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9월, 솜 전투에서 49대가 처음으로 등장한 전차는 전쟁에서 필수불가결한 무기가 되었고, 전쟁 말 연합군이 보유한 전차는 무려 3,300여 대에 달해 존재감을 뽐냈다.
한편 일본에서는 개전 초기 중국 대륙의 칭다오에서의 전투를 제외하면 본격적으론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고, 이 때문에 일본군의 장비는 러일전쟁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에 머물러 빠르게 구식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1915년 임시군사조사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임시군사조사위원회의 조사는 참전국들의 군사에 관한 용병술, 병력, 편제장비, 군수품 소모, 위생, 전시산업, 국가총동원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었고, 특히 무기 및 항공기 분야의 추세, 통신, 방공 등에 중점이 놓였다.
또한 1915년 3월, 당시 육군대신은 1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군사와 관련된 여러 제도에 반영하는 것을 목적으로 육군대신 감독 하에 제도조사위원을 설치하였다. 군사 여러 제도는 각각 군정, 통수, 교육을 담당하는 이른바 육군의 최고 요직인 육군성 군무국장과 참모본부 제1부, 교육총감부의 관할 분야에도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위원에는 위원장인 육군 차관을 비롯하여 육군 3장관들과 과장들, 임시군사조사위원들이 포함되었다.
1924년 1월 중순, 제도조사위원회는 본격적인 의견 수렴을 시작했으며, 3월 26일부터 6월 28일까지 21번에 달하는 회의를 진행하였다.
21번에 달하는 회의 중에서 전차부대의 창설이 논의된 것은 3월 26일의 첫 회의 때로, 해당 회의에 앞서 제도조사위원회 산하의 군사조사반이 예비 안 작성에 필요한 참고자료를 작성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전차에 대해' 라는 제목의 자료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유럽 전역 중, 견고한 진지의 공격 작전 때 준비 포격의 시간을 극도로 감소시키거나 아예 실시하지 않기 위한 창의력은 전차를 낳았다. (중략) 앞서 이야기한 대로 전차는 자칫 단순히 견고한 진지를 파괴하는 데에만 사용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현재 영국과 프랑스 등 여러 국가들이 진지전은 물론, 운동전에서 이를 사용하고자 하고 있다.”
(중략)
그리고 전차는 열강국가들만이 보유하는 것이 아닌, 유럽의 소국들도 이를 보유하고자 하고 있으며, 최근 영국 장교가 발표한“장래의 전쟁에 대한 고찰”에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
"회전에서의 중요한 수단은 공격이며, 현재 공격에 동원되는 주요 병종은 보병이지만, 장래에는 전차가 될 것이다. 때문에 한쪽 군대가 우세한 전차를 보유하면 결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으며, 장래의 회전은 우세한 전차를 갖기 위한 경쟁의 장의 될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국군의 편제에 전차부대를 보유하는 것은 매우 긴요하다.”
해당 자료 이외에도 3월 11일에 영국 전차부대가 독립된 병과로 발전했음을 알리는 자료를 작성하고, 3월 20일에는 영국과 프랑스, 미국의 전차부대의 편제를 정리한 자료를 작성하는 등, 군사조사반의 중견 장교들은 구미 각국의 전차에 관한 최신 상황을 전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작 전차부대 창설안 작성 단계에서는 분위기 사뭇 달랐다. 3월 20일, 군사조사반의 자료를 수령한 이후 제도조사위원회가 작성한 전차대 창설 초안은 다음과 같았다.
1. 장래전에서의 필요를 고려하여 다음과 같은 안 중 하나를 선택해 전차부대를 신설한다.
제1안 보병학교에 전차 교도부대로 1개 대대(2개 중대 구성)를 설치한다.
제2안 1개 독립전차연대(2개 중대 구성의 2개 대대)와 보병학교 교도대로 1개 대대(2개 중대 구성)을 창설한다.
2. 각 안에 소요될 것이라 추산되는 경비는 다음과 같다.
제1안 초기비용: 2,893,000엔 유지비용: 243,200엔
제2안 초기비용: 8,442,000엔 유지비용: 818,300엔
(중략)
장래의 추세를 고려하면 제2안을 희망하나, 경비 절감을 위해 제1안을 채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리라 여겨진다.
이상적인 안으로 제2안이, 현실적인 안으로 제1안이 병기되어 있긴 했으나, 대대적인 예산 삭감이 예고된 상황에서 경비가 세 배 가까이 드는 제2안을 채택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전차부대 창설을 다룬 제1회 회의 자체는 더 가관으로, 수 시간에 걸친 회의 중 전차부대 창설에 대해서는 전부 합쳐 다섯 번만이 언급될 뿐이었다. 그 언급중에서도 직접적인 의견 표출을 한 것은 단 한번으로, 그마저도 제1안을 지지한다는 원론적인 얘기에서 그쳤다. 일본 전차부대의 규모는 한 마디의 지지 발언을 통해 1개 대대로 결정되었다.
같은 시기 논의된 항공부대와 방공부대와 비교해 보자면 더욱 초라한데, 항공부대와 방공부대 모두 중요한 사안으로 평가되어 다양한 논의가 오갔다. 현재 항공기들의 단가는 어떤지, 민간에서의 항공기 제작 능력은 어떤지, 대만이나 조선 같은 식민지에 방공부대를 설치해야 하는지와 같은 주제들을 놓고 수 시간 동안 격론이 벌어졌고, 주제들 중 일부는 다음 회의에도 논의되었다. 물론 전차부대에 관한 이야기는 이후 회의에서는 일언반구도 언급되지 않았다.
일본군에게 있어 칭다오 공략전에서 이미 운용해본 바 있는 항공기에 비해 전차는 생소한 무기였고, 거대한 가상 적국인 러시아의 붕괴는 일본군의 대규모 육상전 가능성을 크게 감소시켰다. 때문에 당시 군비 축소로 인해 예산 획득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일본 육군에게 비싼 전차는 계륵같은 존재였다.
일본 육군 내부의 알력 다툼도 문제였다. 1차 세계대전 중 서부 전선에서 기병이 큰 피해를 입고,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도 군축의 요구가 커지자, 기병은 비용만 많이 들고 필요가 없어졌다는 기병무용론이 육군 내부에서 어느정도 목소리를 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기병을 폐지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육군 기관지에서 나와 육군 내부의 파벌 싸움으로 번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동안 기병이 수행해오던 기동전의 주요 병기로 떠오르던 전차 부대의 창설은 기병부대와의 새로운 알력을 낳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주요 간부들이 미온적이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일본 전차부대는 그 탄생부터 쉽지 않았다.
예산미쵸
일본은 그냥 철저하게 보병 지원용으로 썼지... 그나마 남방작전 초반에 기동전으로 재미본 게 다고
뭐 독일이 전차로 재미보고 난 뒤에는 전차뽕 맞은 사람들이 교리 좀 손보긴 했음 그걸 실전에서 써먹을 일이 없어서 그렇지
결국 돈이 문제네
1머전때는 일본이 영국하고 관계 아주 좋았을 때자나. 그때 일본해군함선이 지중해파견나간 적 있다고 하던데, 육군은 서부전선에 참관단같은 거 보내지 않았나?
대사관 무관 같은 사람들이 전선 나가고 참관하기도 했고 참관단 꾸려서 참관한 적도 있지
일본에서도 기병무용론이 나오다니 말박이는 슬프다 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