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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남북한 사이의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나는 세계 평화 유지군으로서 유엔의 첫 번째 주요 시험이었던 6.25 전쟁에 대한 벨기에의 기여를 되돌아보려 한다.


1950년 6월 25일, 공산주의 조선인민군이 대한민국을 침공하기 위해 국경을 넘었고, 유엔 안보리 결의안의 지시에 따라 대한민국을 지원하기 위해 벨기에 군대를 남한에 파견하는 행동을 취했다.


직업군인, 예비군, 징집병이 이에 봉사를 할 수 있었고, 당시 대한민국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약 2,000명의 벨기에인들이 신속히 자원했다.


그러나 징집은 제한되어 이들 중 700명만이 해외 출병을 위해 선발되어 독특한 갈색 베레모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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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한국 의용군(Corps Volontaires Corea)이 처음으로 복무했다.


벨기에 제1대대(1 Bataillon Belge)는 1950년 12월에 도착했다.


첫 번째 신병 소집에서는 한반도에서의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광범위한 훈련이 이루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웃 룩셈부르크 대공국의 자원 봉사 소대도 포함된 벨기에 유엔 사령부(BUNC)가 앤트워프에서 카미나 호(KAMINA)를 타고 항해하여 1951년 1월 31일 대한민국 부산에 도착했다.


벨기에 제1대대는 미국 제3보병사단에 배속되었다가 1951년 8월 벨기에 제2대대로 대체되었다.


벨기에 제2대대는 1955년 6월까지 한국에 주둔했다.


여기에는 전쟁 기간 동안 벨기에 대대와 함께 복무한 44명의 룩셈부르크 자원병도 포함되었다.



한국에 도착한 후 추가 훈련을 받아야 했고 벨기에인들은 먼저 왜관 지역에서 공산주의 게릴라들을 상대로 순찰을 하면서 한국전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이후 BUNC는 1951년 3월 7일 한강을 따라 서울 인근의 미 제3사단과 함께 전투를 벌였다.


다음 달에야 벨기에군은 설마리 전투에서 진지한 전투 작전을 펼쳤다.


8월에 벨기에 제1대대는 벨기에 군대의 전력을 유지하고 UN 회원국으로서 "경찰 활동"에 대한 국가적 약속을 유지하기 위해 배와 비행기로 온 벨기에 제2대대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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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에 참전한 일부 국가들은 많은 기여를 할 수 없었고 위험을 피하고 전쟁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대부분 전선 뒤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형식적인 군대를 주둔시켜서라도 전반적인 군사 작전에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이것은 한국에서 많은 전투 경험을 치르고 수많은 명예를 얻은 벨기에 파견대에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BUNC는 1951년 10월에 학당리 전투, 1953년 4월에 잣골 전투에서 싸웠으며 휴전 협정을 한 후 그 병력은 계속된 전투로 인해 1954년 12월 30일 약 200명으로 줄어들었고 마지막 벨기에 군인들은 1955년 6월 15일 한국을 떠났다.


복무 기간 동안 BUNC는 대대 깃발에서 레오폴 1세 훈장으로 인정받는 벨기에 당국으로부터의 표창 4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의 표창 1개, 한국 대통령으로부터의 표창 2개와 함께 수많은 개인 훈장, 메달 및 용감한 군인에 대한 표창을 받았다.


룩셈부르크의 병사들도 한국에 대한 복무에 훈장을 수여받았다.



출처:https://belgieroyalist.blogspot.com/2010/11/korea-volunteer-corps-of-belgium.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