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군갤에서 시진핑이 어떻게 국가주석이 된거냐는 글을 읽고 남는 시간 키보드를 두들겨 보았읍니다... 완장님의 허락을 구합니다.
중국 정치의 골자는 과두정치입니다.
중국 혁명 세대는 문혁을 거치면서 다음의 교훈을 뼈에 새기는데 '대중을 선동질하거나(마오쩌둥) 혼자 독주하는(류사오치) 자는 졸라 위험하다' 라는 것 입니다.
마오쩌둥 사후, 류사오치의 숙청으로 몰락한 주자파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예젠잉(섭검영)은 상대적으로 덜 위협이 되었기에 문혁을 거치면서도 혁명 1세대라는 상징성 덕분에 형식적인 중공원로대우를 받으며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예젠잉 덕에 덩샤오핑은 문혁4인방을 단칼에 숙청하는데 성공하고 중공의 1인자가 될 수 있었죠. 덩은 이후 국가주석이 아닌 중앙군사위 주석직에 머물면서 국정을 운영했는데 89년 6월 4일 천안문에서 공산당이 시위 통제에 실패하자 4대 국가주석인 양상쿤(양상곤)의 동생 양바이빙이 제남군구의 양가군을 (27집단군) 몰고와 천안문을 피바다로 물들이는 천안문 혈해 사건을 일으킵니다.

왼쪽 예젠잉, 오른쪽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
일찌기 덩은 예젠잉을 가르켜 '천하에서 예젠잉을 당해낼 사람은 없다.' 라고 할 정도로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과 추진력이 남달랐습니다.
원래 덩은 자신의 후계로 공청단의 후야오방(호요방)과 자오쯔양(조자양)을 내정해두고 있었으나 학생과 시위대에게 동적적이고 진압에 매우 비협조적이었다는 이유로 추궁된 두 명의 총서기들을 연달아 날려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정치 구도 재편과 동시에 공청단을 달래야했습니다. 덩은 오랜 적인 상해방과의 타협도 동시에 추진해야 했기에 덩은 양상쿤 이후 5대 국가주석에 상해방의 장쩌민을 올려주면서, 6대에는 공청단파의 후진타오를 지명합니다. 즉, 상해방의 장쩌민은 차기 주석 지명권을 박탈 당한채로 국가 주석에 올랐고, 따라서 7대 태자당의 시진핑은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합의로 권좌에 오른 인물인 것이죠. 장쩌민은 일종의 정치적 거세를 당한 국가주석이 된 셈입니다.

덩의 좌측이 후야오방, 우측이 자오쯔양
이 일화들을 통해 알 수 있는건 중국의 국가 주석은 가장 강한 자가 아니라, 과두정치집단에게 가장 위협이 적은 인물이 선출되어 왔습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7인의 공산당 정치국 상임위원회입니다. (후진타오 집권 17차 상임위원회는 9인체제였었습니다.) 최고의사결정기구인 동시에 일종의 원로원인 상임위원회는 차기 중국을 지도할 인재들을 지명하는 권한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16인으로 이루어진 정치국 중앙위원회 (예비상임위원회)입니다.
차기 중국 과두정치의 핵심권좌에 오를 수 있는 티켓을 쥐고 있는 예비상임위원회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은 무엇일까요?
현체제에 위협이 되지 않는 이들이 선출 됩니다.
현체제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대중을 선동하지 않고, 현 주석과 상임위원회의 공통된 이해에 부합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즉, 중국 국가 주석은 장기적인 비전과 예리한 현실감각으로 중국인민을 미래로 인도할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무난한 사람이 되는 것이 과두정치집단 체제에서는 가장 위협이 덜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러니 당시 상해방의 장쩌민과 공청단의 후진타오가 차기주석 배경으로 당시 약체이자 저주받은 언더독 집단 태자당을 지명하고 합의하는데 도달할 수 있었지 않나 합니다.
그렇다면 왜 시진핑이었을까요? 이야기가 복잡하지만 두 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장쩌민과 상해방은 5대 국가주석 취임 초기 조직적 부패 연판장 사건으로 몰락할 뻔한 위기를 겪습니다.
국가주석이 된 장쩌민은 상해방과 일가를 중심으로 정,재계를 장악해나가는데 인력이 부족했습니다. 상해방의 태생적 한계가 드러난 것으로 상해지역 출신으로 구성된 지역 향우회 느낌의 정당이었기 때문입니다. 장쩌민은 외부인사를 끌여들여서 이를 해결하려 했는데 이렇게 새로 조직된 상해방을 장쩌민을 중심으로 새롭게 모인 연합이라 해서 범장파라 불렀습니다. 덩치를 키운 상해방은 각 계에서 세를 불렸는데, 범장파의 새 구성원들은 각각 지역기반도, 경제기반도 서로 다른 지역 사람들이라 의도적으로 또는 의도치 않게 남의 밥그릇을 자꾸 침해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밥그릇을 자꾸 침해 받아 빡친 다른 계파의 간부들이 7개성 연판장에 연합 서명을 했고, 총대를 멘 천시통(진희동) 북경 서기가 95년 전인대에 이 연판장을 발표하며 범장파의 숙청을 도모합니다. 목에 칼이 들어온걸 밀어낼 힘이 없었던 장쩌민과 상해방 절대절명의 위기에 보시라이의 아버지 중공원로 보이보(박일파 薄一波)가 등장하여 번개처럼 사건을 마무리합니다.

연판장 사건으로 18년형을 선고받는 천시통
천안문 혈해사건 당시 북경서기로서 혈해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상태였습니다.
천시통은 말년에 '내가 당시 북경계엄지휘사령관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었다는걸 이제야 (리펑의 회고록을 읽고) 알았다.'며
천안문 혈해사건의 중심에 있었음을 강하게 부인하며 억울해 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국무원 총리였던 리펑이 모든 배후였을까요.
연판장에 서명한 당 간부들을 번개처럼 역습하여 숙청해버린 것 입니다. 연판장 서명 대부분의 주요 당 간부들은 숙청되거나 보직해임되고 총대를 멧던 천시통 북경서기가 모든 음해사건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18년형을 선고 받으며 사태가 마무리 됩니다. 장쩌민과 상해방은 진심으로 보이보에게 감사해 했기에 보이보의 아들 보시라이를 정치적으로 끌어주고 예비상임위원회 16인에 들어올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장쩌민 재임 내내, 보시라이는 장쩌민의 충신이 되죠.
연판장 사건으로 모골이 송연해진 장쩌민은 정치적 지지기반이 없으면 당장 국가주석직이 문제가 아니라 퇴임 후 노후도 불확실할 것 같다는 위기감을 느꼈고 미래에 강력한 보험을 들기로 합니다. 일종의 '연합 범장파'를 만들기로 하죠. 대상은 문혁으로 저주받은 자들 태자당이었습니다.
장쩌민이 태자당과 접촉하여 중앙 정치로 복귀작업을 시작하려 할 때쯤 이를 정확히 간파한 사람이 중공원로 예젠잉의 둘째아들 예쉔닝입니다.
예쉔닝은 장쩌민 집권시기 중국 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의 정보부장을 역임하면서 공산당 간부들이 누구를 어디서 어떤 목적으로 만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던 극소수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예젠잉이 일찌기 최약체였던 덩샤오핑을 도와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았던 문혁4인방을 단칼에 숙청하고 중공제일인으로 세운 무시무시한 통찰력과 추진력을 가지고 있었듯이 둘째아들 예쉔닝 역시 아버지 못지 않은 날카로운 안목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덩의 킹메이커 아들은 시진핑의 킹메이커 킹메이커 집안 ㄷㄷㄷ
예쉔닝이 봤을 때 5대 국가주석 장쩌민은 덩이 상해방과의 화의를 위해 선출시킨, 차기주석지명권이 박탈된 거세권력이었을 뿐, 상임위원회 입장에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국가주석이었습니다. 태자당이 장쩌민의 후광을 얻는다고 해도 장쩌민의 목적을 생각하면 명확한 한계에 부딪힐게 뻔했고 무엇보다 태자당의 불구대천 원수가 되는 상해방과 태자당이 정치적으로 연결된다는건 하늘이 용납할 수 없는 불륜연합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쉔닝은 장쩌민이 태자당에 더 영향력을 뻗치기 한 발 앞서 태자당 유력인사들의 자녀들을 대거 국비로 해외 유학을 보냅니다. 무려 2천~3천명에 달하는 규모의 정부 유학프로그램을 꾸려낸 것입니다. 태자당 2세들은 예쉔닝의 지원아래 스위스, 소련, 독일, 영미 등으로 다양한 전공을 선택해 도피유학을 떠났습니다. 예쉔닝의 선수로 장쩌민은 태자당과의 미래를 담보할 직접적인 정치끈을 연결하진 못 했지만, 태자당과의 교류를 재개한 덕으로 나름의 세력을 만드는데는 성공합니다.
어쨌든 때가 되어 예정된 6대 국가주석 후진타오 집권이 다가왔고, 시간이 흘러 이 후진타오도 물러나야 할 시기가 오자 정치적 견제와 지지 기반이 필요했던, 그리고 주석 지명권이 애초에 없었던 장쩌민은 상해방의 일원인 상해서기 천량위(천양우 陳良宇)를 7대 국가 주석으로 '추천'하였고, 후진타오는 후진타오대로 오랜 동지 원자바오(온가보)나, 리커창(이극강)을 '지명'하고자 했으나 5대 주석 취임 초기와는 달리 강력해진 장쩌민과 범장파의 강한 반발에 부딪힙니다.

상해방, 공천단, 태자당의 마지막 좋았을 한 때
결국 가장 중도적이면서 약체인 태자당에서 공통의 합의가 이루어지고, 후진타오가 시진핑을 지명하자 장쩌민이 수락합니다. 이렇게 두 명의 국가주석의 지지를 얻은 시진핑은 또 다시 정치국 상임위원회와의 합의를 통해 7대 중국 공산당 국가 주석에 오릅니다. 그리고 시진핑이 국가주석에 오른 직후 예쉔닝이 해외로 도피시켰던 태자당 3천인이 기가막힌 타이밍에 귀국하며 정, 재계의 주요인물로 합류해 시진핑 집권시기의 강력한 인력풀이 되었죠.
제일 독재 안할줄 알고 밀었더니
옛날 지역 당서기 시절 인터뷰할때만해도 튈만한 발언 전혀 안한거 같은데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듯
짱깨는 그냥 딱 둘중 하나일듯. 지들끼리 싸워서 갈기갈기 찢어지거나 존나 강력한 외국 군대가 들어와서 개박살을 내거나
통일해서 패권국먹은 역사가더길다 - dc App
그거 두개로 안 ㅈ망하는 나라가 있음?
아니 그렇게 돼야 한다고
서로 견제하고 그나마 중립지킬줄알아서 만들어준건데 통수침 ㅋㅋ
대외적으로 중국의 계파정치는 능력과 규칙에 의한 견제와 경쟁이라 알려졌는데 글 대로라면 사람으로 두는 노룰 바둑이구만 ㄷㄷ
가장 사고 안 칠 인물로 뽑는게 의외네 신기하다
시진핑이 발톱 숨기는 능력은 역대급 한줄 요약 긑
재밌네여 이야기 좀 더 풀어줘요 보시라이라던가
생각해보니 중국은 정치체제가 과두정+독제정 섞인 느낌이였지
재밌다
나름 상식적으로 굴러가던 시스템인데... 사드 사태 전까지 한국에서도 중국 이미지가 굉장히 좋아서 중국의 경제발전을 본받자 그러고 중국어 배우는 게 유행하고 그랬지
덩이 개혁개방만 있는게 아니라, 텐안먼같은 복고적 면모도 있는 복합적 인물은 맞는데, 저 당시엔 보수파한테 개혁개방 작살나지 않으려면 상해방 세우는건 오히려 덩의 선택이었을껄? 가뜩이나 세력약한 상해방 눈치를 덩샤오핑이 볼 이유가 없음
경제 고삐풀자는 상해방vs내각 경제관료 중심의 공청단 구도는 덩샤오핑이 일부러 견제&균형을 위해 의도했다고 보는게 맞을꺼고, 목적은 오히려 태자당(이전의 원로 복고파들)이 득세 못하게 하려고 둘을 키워놨다고 보는게 맞지 않을까?
근데 태자당은 군부나 국영기업 기반이 워낙 탄탄하다보니, 무시못할 세력 계속 유지한 채로 있다가, 장쩌민이 세력연대를 위해 복권을 허용해준 틈을타고 급성장한 거고 (장쩌민이 그나마 군권장악 제대로 한건 거의 임기 끝무렵이라고 하니까)
태자당 세대는 시대에 맞춰와서 지방관/국영기업 업적쌓고 속속 복귀하는데, 보시라이 이전에는 그냥 시류에 어긋나지 않게 각자도생 출세를 보고 움직이다 보니 생해방vs공청단 끼리 별 경계못하고 싸우다가 태자당이 쥔 견고한 기반을 너무 간과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