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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재일독립유공자 오성규 지사, 내일 영구귀국https://n.news.naver.com/article/437/0000355230 100세 오성규 지사 조국으로...광복군 지대장 묘역에 귀국신고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 오성규 지사(100)가 13일gall.dcinside.com며칠 전 재일독립유공자의 귀국 소식을 갤에 올렸더니
인생 업적이라곤 다른 갤에서 씹덕짤 올리다가 차단당한 게 전부인 디시 엠생 놈이 얼척 없는 소리를 지껄였더라고?
살다살다 독립유공자랑 6.25 전쟁 참전용사를 갈라치기 할 줄이야
독립운동가가 6.25 전쟁에 참전하지 말란 법이 어딨냐? 기록 찾아보면 독립운동 하시다 해방 후에 국군에 들어가 6.25 전쟁도 치르신 분들 꽤 있음.
오늘은 광복절이기도 하니 독립유공자 중 6.25 전쟁에 참전하신 분들 좀 추려서 소개해본다.
이준식
육군 중장
1900년 ~ 1966년
1919년 3.1 운동 직후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운남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음. 대한통의부, 정의부에서 활동하였으며 국민부의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이었음. 이후 만주에서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중국 국민혁명군으로 소속을 옮겨 한동안 활동하다 자진 예편하고 1939년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음. 광복군 창설 후에는 광복군총사령부 고급참모, 1지대장, 제1징모분처 주임위원을 역임하였음.
광복 후에는 육군사관학교 8기 특별 1반을 통해 대한민국 국군 대령으로 임관, 7여단장 초대 여단장으로 임명되었다가 7여단이 수도사단(현 7사단)으로 승격되면서 초대 수도사단장이 되었음. 6.25 전쟁 직전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보직을 이동하였는데 전쟁이 발발하자 육사 10기 생도1기, 생도2기를 이끌고 내촌, 태릉 전투에 참가하였음. 이후 수도사단장, 3사단장을 거쳤으며 영덕지구 전투에서 공을 세워 1954년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음.
이후 1군단 부사령관, 육군 전방지휘소장, 육본 작전참모부장, 육본 행정참모부장 등을 거쳐 5관구사령관까지 역임한 끝에 1959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음.
장철부
육군 중령
1921년 ~ 1950년
본명은 김병원. 일본 주오대학에서 유학 중 학병으로 징집되었으나 두 차례나 탈영한 끝에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가담하였음. 1947년 중국 황포군관학교 기병과를 졸업하였으며, 한국으로 돌아와 육군사관학교 5기로 임관함.
6.25 전쟁 당시 국군 독립기갑연대 제2기마수색대대(이하 기마대대)를 지휘하여 국군의 지연전 수행에 있어 공을 세웠음. 탐색 및 정찰 임무는 물론이고, 도하하는 북한군을 급습해 섬멸하거나 군마로 박격포를 운반해 기습 사격을 가하는 등 다양한 활약을 남겼음. 또한 습격으로 포위 섬멸될 위기에 빠진 미 63포병대대 B중대를 극적인 기마돌격으로 구출하거나 역시 포위된 미 24사단 34연대 3대대를 심야의 폭우를 뚫고 적 후방을 공격해 구출하기까지 함.
1950년 8월 청송지구 전투에서 기마대대는 거듭된 소모로 병력도 군마도 부족해진 상태였지만 적 후방으로 침투 및 기습하여 북한군 수백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음. 그러나 8월 4일, 북한군 766여단이 대대지휘소를 습격해 포위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장철부는 포로가 되길 거부하고 자결하였음.
전사 후 1계급 특진 및 화랑무공훈장 추서되었으며 이후에도 대통령 표창, 건국훈장 애족장,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었음.
전성호
육군 준장
1896년 ~ 1950년
독립운동가 전재일의 장남. 한일 강제 병합 후 만주로 이주하고 철혈광복단에 입단해 무장투쟁을 전개하였음. 1919년 북로군정서 사관연수소를 졸업하고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편의대에 소속돼 정보수집 활동으로 승리에 기여하였음. 다만 1928년 일제에 체포돼 풀려난 후로 친일 단체인 민생단 창설에 참가한 것으로 확인돼 소극적 친일로 변절했으리라 추정되는데 동시기 지청천과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상반된 주장 또한 있음.
광복 후에는 육군사관학교 1기로 국군에 임관하였고 6.25 전쟁 시 1사단 12연대장으로 있었음. 허나 12연대는 개성, 연백의 광범위한 담당 구역을 경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전 당일 연대가 와해되었으며 부대원들은 개별적으로 철수할 수 밖에 없었음. 전성호 본인도 중상을 입고 피투성이가 된 채 가까스로 사단 본대로 복귀하였음.
그 후 전성호는 육본 독립 제 1유격대대의 전술고문으로 임명돼 장사 상륙 작전에 참가하였으나, 1950년 9월 15일 현장 지휘 중 전사하였음.
1980년 건국포장 추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김홍일
육군 중장
1898년 ~ 1980년
한일 강제 병합으로 일가족이 만주로 이주하였으며 교사가 되었으나 비밀 결사 사건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자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음. 중국 귀주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실시학교에서 포병 교육을 이수한 다음 2차 호법전쟁에 참전하였음. 1921년에는 적백내전에 참전하였으며, 1926년에는 중국 국민혁명군 소속으로 북벌에 참여,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02사단 참모, 19집단군 참모처장, 19사단장 대리로 참전하였음.
다만 김홍일의 군 경력은 단지 부대 지휘만으로 기억되어선 안 됨. 중국이 총력전에 대비하는 1930년대에 군수참모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중국 육군대학에서 수학한 결과, 총력전 개념을 습득한 인물이었음. 게다가 중일전쟁에서 지연전 수행 경험을 얻기까지 했음.
1945년에는 광복군 한인참모장에 취임하였고, 광복 후에는 중국 동북 방면에서 만주 조선인의 보호를 담당하다 1948년 귀국하여 국군 준장으로 특별 임관하게 됨. 1949년에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부임하고 생도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기록이 여럿 있음.
6.25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육군 참모학교(육군대학) 총장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창설하고, 무너진 국군 사단들을 신속히 재편하는 데 성공하여 한강선 방어는 물론 향후 지연전 수행의 토대를 이룩하였음. 시흥사를 모태로 창설된 1군단 초대 군단장이 되었고 지연전과 낙동강 방어전까지 치렀음. 다만 안동지구 전투 중 철수작전에 어려움을 겪었고, 미군과의 마찰 등 외부 요인까지 겹치면서 1950년 9월에 육군종합학교 교장으로 전출되는 불운을 겪었음.
비록 짧은 활약상이었음에도 한순간에 국운이 기운 위기 상황을 반등시킬 기반을 닦았기에 후일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장군. 1951년 중장으로 예편하였음. 태극무공훈장과 건국훈장 독립장 등이 수여되었음.
장호강
육군 준장
1916년 ~ 2009년
본래는 교사였으나 중국 중앙군관학교에 입학해 군문에 들어섰음. 중국 국민혁명군 24집단군 정보처 정보장교로 근무하던 중 부대가 일본군에 항복해 왕징웨이 정부편으로 전향하였으나, 실제로는 일본군의 정보를 중국과 한국 임시정부에 빼돌리고 개봉에서 광복군의 첩보망을 구축하였음. 이후 광복군에 가담하여 3지대 부관주임이 되었으며 3지대가를 작사, 작곡하기도 했음.
광복 후에는 육사 8기 특별반을 통해 국군에 임관하였음. 6.25 전쟁 당시 대대장을 거쳐 21연대장, 52연대장 등을 역임하며 을지무공훈장을 수훈했음. 전후에도 육군 특전감(현 특수전사령관), 38사단장, 25사단장, 군수기지사령부 부사령관 등을 거쳐 준장으로 예편하였음.
특이하게도 시인으로서도 이름이 높았던 사람임. 전쟁 중 진중시를 써서 등단하였고 많은 시집을 발표하였음. 또한 이름모를 자유용사의 비에 새겨진 문구나 속초수복기념탑에 부치는 시 모자상부처럼 전국에 그의 글귀나 시가 남아있음. 창동 전투, 영천 대회전, 영원 전투, 토산 철수 작전, 횡성 전투 등 극악한 전장을 경험하면서 보고 느낀 것들이 문학적으로 승화되었던 듯.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 수여.
김국주
육군 소장
1924년 ~ 2021년
19살의 나이에 중국으로 망명, 광복군에 가담하였음. 광복군 3지대의 전신인 초모위원회 제6분과처 기간요원이었으며 중국 서주 지역에서 초모공작을 수행하였음. 이후 중국군 제10전구 산하 간부훈련학교 특설 한국광복군반에서 훈련을 받았고 1945년 초에는 안휘성 하구지구와 상해 지구에서 공작 활동을 펼쳤음. 광복 직전 군자금 확보를 위해 친일 부호 손창식과 접선하는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음.
광복 후에는 육군사관학교 7기 특별반을 통해 국군에 임관하였음. 6.25 전쟁이 터질 때 15연대 2대대 6중대장으로 있으면서 미아리지구 전투와 다부동 전투, 평양 입성, 운산 전투 등에 참전해 많은 공을 세웠음. 다부동 전투에서는 북한군 작전지도를 노획하여 적의 기도를 파악할 수 있었으며, 평양 입성의 선봉이었고, 운산에서 포로로 잡힌 중공군(이 포로는 백선엽의 회고록에서도 등장하는 인물)을 심문해 중공군의 개입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음.
이후 1사단 15연대 3대대장으로 모락산 전투에 참가했으며, 1970년대까지 군에 있으면서 36사단장, 1야전군 부사령관 등을 역임하고 예편하였음. 그 후로 광복회 회장을 두 차례 지내는 등 독립운동 관련 단체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다양한 증언을 남겼음.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1977년에 대통령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음.
안춘생
육군 중장
1912년 ~ 2011년
안중근 의사의 당질로 중국 중국군관학교 10기 보병과를 졸업하고 중국 국민혁명군으로 복무하며 대일전에 참전하였으며 보산지창 전투에서 공적을 세우기도 하였음. 1940년에는 중국군 소령(혹은 대위)으로 군정부 감호대대에 있다가 광복군에 편입되었음. 이후 광복군 1지대 간부로 산시성에서 초모공작과 정보수집 등의 지하공작을 병행하였고, 1942년에는 2지대 1구대장이었다가 1945년에는 독수리 작전에 투입될 국내 정진군 3지구대장을 맡았었음.
광복 후에는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 8기 특별반을 졸업해 임관하였으며, 1951년 육본 감찰감으로 있으면서 국민방위군 사건 재판에서 심판관을 맡았고, 그해 4년제로 개편된 육군사관학교의 교장이 되어 군의 정통성을 바로세웠단 평을 받음. 이후 국방부 차관보와 8사단장 등을 역임하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음.
1976년 광복회장을 맡았으며, 1982년 개장한 독립기념관의 초대 관장을 지냈음.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됐음.
최용덕
공군 중장
1989년 ~ 1969년
중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단기서 군(안휘군벌)의 소위로 복무하다가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투신함. 중국 내 여러 한인 독립운동단체들을 거쳤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김원봉의 의열단이었고 김상옥 의사의 의거에도 지원했다고 함. 1920년에는 한국인 최초의 전투기 조종사인 서왈보(펑위샨 군의 항공대장)의 추천으로 중국 보정항공학교에 입교하여 조종사가 되었음. 1926년에는 중국 국민혁명군에 가담하여 중국군 공군 창설 멤버로서 북벌과 여러 군벌 전쟁에 참전하였고, 중일전쟁에서도 참전하였음. 중국군 시절 최용덕은 교관, 수상비행대장, 공군 지휘부 참모장 겸 공군기지사령관, 공군기지학교장 등 다양한 직위를 경험하였고 1940년에 중국 육군대학을 이수하기까지 했음. 물론, 광복군에도 적을 두고 있어 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장, 참모처장이기도 했음.
광복 후 공군 창설의 뜻을 품고 귀국하였으나 미 군정은 최용덕의 경력을 인정하지 않았고 다른 공군 창설 멤버들과 함께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 훈련병으로 입교해 군사훈련을 받을 것을 통지하였음. 최용덕은 동지들의 반발을 설득해 이 과정을 거쳐 국군에 임관하였으며 이들 7명이 공군의 토대를 닦게 됨. 그 후로는 육군 항공기지부대 사령관을 거쳐 국방부 차관에 임명돼 공군이 육군으로부터 독립하는 데 공헌하였음.
6.25 전쟁 때는 공군사관학교장으로 김포지구 전투에 참전하였고, 1952년에는 2대 공군참모총장으로 재임하며 공군의 토대를 닦고 발전을 이룩해 공군의 아버지 중 하나로 역사에 남게 됨.
1956년에 공군 중장으로 예편. 1953년에 태극무공훈장을,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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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위에 소개한 사람들 말고도 많은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광복 후 국군에 가담하셨으며
그 중에는 6.25 전쟁에 참전해 전사하거나 그 이전에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도 적잖이 있음.
또한 기록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부재한 탓에 행적이 확인되지 않는 분들마저도 좀 있음.
최악이지만 최덕신 같이 월북한 사례도 있고...
하지만 많은 애국지사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셨고, 되찾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쳐 싸우셨다는 사실만큼은 달라지지 않음.
아래는 광복군 출신 중 국군에 들어가 활동하신 이들의 명단임.
와 이건 실베 + 힛갤감임 - dc App
칭찬이냐 욕이냐 - dc App
매우 칭찬인데스웅.. - dc App
어떻게 그렇게 나쁜말을...
참전용사라고 보기엔 좀 그렇긴 한데 뭐 당장 초대 국무위원 중에도 많긴 하지 지청천 이범석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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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오바 같음. 일부 광복군이 그랬을지는 몰라도 친일파가 국군에 들어온 건 미군 + 초대 정떡의 콜라보 아닌가?
독립유공자 출신 6.25 전쟁 참전용사들
손원일 중장도 ㅇㅇ - dc App
저걸 갈라치기 하는건 벌레 버러지라고 부르기도 아까운 좆병신 앰창 새끼들임. 나라사랑한단 마음으로 광복 5년만에 터진 전쟁에 자발적으로 나섰던 독립 유공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딱 정떡 묻히고 비벼댈려고 발악하는 인성 파탄난 씹새들
글쓴게이가 직접 답글 달아놓은 댓글의 내용이 궁금하네 일단 병신이니까 예전에 미리 차단해서 안 보이는 것 같은데
어떻게 얻은 귀한 독립인데.. 독립된지 얼마됬다고 다시 같은 민족끼리 갈라져서 싸우게 된 현실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글고 무명용사 엔딩도 많겠지 - dc App
하루빨리 자살좀 해줬으면 - dc App
김홍일 장군을 안 다룬다고 전술하고 아래아래에 다루는 건 왜 그랬어?
아 누가 김홍일은 그래도 다뤄야하지 않냐고 해서 추가한 건데 정작 원래 안 쓴다고 얘기한 걸 깜빡하고 안 지움;
저 사람들 빼고 90%이상이 일본군 만주군 출신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