
항복 결정이 전달되기 전, 200여명의 일본군이 말라야 공산당 MCP에 의해 후원받던 항일 공산 게릴라 MPAJA에 합류하려 계획하였으나, 이들이 영국군에 저항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을 알게 되자 단념하였다 전해짐.
이들이 어찌어찌 처칠이 재집권한 1947년까지 현지에 남았더라면, MCP가 영국군의 무장해제 명령에 불응하여 비말레이계 소작농들을 필두로 일으킨 공산반란 ‘말라야 비상사태’에 편승하여 1960년까지 말레이 반도의 정글에서 말뚝을 박았을 지도 모를 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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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총독의 아비가 아니라 아들.. - dc App
하긴 나이가… 내가 원문을 반대로 읽었네 - dc App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