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포 앞바다 무장상선 나포(唐浦前洋武裝商船拿捕) 사건 개요.  

당포전양승첩지도(唐浦前洋勝捷之圖)는 1604년 6월4일~5일, 경상남도 통영시의 당포(唐浦) 앞바다를 침범한 일본 무장 상선을 나포한 사건을 담은 기록화다. 승첩지도(勝捷之圖) 그림에는 조선수군 25척의 함선이 맹렬한 화공을 퍼붓고 일본 선단의 좌현에 2척 선수에 2척 우현에 1척 5척의 판옥선(板屋船)이 근접전으로 활을 쏘며 맹공격을 한다.  

쌍범대선(雙帆大船)은 그들의 운명처럼 긴 붉은 깃발이 꺾어지면서 바다에 떨어지는 모습이 당포전양승첩지도(唐浦前洋勝捷之圖)에 그려져 있다. 일본선단에는 특유의 일본식 머리를 하고 창칼을 휘두르며 저항하는 왜군의 모습이 보이고, 조선수군 판옥선 사이에는 소형 하후선(何候船)이 해상을 누비고 있다. 그림상의 수군은 신여량(申汝梁)의 승첩지도에서는 233명이며, 일본인 선단의 저항하는 사람은 21명이다. 조선수군의 군선 25척이며 만호 노홍의 당포전양승첩지도(唐浦前洋勝捷之圖)에 나타난 군선(軍船)은 23척 승선인원은 130명 하후선(何候船)은 15척이었다. 1604년 선조(宣祖)는 이 해전의 전승(戰勝)을 기념하여 “당포전양승첩지도”를 참전 장군 28명에게 하나씩 하사하고, 명나라에서는 이경준(李慶濬), 신여량(申汝梁)과 최초의 발견자인 미조첨사 이섬(李暹)장군에게 별도로 포상하였다.  

이 당포전투는 조선인들이 생전 처음 보는 특이한 형태의 검고 큰 배(黑色大船)가 당포 해안으로 접근하면서 시작됐다. 통제영이 위치한 요충지에 정체불명의 선박이 출현했으므로 조선 수군에 비상이 걸리고 판옥선이 줄줄이 출동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건 초기에 선박에 타고 있던 일부 중국인이 국적을 밝히면서 살려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본격적인 전면 공격 결정을 내리기까지 다소 지연시간이 있었다.  

미조항 첨사가 탄 판옥선이 제일 먼저 현장에 도착, 흑색대선의 선원들에게 국적을 밝히고 배를 멈추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의사소통은 되지 않았고 얼마 전까지 임진왜란을 겪은 수군으로서는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당시 통제영에는 또 다른 왜군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첨방(添防)이라는 수군부대를 운용하고 있었다. 적의 침입이 예상되는 음2월에서 음7월까지 6개월간에 해상을 지키기 위한 기동대(機動隊) 형태의 수군 연합부대였다. 전라우수영 15척 판옥선(板屋船), 전라 좌수영 5척 판옥선(板屋船), 충청수영 10척의 판옥선(板屋船)을 합한 30척으로 이루어진 선단이며, 좌목(座目)의 지휘관은 본영에서 10명, 전라좌수영에서 6명, 전라우수영에서 5명 충청수영에서 7명으로 모두 28명의 지휘관이 있었다. 지휘선에 함께 승선한 우후(虞侯) 신여량(申汝梁)과 각 판옥선(板屋船)의 지휘관은 우후(虞侯) 송안정(宋安廷),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우수(禹壽), 첨사(僉使) 이섬(李暹), 절충장군(折衝將軍) 신탁(申琢)․이기남(李奇男), 어모장군(御侮將軍) 송덕일(宋德馹)․임영립(林英立)․맹우증(孟友曾), 보공장군(保功將軍) 조흡(趙潝), 진위장군(振威將軍) 이희삼(李希參)․두기문(杜起文), 소위장군(昭威將軍) 윤기(尹琦), 정략장군(定略將軍) 이명길(李命吉), 정략장군(定略將軍) 노홍(魯鴻), 현신교위(顯信校尉) 노의남(盧毅男), 돈용교위(敦勇校尉) 정흔(鄭昕), 진용교위(進勇校尉) 노인(魯認), 병절교위(秉節校尉) 이희춘(李希春), 어모장군(御侮將軍) 김일개(金一介)․박옹(朴蓊), 정략장군(定略將軍) 김대관(金大寬), 병절교위(秉節校尉) 이자징(李自澄), 소위장군(昭威將軍) 박제(朴璾), 병절교위(秉節校尉) 이광춘(李光春), 옹진현령(甕津縣令) 윤흥용(尹興龍), 장성현감(長城縣監) 손응호(孫應虎)으로 구성된 첨방(添防)부대 였다.  

처음에는 조선 수군이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고 흑색대선(黑色大船)의 중국인은 항복을, 임진난을 겪은 일본인들은 죽음이 두려워, 전투 후에 도망을 가기로 결정하며 일부 중국인을 죽이고 배를 장악하여 대양을 향해 나아가며 조총 사격으로 대항해 왔다. 결국 조선 수군은 흑색대선을 포위한 상태에서 활과 총통으로 일제 공격을 퍼부었다. 단 1척의 배였지만 싸움은 쉽지 않았다. 흑색대선은 서양식 대양 항해용 범선에 가까운 배로 조선 수군의 판옥선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 24시간 이상 지속된 전투 끝에 조선군은 흑색대선 갑판에 올라 저항하는 사람들을 강제로 진압, 항복하는 자는 생포했다.  

흑색대선은 그야말로 여자까지 포함된 다국적 무장상선이기 때문에 무력진압에 성공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흑색대선 생존자들이 털어놓은 배의 정체는 놀라운 것이었다. 이 배는 일본의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명령에 따라 캄보디아와 교역 관계를 체결하기 위해 파견된 무역 사절선박으로 각종 무기로 중무장한 무장 상선의 일종이었다. 이들은 도쿠가와가 지급한 은 500냥을 가지고 캄보디아에서 상아·코뿔소 뿔 등을 사서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귀환하던 중 폭풍으로 조선 해안에 표류해 온 것이다. 흑색대선에는 무역을 중계한 선주 황정(黃廷)을 비롯한 중국인 16명, 일본인 31명(여자1명), 남만인 흑인 1명, 포르투칼 상인 조앙 멘드스(Joao Mendes, 之褑面弟愁)에 이르기까지 총 49명의 여러 나라 사람이 타고 있었다.  

조선 당국의 심문 결과 중국인들은 조선 수군의 정선 명령에 응하려 했으나 일본인들이 반대해 중국인 선원을 살해하기까지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 수군이 일본인들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라 짐작하고 겁먹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조정은 약 4개월 간 포로로 체류한 후에 배의 선주가 중국인인 점을 고려, 국적에 상관없이 모든 생존자를 중국으로 강제 송환했다. 중국 조정은 적국인 일본의 교역에 종사한 선박을 나포한 조선의 대응이 타당했다고 인정, 조선 수군통제사에게 은 20냥을 상금으로 지급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당포전양승첩은 영해를 침범한 외국 선박에 신속히 대응 조치를 취한 조선 수군의 작전 준비 태세를 잘 보여 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임난(壬亂) 이후 조선은 강력한 해상 방위태세를 갖추고 일본과 기유조약(己酉條約)이 체결되기까지 해상의 긴장상태는 계속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중국·일본·캄보디아 등 여러 나라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17세기 초기 동아시아 국제 해상교류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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