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과정보면 사관이 왜 그런식으로 썼는지 알수 있음.

1593년 11월 1일, 일본군이 한양에서 영남 지방으로 철수한 상황에서 선조는 한양으로 환도해 정릉동 행궁에 머무름. 당시 명나라군 경략 송응창은 남부지방으로 진r군해 주둔할 명나라군에게 군량을 조달하는 문제로 조선 조정을 독촉했었고 이에 조선 조정에선 1593년 11월 1일 선조가 환도한지 얼마 안된 상황이니 황해도 해주에 있는 세자가 병이 나으면 충청도와 전라도로 내려가 군량 조달을 독촉하겠다고 송경략에게 회신하기로 함. (출처: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611001_003)



그리고 11월 9일 중국사신이 도착해서 선조는 중국 사신을 맞이해 기름칠을 함(출처: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611009_003)



그 다음날인 11월 10일. 선조가 영의정 류성룡과 영부사 심수경을 비롯한 대신들이 있는 자리에서 양위하겠다 말함. 참고로 선조는 이미 그전에 5차례나 양위 소동을일으켰음. 그리고 이미 온 중국 도사한테 양위하겠다는 봉서를 주겠다고 말함. 당연히 대신들은 다 반대함. 이때 사관도 지긋지긋했던지 다음과 같이 평함.

사신은 논한다. 2백 년 동안 신성(神聖)들이 서로 전해오던 큰 왕업(王業)을 전하(殿下)의 몸에 이르러 경솔하게 버리고 파월(播越)했다가 다행히 하늘의 위령(威靈)을 힘입어 구물(舊物)을 회복, 환도하기는 했다. 그러나 전하로서는 통렬하게 자신을 각책(刻責)하는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전위(傳位)하겠다는 분부야말로 간담(肝膽)에서 나온 것이니, 대신들로서는 마땅히 상께서 정사를 떠나 손위(遜位)하려는 지극한 뜻을 몸받는 것이 또한 하나의 도리였을 것이다. 더구나 동궁(東宮)이 인자하다는 소문이 여망(輿望)에 흡족했었으니, 명을 받들어 즉위(傳位)하여 하늘과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안되게 하는 것이 무슨 옳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누구 하나 계책을 정하여 승순(承順)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전하의 아름다운 뜻이 마침내 헛된 데로 돌아가게 만들었으니 나라에 사람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출처: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611010_001)



그리고 11월 12일 양위로 골치아플 유성룡한테 자기가 고안한 조총을 내려줌. (출처: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611012_001)



11월 16일 중국 사신이 곧 떠난다고 전별연을 열어준 다음 신하들에게 양위한단 봉서를 내림. 이때 선조가 하는 말이 가관인게 자기는 연회 끝난다음 승지를 통해 중국 사신한테 전달하려했는데 중국 사신이 갑자기 일어나서 못줬다며 신하들에게 양위하겠다며 말함. 유성룡은 총대매고 선조에게 양위하지 말라고 봉서를 도로 바치고 선조는 알았다며 6차 양위 소동을 마침. (출처: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611016_005)



11월 17일 중국 사신이 떠나서 선조가 전송해줌. (출처: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611017_001)



중국 사신 온 상태에서 갑자기 양위쇼 벌이는데 조총을 준게 과연 그냥 자기가 고안해서 준게 맞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괜히 신하들이 딴 마음 품을까봐 류성룡한테 조총줘서 무언의 경고를 한 걸 수도 있음. 즉 일종의 사전 작업을 한거지.

이번에 양위한다 말했지만 진짜 양위할 생각 없다. 이 조총을 보고 군권이 누구한테 있는지 명심해라. 혹여나 따른 맘 품으면 재미없을 줄 알아라

이런 메세지라 볼 여지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