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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우리가 모두 알듯이, 나치독일의 패배가 확정된 시기였었습니다. 자세한 묘사가 필요없습니다. 한때 정복했던곳은 탈환당했고, 이제 원래의 독일 본토조차 함락당하게 생겼지요.
천년 제국을 자처하던 제국의 패망은 확실시 되었습니다. 천년은 커녕 100년도 가지 못한채로요.
그러나, 제국은 망했지만,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남습니다. 이번 글에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뤄보자고 합니다.

동프로이센. 과거 호엔촐레른 왕가로 대표되는, 독일을 통일했던 주체인 프로이센의 정신적 고향이자 독일의 또다른 중심지였던 곳입니다.

동부전선이 거의 붕괴하다시피 한 그때, 그곳은 미친듯이 밀고들어오는 소련군에 의해 포위되어있었죠. 베를린이 이미 함락당한 상황에서, 동프로이센을 지켜낼 가망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야전을 벌일 야전군도 제대로 존재하지 않았고, 기동방어를 할 기동부대도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 동프로이센은 소련군을 피해 들어온 피난민들로 가득했죠. 그 이유요? 뭐, 간단했습니다. 죽기 싫으니까요. 적어도 죽음의 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었던겁니다.

소련군은 그들의 조국에서 독일군이 무슨짓을 했는지 똑똑히 보았고, 복수심에 미쳐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복수심은 전쟁범죄를 낳았습니다. 대표적으로 네멜스도르프 학살을 들수 있죠. 소련군의 대표적인 집단적 전쟁 범죄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는 나치당의 프로파간다 덕분에 당대 독일인 모두가 잘 알고 있었죠.


자신들이 동부전선에서 어떤짓을 저질렀는지 잘 알고 있었으며, 이것은 그저 업보일뿐임을 동프로이센군의 독일군 대부분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발악했습니다.


이미 수많은 난민들이 대피한 상황이었습니다만, 그래도 무려 400만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아직 동프로이센에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일군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독일군의 찌꺼기는, 이들을 지키기위해 눈물겨운 분투를 벌이기 시작합니다.

동프로이센 근교의 소련군 사단은 수십개. 직접적으로 공격을 해오는 전선군만 해도 3개. 합하자면, 170만으로, 거의 이백만이었죠.

네, 확실히 감당하는것은 불가능한 숫자였습니다.

비록 '그 게임'때문에 꽤 유명해진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부터 카이저가 제국을 지배하던 시절에 뽑혀나온 구식 야포까지, 모든 포병세력을 동원하여 독일군은 방어작전을 실시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44년 10월부터 시작된 메멜 공방전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둔 이반 바그랴만 대장이 지휘하는 제1벨라루스 전선군은 동프로이센 북부로 밀고오며 두들겨 대기 시작했으며,

이반 체리냐코프스키 대장이 지휘하는 제3벨라루스 전선군은 동프로이센 남부를 맡아, 독일 국방군의 잔해를 쓸어버리기 시작했고,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 원수가 지휘하는 제2벨라루스 전선군은 단치히 회랑에 대한 공세를 개시, 서쪽으로 난 마지막 육로를 틀어막았습니다. 1월 23일까지 이어지던 육로를 통한 탈출은 엘빙시가 이들에 의해 점령되면서 끝나게 되었죠.


이들에게 독일인들이, 그들의 이웃의, 부모의, 자식의, 연인의, 친우의, 그리고 조국의 원수들인 독일인들이 안전한 서방연합국의 점령지로 탈출하게 놔둘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자우켄 장군과 라쉬 장군 이하 70개 사단의 독일군이 시간을 버는동안, 민간인들은 꾸역꾸역 탈출했습니다. 수십만의 피난민이 고텐하펜항과 단치히항을 통해 서쪽으로 탈출했죠. 동프로이센 대관구지휘자이던 - 그러니까, 나치당 고위 당원입니다 - 에리히 코흐는 게거품을 물며, 히틀러가 내린 '모두가 전투병'명령을 언급하며 시민들의 탈출에 반발했지만,

이미 역사의 찌끄라기가 되어버린 나치새끼의 말을 누가 듣겠습니까? 그것도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요. 난민들은 이미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엘빙이 함락된 1월 23일, 되니츠 제독은 발트 함대에 탈출 작전 명령을 하달했으며, 그 명령을 받아든 발트 함대는 한니발 작전을 개시, 동원가능한 모든 함선들을 동프로이센으로 파견했으며,

난민들은 마지막 희망이었던 해로로, 서쪽을 향한 탈출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오랜시간 크릭스마리네에 눌려 제대로된 전과를 내지 못하던 소련 잠수함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 스투벤, 고야,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수많은 수송선들이, 수천의 난민들을 싣고 서쪽으로 향하던 수송선들은 어뢰에 격침당했고, 격침 될때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기껏해야 수백이었죠.


거기에, 또, 소련 육군이 있었습니다. 잠수함대가 막아서는 역할이었다면, 육군은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열세. 분투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단치히가 함락당했고, 고텐하펜항과 노이파르서항이 함락되었습니다. 너덜너덜해진 독일군은 남은 몇뙈기의 땅덩이로 철수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건 헬라항뿐. 희망이 거의 사라진 상태였지만, 아직도 기백만에 달하는 민간인과 30만에 달하는 부상병이 남아있었고, 독일군은 그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최후의 희망이 남아있는 비스툴라만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5월, 베를린은 함락되었으며, 히틀러는 자살했습니다. 동프로이센 역시 함락 일보 직전이었지요. 패전이 그야말로 눈앞에 다가와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플렌스부르크에 있는 독일 정부 수반인 칼 되니츠 원수는 포기하지 않고 프로이센의 민간인들을 구하기위해 노력했습니다. 되니츠는 서방연합국에게 민간인들의 탈출을 위해 소련과의 전투를 지속할것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서방연합국은 거절했습니다. 그들이 내놓은 조건은, '무조건 항복. 아니면 궤멸'이었죠.

상황이 이렇게 되자 되니츠 원수는 최후의 명령을 내립니다. 독일에 남은 모든 함선을, 물에 뜰수 있는거라면 뭐든 싹싹 긁어모아 동프로이센으로 향해 민간인들을 구해오라고요.

해군 최고사령부는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빈약한 연료 비축분을 풀었습니다. 이조차 모자랐는지 최후의 독일 잠수함 선단의 연료까지 빼서 풀었죠. 이용 가능한 모든 석유 엔진 선박들은 독일의 최후의 연료나 다름없는것을 받아들고 동쪽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몇일간의 항해 끝에, 최후의 선단이 헬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셀수없는 나룻배들이 그 뒤를 이어 도착했죠. 과거 됭케르크 탈출당시 영국군을 태운 선단을 연상시키는 구성이었죠. 아이러니컬하다면 아이러니컬한 모습이었습니다. 항복 직전인 5월 5일과 6일의 일이었습니다.


야영중이던 잔류병들과 피난민들은 배를 타기위해 우르르 몰려나갔습니다. 포위망 안의 최고 지휘관인 디트리히 폰 자우켄 대장은 질서를 유지하기위해 노력했으나, 역 부족이었죠.


그럼에도 불구, 헬라 항에 모인 함선들은 최대한 피난민들과 부상병들을 태우고자 노력하였습니다. 5월 7일, 황혼무렵에 태울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태운 선단은 이제 킬 항과 코펜하겐 항으로 가망없는 탈출을 시작하였습니다.

온갖 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수km나 이어진 선단이 바다로 나아갔습니다. 예인선, 해상기중기선, 소형증기선, 나룻배, 활어선 등등... 동력이 없어 앞의 배에 끌려가는 배도 있었죠.


소련군의 항공기와 날씨의 궁합으로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으나, 민군을 합쳐 140만여명은 마침내 탈출에 성공하였습니다. 기적이라면 기적이죠. 독일이 항복하는 그 순간에도 탈출은 이어졌습니다. 그 와중에 포위망 안에 남은 70여개 사단의 독일군은 50만이 넘는 사상자를 내며 버텼습니다. 독일이 항복한 5월 8일에도 그들은 전쟁이 끝났고 독일군은 항복했음을 알았지만, 피난민들의 탈출을 위해 전투를 이어 나갔으며, 5월 10일에야 항복하게 됩니다. 최후의 항복의 순간에 남아있던 독일군은 5만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희생으로, 수백만의 피난민과 부상병들은 서방연합국의 손이 닿는 안전한곳으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배에 타지 못한 피난민들은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군에 붙잡혀 온갖 고초를 겪고 죽거나 자신들의 고향에서 쫓겨났으며, 탈출에 성공한 피난민들 역시 모두가 영구적으로 고향을 잃었습니다. 최후까지 싸우다 항복한 5만의 군인들 중에서도 오직 40%가량이 독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며, 나머지는 시베리아의 수용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죠.

그리고 이 탈출작전의 배경이 되었던곳, 동프로이센도 그 이름을 잃어, 칼리닌그라드 주가 되었습니다.

동부전선에서의 온갖 악행은 그런 형식으로 돌아왔습니다. 기적과 업보의 씁쓸한 콜라보였죠.



여담.


탈출작전이 거의 끝난 5월의 동프로이센.

마지막으로 남은 현장책임자중 하나이던, 쇠퍼 대령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한무리의 남자들이 접근했습니다.

이들은, 동프로이센 지방에서 전통적으로 농사를 지어오던 농부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촌부들. 아마도 그의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융커들의 소작농이었겠죠.


전쟁의 끝물에서야 징집되어, 군인들과 피난민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주고, 짐을 나르거나 사람을 나르는 등의 허드렛일을 하던 사람들이었죠.


그들은 대령에게,


"대령님, 우리들은 몇주간 열심히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혹시 우리도 그 철십자 훈장이라는 것을 받을 수 있을까요?"


쇠퍼 대령은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잠깐동안요.

그리고 그는 철십자 훈장을 한움큼 집어왔습니다. 이제는 휴짓조각보다 못한, 6년전에 비해 질이 현격히 떨어진 그 훈장을 말이죠.

그는 촌부들에게 엄숙히 훈장을 달아주었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럼. 자네들은 충분히 받을 수 있지. 그래, 받을 수 있고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