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에서 1사단과 미군 전차대대를 이끌고 평양을 점령한 백선엽 장군,


제5대 육군사관학교 교장 김백일,


1,2,3대 해병대사령관들인 신현준, 김석범, 김대식,


이 인물들의 공통점은 모두들 해방후 대한민국으로 내려와 한국전쟁에 참가했다는 점과 만주국 산하 조선인 특수부대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했다는 점이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9월 15일 만주국 치안부 예하 부대로 창설이 결정되어 동년 12월 14일 1기 인원이 입소, 1939년 3월달에 정식으로 창설되었고,


1기에는 250명 모집에 1천여명이 응시하는등 경쟁률이 꽤 높은수준이였음, 당시 응시 자격으로는 국어(일본어) 구사가능은 필수에다가,


18세에서 20세 사이의 보통학교(중학교)이상 학력을 소유한 신체건장한 남성이였음, 


간도특설대의 구성은 본부에 부관(참모부), 군수, 의무, 기박련(화기중대) 2개 중대, 보병련 1개로 구성되었고,


2기 보충과 동시에 1개 중대를 새로 창설하여 부대 해산까지 이러한 구성을 유지함,


특설대에 복무하는 인원들은 아무리 많아도 300여명이 넘지 않았으며 이러한 특징때문에 부대장은 보통 소좌나 중좌정도가 맡았음,


만주군 소속 조선인 특수부대라는 자긍심때문인지는 몰라도 당시 기준으로도 엄격한 군기와 군율을 보유하고 있었고


심지어 소속 하사 한명이 위병소 근무태도 불량으로 지적당하자 휘하 병사들 앞에서 권총자살한게 자랑이랍시고 퍼트리고 다녔음,


당연히 부대 내부에선 폭언 폭설 폭행 삼중세트로 붙어있었고 일부 경우에는 탈영후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투항하는 사례도 있었음,


특설대의 간부 구성은 절반은 조선계 절반은 일계(주로 일본군에서 전군) 장교로 이루어져 있었고 기타 하사관들에는 조선인들이 많았음,


이 특설부대의 첫 토벌기록은 근처 동만지역에서 찾아볼수 있음, 이들은 주로 민가를 급습하여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무고한 양민들을 팔로군 항일전사로 몰아가 체포해 가는등 역시 일본군다운 토벌기록을 자랑했음,


특히나 시체훼손이나 기타 끔직한 행위도 서슴치 않아 근처 양민들에게 악명을 쌓았음,


이와 반대되게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에는 특설대가 토벌을 나갔다면 근처 양민들에게 돈을 제공하고 숙식을 해결하거나(돈의 출처는 불명확),


혹은 주민의 일손을 돕는등 '조선인 부대는 우리에게 친절하다'라는 선입견을 세겨놓아,


팔로군이 포위했을 시기에도 근처 마을 원로가 팔로군을 잘 설득(팔로군도 양민편 특설대도 양민편이라고 설득)하여 부대로 복귀할수 있었다고 함,


이러한 특설대가 큰 피해를 입은 시기는 다샤허 전투로 1로군 3방면군 병력들이 단체부락을 공격하여 출동한 특설대와 만주군을 급습하여 큰 피해를 입힌 전투임,


항일연군(위 1로군 병력)들은 부락을 공격하여 어그로를 끈 뒤 도로에 물구덩이를 파놓아 출동하던 만주군 트럭들이 함정에 빠진사이에 공격하였음,


다샤허 전투로 특설대 16명을 포함하여 만주군 200여명을 살상하는등 큰 전과를 거두었음,


만주군은 이 전투에서 사망한 특설대원 하나하나에게 만주군 훈장을 추서하는등 이들을 크게 치하하였음,


특설대는 1943년에 러허 성으로 출병하여 거기서도 토벌(이라기엔 무차별 초토화 작전)을 벌였음,


1944년 말에 특설대는 만주군 예하 철석부대로 편성되고 이예 따라 재편성되었음,


첫번째로 일본군과의 연락부를 설치하여 일본군과 대등한 위치에 있다고 부각시켰고 보급품 또한 일본군 정규 갑사단에 보급받는 물품을 보급받았음,


군마도 몽골에서 들여온 최상의 군마들이 배속되었음,


러허 성에서 특설대는 무려 마을 주민수보다 더욱 많은 수의 체포인원/사살인원수를 자랑하며 이러한 토벌 '전과'들을 크게 축하하였음,


간도특설대의 최후는 1945년 8월 소련의 대일참전과 함께 시작되었음,


한때 일본 최정예를 자부했던 관동군과 만주군은 태평양 전쟁의 여파로 어중이 떠중이 예비역들과 어딘가 수상쩍은 중국계 장교들만 남았음,


류펑줘도 중국계 장교들중 하나로 어릴때 일본인의 가옥 철거에 항의하던 부친이 맞아죽자 이 사건을 기점으로 항일기조를 가지게 되었음,


비밀리에 항일조직에 들어가 만주군 장교로 임관한 류펑줘는 소련군의 침공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 정치범들을 해방시키는등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함,


다른 만주군 부대도 마찬가지로 중국계 혹은 조선계 장교들이 사병들과 함께 일계 장교들을 상대로 반란을 이르켜 부대를 점거하는등 반일활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음,


간도특설대는 이와 다르게 일계 장교들에 대한 린치 사례가 1도 없었고 오히려 길게는 2주동안 일제의 항복 이후에도 토벌을 이어나갔음,


일부 부대는 토벌하던 팔로군의 조선계 군인들이 역으로 일제가 항복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즉시 항복하여 무장해제당하기도 하였음,


특설대의 마지막 기록은 8월 26일 마지막 지휘관인 후지이 요시마사 소교가 휘하 300여명의 부대원을 선양에서 여비를 쥐여주고 해산시킨 일임,


백선엽의 경우는 8월 15일 기차역에서 대기하다가 소련군 선발대에 있던 조선어 통역에게 무장해제 당하고 통역의 충고에 따라 평양으로 내려갔음,


김석범은 연락장교를 핑계로 부대를 빠져나간뒤 같이 탈영한 사병과 함께 옷을 갈아입고 신징으로 가는 열차에 탑승하여 탈영함,


신현준은 신징 군관학교 1,2기 출신인 이주일, 언급하지 못하는 누구 중위와 함께 만나 1946년 5월 미군 함정을 타고 귀국했음,


그들이 귀국하기 전에는 베이핑(베이징의 옛 이름)으로 가 광복군에 입대하여 이후 위에 말한것처럼 귀국하였음,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장교들중 대부분은 해방후 국군에 들어와 별을 달고 잘살았음,


이와 다르게 중국에 남은 중국계 만주군 장교들은 류펑줴와 같은 사례를 제외하곤 인민재판에서 총살되거나 한간으로 몰려 매장당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