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초 2월에 올라온 글인데, 글쓴이 본인이 11월 30일날 “오늘 겨울전쟁 시작일임. 내가 올렸던 글 한번 보셈”이라고 해서 11월 30일은 지났지만 한번 올려봄. 겨울전쟁 : 1939.11.30 ~ 1940.3.13. 전황은 아니니 정보탭에 넣어보겠음.
- 필자가 말하는 “러시아가 소련처럼 할 수 없다는 생각은 위험하다”는 말은 러시아랑 소련이랑 여러 면에서 다르기 때문에 개인적으론 좀 회의적이지만 그래도 들을 가치는 있다고 봄.
- 필자 : 프란츠슈테판 가디. Franz-Stefan Gady. 군갤에서 유명한 사람은 아닌거같아서 다시 소개하자면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3475706
[번역] IISS 연구원 가디가 올린 이번 공세 분석.twthttps://twitter.com/HoansSolo-> 가디 트윗.프란츠 슈테판 가디(Franz-Stefan Gady)는 IISS 연구원으로 공세 시작 전에 우크라군의 소모(attrition) 전략에 대gall.dcinside.com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3287300
IISS 보고서 : 우크라이나군의 소모(attrition) 전략(1)우크라이나의 소모(attrition) 전략By 프란츠-스테판 게이디, 마이클 코프만원문(IISS, PDF, 영어)- 우크라이나군이 현재 취하는 소모(attrition) 전략과 그 필요성에 대해서 역설하는 IISS 보고gall.dcinside.com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3707168
우크라 현재상황에 대한 코멘트.jpg군붕이가 팔로우하는 연구원들이 우크라이나에 현장조사 다녀왔다고 해서그 내용을 좀 올려보겠음.현장조사가 뭐였는고 하니, 내가 팔로우하는 연구원 내지 분석가? 라고 할만한 사람 4명이서 팀처럼 구성해서우크라이나 전선 돌면gall.dcinside.com이것들 참고하면 되고, 이름에다가 오스트리아군 얘기나 오스트리아 방송 등에 자주 출연하는거 보면 런던에서 활동하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추정됨.
- 이 글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건 세묜 티모셴코 원수임. 사실 독소전사에서도 (어떤 의미로든)꽤 알려진 사람이라 굳이 따로 소개 안해도 될듯.
요 약)
1) 사람들은 겨울전쟁에서 핀란드가 보여준 영웅적인 저항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전쟁 말기 소련군이 보여준 작전 · 전술적 개선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2) 소련군은 초기 처참한 실패를 딛고 1940년 1-2월에 걸쳐서 단순한 인해전술이 아니라 체계적인 화력투사, 작전을 좁은 구역에서의 소모전으로 한정, 기초적인 제병협동능력 숙달 및 훈련 개선 등으로 재정비했고, 상대적으로 빠른 시간내에 만네르하임 선 돌파에 성공함. 초기에 비해 불완전한 승리였지만 어쨌든 군사적 승리를 거뒀음.
3) 현 러시아의 경우에도, 상대가 저지른 실수나 실패에만 주목하게 되면, 소련군의 전쟁 초기 실패에만 주목하다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 독일의 전철을 따라갈 수 있다.
(이하 번역)
만네르하임 선 돌파 : 겨울 전쟁 당시의 소련의 전략 · 전술적 적응
By 프란츠슈테판 가디
2023년 2월 8일
1939년 12월 21일은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60번째 생일이기도 했지만, 핀란드에서 벌어진 붉은 군대의 군사작전이 최악의 상황으로 떨어졌던 날이기도 했다. 몇 주 전, 레닌그라드 지역구 공산당 당수 안드레이 즈다노프(Andrei Zhdanov)는 핀란드의 항복문서를 특별하기 그지없는 그날에 스탈린을 가리키는 “보즈드(vozhd)”, 즉 "지도자"에게 직접 생일선물로 전달하겠다며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오히려 12월 마지막 주는 레닌그라드 병원이 엄청난 사상자 숫자에 압도당하고, 핀란드 전선에서 오는 부상자와 죽어가는 징집병들을 가득 실은 열차를 동쪽에 위치한 모스크바까지 보내야 했던 시기였다.
길고 암울하기 짝이 없던 이 여정 끝에 수많은 부상병들이 결국 죽고 말았다. 일찍이 당 관계자들은 단순한 경찰 행동(police action) 쯤으로 생각했던 일이었지만(스탈린 자신도 2주 이상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함), 붉은 군대의 군사적 교착상태로 빠르게 변하고 말았다.
소련군은 레닌그라드 군관구 산하 21개 사단으로 구성된 4개 군(army), 총 45만 명의 병력이 1939년 11월 30일 아침, 공식적인 선전포고도 없이 800마일 길이의 핀란드-소련 국경을 따라 8개의 축선을 따라 진격하기 시작했다. 전직 러시아 제국군 장교였던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Carl Gustaf Emil Mannerheim) 원수 지휘하의 핀란드군은 12월 12일 톨바야리 전투(Battle of Tolvajäri) 에서 붉은 군대에 충격적인 첫 패배를 안겨주었다.
1939 년 12월 11일부터 1940년 1월 8일까지 여러 단계의 교전을 거쳐 벌어진 수오무살미-라테 도로 전투(Suomussalmi and Raate Road battles)에서는 핀란드군의 모티(motti) 전술(적을 포위, 고착시키거나 나누고, 통신 및 보급선을 차단, 결국 단편적으로 파괴하도록 설계된 핀란드군의 기동보병전술)이 널리 쓰였다.
그 결과 소련군은 약 22,000~27,000여명의 손실을 입었고 40대 이상의 전차와 270여대의 기타 차량이 파괴되거나 노획됐다. 기타 다른 군사적 재난도 뒤따랐다. 12월 말이 되자 소련군 사단 다수에서 사상자 수는 무려 70%에 달했다.
소련은 미국이 1,000여명에 달하는 최고의 전투기 조종사를 핀란드에 파견했다고 주장하고, 핀란드군의 주요 방어선인 만네르하임 선(90마일이 넘는 길이의 벙커 시스템. 사실 그마저도 상호 화력지원을 하기에는 수적으로 너무 적었다)을 거론하며 이러한 좌절을 설명해 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철조망(barbed wire), 지뢰밭, 가시철조망(entanglement), 전차 바리케이드 및 도랑으로 보호된 진지는 그 유명한 마지노선보다 강력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결국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이어진 겨울전쟁은 소련의 군사적 승리로 끝났고, 계속전쟁(War of Continuation, 1941-1944)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값비싼 승리를 가능하게 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당시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수많은 군사분석가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소련은 정보전의 실패(1939년 9월 만네르하임 선에 대한 세부계획을 입수, 소련 최고사령부에 넘기긴 했지만)와 더불어 전쟁 첫 몇 주간 엄청난 병력 및 장비손실 무시, 열악한 병참, 부패한 전술적 지휘, 제병협동능력 부재 등 심각한 군사적 좌절과 패배를 겪었고, 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명백히 유사점이 꽤 있는 만큼, 겨울전쟁에서 겪은 소련의 경험을 재검토하는 것이 시의적절하다고 본다.
아마도 이 분석에 있어 두 전쟁간에 가장 중대한 유사점은, 핀란드에서의 붉은 군대와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군 모두 계속 싸우겠다는 결단력을 바탕으로 전략적 · 조직적 · 전술적 적응력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겨울전쟁이나 우크라이나 전쟁 모두 지금까지는 대규모 탈영(desertion)이나 항복(capitulation)이 발생하지 않았으며, 두 군대(붉은 군대와 러시아군)가 심각한 좌절과 패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적인 이유다.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싸우고 있는 러시아군을 평가하기엔 시기상조다. 물론 1939-1940년과 2022-2023년의 결정적인 차이는 서방이 우크라이나에 대규모 군사지원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방의 지원이 없었다면 전쟁은 겨울전쟁의 길로 갔을 것이다.
소모전, 그리고 제병협동기동
핀란드의 저항은 전쟁이 끝난 후 수십년이 지난 후에도 평론가, 군사사상가, 전략가들로부터 "약자를 응원하는 자연스러운 경향(natural tendency to root for the underdog)"과 더불어 계속해서 찬사를 받고 귀중한 교훈으로 여겨져왔다.
겨울전쟁은 당연하게도 냉전 내내 NATO군 장교들이 실시한 여러 워게임에서 집중 조명되기도 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겨울전쟁은 더더욱 두드러지게 됐다. 우크라이나인들의 용감한 저항과 불가능한 역경에 영웅적으로 맞서던 겨울전쟁의 핀란드인들 사이에 유사점이 그려진 것이다.
그러나 전쟁 후기나 소련측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많은 경우 무시되거나, 다소 무심하게 설명된다. 오랜 기간 붉은 군대에 대한 초기 보고서 및 군사적 평가(ex. 독일 참모부의 보고서)가 주로 전쟁 첫 몇 주간에 초점을 맞춰왔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이야기는 소련군이 탄약과 보급품이 극도로 부족한 핀란드군을 우월한 화력을 무분별하게 투사하고 엄청난 숫자로 압도한 것 뿐이라는 말인데, 한 현대 작가는 이를 두고 "소련의 기본 전술은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잘 쳐봐야 불완전한 설명이다. 붉은 군대는 핀란드군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지 몇 주 만에 스스로를 재조직하고, 새로운 전략을 고안하고, 전술적으로 적응하고, 소련의 강점을 활용가능한 작전을 선택할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 당초 소련 정부가 세운 정치적 목표에 미치지 못한 승리에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군사적 승리였다. 작전 수준(operational level of war)에서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핀란드 방어군을 체계적으로 약화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소모전을 채택했다. 전술적 수준(tactical level of war)에서 만네르하임 선을 따라 확고히 자리잡고 요새화된 핀란드군을 몰아냈던 열쇠는 소련 지상군의 성공적인 제병협동작전 구사였음이 입증됐다.
그리고 군사적 전략목표(핀란드 완전점령 또는 공산화)를 달성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전쟁의 작전 및 전술적 수준을 한데 묶었던 요소는 확고히 자리잡은 방어측을 상대로 한 소련군의 대규모 화력이었다. 소련군은 단순한 양적 우세뿐만이 아니라 이 둘(작전 · 전술)을 조합시켰고, 결국 핀란드군의 저항은 상대적으로 빠르게 무너졌으며 1940년 2월, 만네르하임 선은 돌파됐다.
소련의 전략 변화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키릴 메레츠코프(Kirill Meretskov)가 고안했던 소련의 초기 전략은 핀란드 방어군을 압도하고, 방어군을 돌파하고, 소련군 기갑부대가 "종심작전”을 수행하도록 하는, 압도적인 지상공격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소련 제7군이 카렐리야 지협(Karelian Isthmus)의 만네르하임 선을 돌파해 정면 공격을 펼친 뒤 헬싱키를 향해 빠르게 진격하고, 소련 제8군은 라도가 호수 북쪽에서 이 공격을 지원해 남쪽으로 휩쓸고 들어가 만네르하임 선 후방을 협공하는 것이었다. 추가적으로 소련군 2개군이 더 북쪽에서 작전을 수행할 예정이었지만, 전쟁이 카렐리야 지협에서 결정될 것이라는 점은 양측 모두에게 분명했다.
이는 화력을 크게 투사하는 작전이 아니어야만 했다. 당시 소련군 포병이 쓸 탄약보급 임무를 맡았고, 훗날 소련군 포병상원수(chief marshal of artillery : 병과원수)가 되는 니콜라이 보로노프(Nikolay Voronov)는 당시 상관으로부터 화력소모 추정치로 볼 때 작전기간이 12일을 넘지 않아야만 한다는 말을 들었다(스탈린은 캠페인이 신속하며 3주 이상 지속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쟁 낙관론이 일부 소련 장교들과 정치지도부를 휩쓸었던 이유 중 하나는 소련이 1939년 폴란드군을 상대로 신속하게 승리를 거뒀고, 소련이 할힌골에서 일본군을 패배시켰던 탓이었다. 또다른 믿음은 안드레이 즈다노프(Andrei Zhdanov)나 기타 레닌그라드 공산당 관료들이 퍼뜨렸던 생각이었다. 즉, 공격이 시작되면 핀란드 노동계급의 제5열과 대규모 구성원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정부 전복을 도울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1939년 12월 말, 소련군이 핀란드에서 그렇게 번개같은 제병협동작전을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이 명백해지자,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군사적 상황을 재평가했다. 실패의 이유는 다양했지만, 그중 하나는 악천후(1939년-1940년까지 핀란드의 아북극 겨울은 1828년 이후 핀란드에서 2번째로 추운 겨울이었다)와 더불어 그러한 기상조건을 붉은 군대가 전혀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형의 경우 호수, 강, 늪으로 갈라진 숲이 이어져 있고, 이토록 열악한 환경을 통과하는 비포장도로는 소수에 불과해 대규모 병력을 신속히 이동시키기 어려웠다. 그 결과 만네르하임 선과 기타 핀란드 방어선을 따라 이뤄지던 정면 공격은 중단됐다. 소련군 참모총장 보리스 샤포시니코프(Boris Shaposhnikov)는 이전에 좀더 보수적인 작전을 설계한 바 있지만 스탈린이 이를 기각했는데, 1940년 1월 초 다시 꺼내져 소련군의 전략에 중대한 전환점이 됐다.
가장 중요한 점은 작전적 관점에서 적의 후방지역을 노린 종심기갑공세에 기반한 종심전투교리의 구현 시도가 거의 중단됐다는 것이다. 그 대신 소련은 좁은 카렐리아 지협을 중심으로 한, 지리적으로 좀더 제한된 소모전을 채택했다. 특히 핀란드군의 핵심 병참 허브이자 헬싱키로 가는 관문인 비푸리(Viipuri : 현 러시아 비보르크) 시 주변이 중심이 됐다.
그곳에서 소련군 포병은 우월한 화력으로 만네르하임 선의 핀란드 방어군을 압도할 것이며, 보병과 결합된 기갑부대는 돌파구가 날 시 지원하기 위해 예비로 확보한 더 큰 기갑제대를 활용, 방어선의 약점을 계속 탐색할 것이다.
이 전략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작전지휘를 맡기기 위해, 스탈린은 1940년 1월 7일, 몽골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던 게오르기 주코프와 더불어 세묜 티모셴코(1895-1970)를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티모셴코는 자신의 새로운 소모 전략을 다음과 같이 단도직입적으로(bluntly) 요약했다 :
“정면 공격에서는 어떠한 적도, 어떠한 적의 조합도 우리와 비교될 수 없다. 정면 공격을 반복적으로 가해 적들이 피흘리게 할 것이다. 즉, 적들에 우리보다 부족한 것(blood)을 잃게 만들 것이다. 물론 우리도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겠지만, 전쟁에서는 자신의 손실뿐만 아니라 적의 손실도 고려해야만 한다.”
그러나 자주 인용된 티모셴코의 발언은 (단순한 인해전술이 아닌)화력을 중심으로 구축된 실제 소련군의 소모전과는 대조적인 의미가 돼 버렸다. 티모셴코는 단순히 적군인 핀란드군에게 소련이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내기 위해서는 어떠한 인명손실(price in blood)이라도 기꺼이 감수할 것이란 신호를 보내려 했을 뿐이다.
1940년 1월 첫 주에 새로 임명된 티모셴코는 핀란드에서의 새로운 대규모 공세작전을 위해 군대를 준비하라며 소련군 최고사령부로부터 25일의 시간을 받았다. 티모셴코의 군대에게 약간의 휴식을 부여하기 위해, 소련 공군은 계획과 준비가 집중적으로 시작되는 동안 핀란드군과 민간인을 괴롭히기 위한 10일간의 집중 폭격작전에 착수했다.
소련군의 조직 변화
1940년 2월 초, 전투의 새로운 국면을 대비해 북서전선군(레닌그라드 군관구는 폐지됨)이 신규편성됐고, 티모셴코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약간의 조직 변화만 거쳤다. 티모셴코는 카렐리야 지협에 위치한 60만 명의 병력을 제7 군(14개 소총사단)과 제13 군(9개 소총사단)의 2개군으로 재편했고, 돌파구를 활용하기 위해 자신의 직속하에 7개 사단으로 구성된 예비대를 두었다.
5개 전차여단, 15개 항공연대, 그리고 40개의 스키 대대와 200여개의 스키 편대(squadrons)로 특수편성된 부대들이 배속됐다. 76.2mm에서 180mm에 이르는 화포 2,800여문이 공세를 지원하기 위해 비축됐다.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정치장교가 군 사령관의 결정을 뒤집을 수 있는 집단 지휘시스템도 폐지, 지휘통제를 좀더 효과적으로 개선했다.
티모셴코는 전투부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조치도 취했다. 1월 중순, 그러니까 전쟁 초기 전투에 참전한 2,600여명 이상의 참전용사에게 메달이 수여됐다(전쟁 당시 소련영웅 칭호 400여개를 포함, 용기와 공적에 대해 총 5만여개의 상이 수여됐다.) 병참이 개편돼 소련군의 보급상황은 다소 개선됐으나, 전반적인 질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러나 1940년 1월, 재편의 일환으로 소련군은 처음으로 하루 100g에 해당하는 보드카 배급을 받는 게 가능해졌다. 한 붉은 군대 병사는 이렇게 회상했다 : “서리 속에서도 우리를 따뜻하게 해 주고 힘을 돋웠고, 전투에 신경쓰지 않게 해줬다.” 최전선 부대도 순환배치돼 며칠간 휴식을 취하고 후방에서 전술훈련을 받았다.
더욱이 세뇌(indoctrination)나 선전활동도 공산당 구호보다는 조국 러시아에 대한 애국심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등 강화됐다. 1940년 1월 24일, 스탈린은 붉은 군대 병사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통제분견대(control detachment)라고 불렸던 NKVD 규율대대 창설을 발표했으며, 이는 탈영과 후퇴를 모두 막기 위한 조치였다. 소련 소식통은 두 가지 조치 모두 붉은 군대의 투지를 크게 고양시켰다고 주장했다.
소련의 전술적 변화
만네르헤임은 전쟁 초기 소련의 전술을 "잘못 지휘된 오케스트라(badly conducted ochestra)"에 비유했다. 하지만 그 말은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악기가 모두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르게 말하면 티모셴코는 효과적인 전투력의 구성요소를 이미 갖추고 있으며, 잘 조율된 직 · 간접화력과 복잡한 제병협동작전을 통해 (지뢰밭 · 참호 · 벙커 · 철조망 등이 복잡하게 얽힌)만네르하임 선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소련군 장교들은 새로운 전술이 본질적으로 "갉아먹기(gnawing through)"라고 폄하했지만, 이는 소련군 교리를 개선하려는 티모셴코의 다각적인 접근법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만네르하임 전선에 대한 티모셴코의 공격계획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됐다 :
1) 대규모이면서도 잘 조율된 포격을 쏟아부은 다음,
2) 보병지원하의 기갑 제병협동작전이 뒤따르고,
3) 근접항공지원을 예비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4) 일단 기갑부대가 최전선을 뚫고 나면, 종심전투교리와는 다르게
5) 지원하는 보병과 포병을 앞질러서 후방으로 돌진하지 않는다.
6) 대신 기갑부대는 후속하는 공격부대가 도착하길 기다렸다가, 돌파구 확장을 돕는다.
7) 공격이 격퇴될 경우 붉은 군대는 그냥 공격을 좁은 카렐리야 지협내의 다른 구역으로 옮겨서 천천히 핀란드의 방어선을 무너뜨린다.
티모셴코는 기갑부대 및 보병을 포함한 돌격부대와 포병대, 그리고 근접 항공지원을 위해 투입된 항공기간의 효과적인 협력이 전술적 성공의 열쇠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화력우세만으로는 핀란드군의 방어선을 뚫을 수 없다는 사실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기갑 및 포병의 지원없이 공격하는 보병은 핀란드군, 특히 예비대로 배치된 구축전차 팀의 격렬한 반격이나 잘 준비된 유개호나 벙커에서 버티고 있던 핀란드 수비군의 손에 금방 격퇴됐다. 최소한 기초적인 제병협동능력도 없다면, 전쟁이 한동안 계속될 위험도 있었고 (적어도 스탈린의 생각으로는)서방의 개입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따라서 티모셴코는 제병협동을 개선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로 모든 공격제대에 새로운 무선장비를 장비한 전방 포병관측반을 배치했다. 티모셴코는 공중 및 포병화력의 통합도를 개선하기 위해 사단 규모에서 신호훈련을 조직했다. 더욱이 티모셴코는 핀란드군의 위치와 거점을 파악하기 위한 정찰활동 등, 공격의 선봉에 선 사단들을 위해 엄격한 훈련체계까지 마련했다.
예를 들어, 소련군 제123소총사단은 만네르하임 선의 핵심 거점이자 두 개의 벙커단지(“백만장자 Millionaire”, "포피우스 Poppius")가 자리잡고 있는 숨마(Summa) 마을 인근 라데 도로(Lähde Road)구역에 핀란드군 방어시설의 실물 크기 모형(life-size mockup)을 만들어놓고 3번이나 리허설을 진행했다.
전차 및 포탄사격과 협력해 요새를 공격하는 연습을 한 것이다. 주공부대는 다들 비슷하게 훈련을 받았다. 이처럼 최전선에서 불과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진행된 대규모 훈련에는 많은 경우 "실사격(live fire)" 단계가 포함됐다. 이러한 집중적인 훈련의 결과로, 만네르하임 선 공격을 주도하는 사단에서는 기초적인 제병협동능력이나마 달성됐지만, 기본 전술이나 하급장교의 지휘 면에서는 결함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하급 지휘부가 교리로 경직되고, 하급 및 중급 야전장교들에게 재량권이 전반적으로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붉은 군대의 하급제대는 깊숙한 고정방어에 맞서 일관성 있는 제병연합부대로 기능할 수 있었다.
만네르하임 선 돌파
티모셴코의 재편성 결과, 최전선의 소련군 소총사단 구역은 1~1.5마일 가량까지 줄어들었고 포병도 많이 배치됐다. 소련 제123소총사단만 해도 "백만장자(Millionare)"와 "포피우스(Poppius)" 벙커에 집중한 공격구역에 108문의 화포를 배정했다.
숨마(Summa) 마을을 점령할 예정이었던 인근의 소련 제100소총사단도 같은 양의 화력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다. 두 사단(123, 100사단)은 모두 7군 소속이었는데, 임무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 비푸리의 이름을 딴 1.1마일 길이의 비푸리 관문(Viipuri Gateway) 구간에서 만네르하임 선(Mannerheim Line)을 돌파하는 것이었다.
본 구역에 대한 소련군의 공세는 1940년 2월 1일부터 10일간에 걸친 강력한 포격과 항공폭격으로 시작됐으며, 핀란드 수비군은 약 3,0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단 24시간 동안 무려 30만발 이상의 포탄이 발사됐다.
벙커 단지와 숨마를 향한 소련군의 본 공세는 1940년 2월 11일 오전 11시에 시작되었다.
소련 제123소총사단 소속 제255소총연대는 "포피우스" 벙커를 공격하기 위해 2개 전차중대의 지원을 받았다. 소련군 보병과 기갑부대는 긴밀하게 접촉을 유지했고, 화염병과 가방(폭탄) 돌격으로 전차와 교전하려던 핀란드군의 시도는 격퇴됐다. 소련군 전차들은 그대로 벙커까지 달려가서 총안구를 막아 핀란드군 수비병력을 벙커 밖으로 끌어냈다. 치열한 근접전투가 이어졌다. 13시가 되자 소련군은 벙커를 장악했다.
한편, "백만장자" 벙커를 향한 소련 제245 소총연대(동일 123사단 소속)의 공격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지형이 습지라 전차지원이 부족해 연대는 핀란드군의 외곽 참호시스템에 묶여 있었다. 반격을 당해 연대는 철수했다.
그러나 포피우스 벙커 공략이 성공하는 바람에, “백만장자”의 방어병력은 고립됐다. 핀란드군이 치열하게 저항했으나 여러 차례의 반격 실패 끝에 백만장자 벙커도 마침내 2월 12일이나 13일에 소련군에 함락됐다(정확한 날짜가 언제인지 핀란드와 소련 출처간에 차이가 있음). 전쟁의 중요한 순간이었다.
두 개의 벙커가 점령되면서 만네르하임 선을 따라 이어지는 핀란드군의 진지 전체가 위협을 받게 됐다. 2월 13일, 소련군은 동일한 제병협동작전을 사용, 핀란드군의 두 번째 방어선(주 방어선 후방 약 1마일에 위치한 지원선)도 돌파했다.
역사가 윌리엄 R. 트로터(William R. Trotter)의 저서 <겨울 전쟁(The Winter War)>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공격은 체계적인(methodical) 패턴을 따랐다. 강력한 포격과 공습, 이어서 강력한 전차/보병 공세가 뒤따랐다." 저자 트로터는 소련군 보병들이 개활지에서(in the open) 돌격했음에도 막대한 손실을 감내할 의향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아무리 많은 인원과 차량을 잃더라도, 공격은 각 사단별로 할당된 구역에서 하루에도 세번, 네번, 아니 다섯 번도 더 반복될 터였다. 매일 새로운 소련군 부대가 투입됐다.” 그 단계에서 핀란드군 방어병력은 탄약, 그 중에서 대전차포탄이 극도로 부족하긴 했지만, 애초에 스웨덴제 보포스 대전차포는 소련군의 강력한 포격이 쏟아지고, 소련군 보병들이 진지에 몰려드는 바람에 대부분 운용이 불가능했다. 통신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었고 사상자는 느리지만, 지속 불가능한 수준으로 꾸준히 올라갔다.
겨울전쟁 중 핀란드군 전사자(deaths) 추이. 이건 군붕이가 찾아봐서 덧붙인것.
출처는 아래. 더 정확한 자료가 있으면 지적바람.
https://www.winterwar.com/War%27sEnd/casualti.htm
The casualties in the Winter WarThe casualties in the Winter Warwww.winterwar.com더 중요한 점은 소련군이 벙커 단지를 향한 공세에 앞서 방어병력을 약화시키는 강력한 포격을 가하는 등, 핀란드군 방어선을 무너뜨릴 공식(formular)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카렐리야 지협에 구축된 핀란드군의 진지가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2월 말 핀란드 정부가 평화 회담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을 당시, 비푸리에 조성된 임시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곧 헬싱키로 가는 길이 소련군 침략자들에게 열리고 말았다.
전쟁은 2주를 더 갔고, 비푸리(Viipuri) 시에서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소련군은 1940년 3월 12일 모스크바 평화 조약이 체결된 지 3일 후, 105일간의 치열한 전투가 공식적으로 끝날 때까지 비푸리의 방어병력을 모두 몰아내지 못했고, 그곳의 핀란드군은 소규모 보병전술에서 다시 한번 우월함을 보여주었다.
결 론
핀란드군은 전쟁 당시 붉은 군대의 전략 · 전술적 적응을 확실히 알아차렸지만, 전후 평가에서는 핀란드군의 시수(sisu : 배짱, 용기)와 핀란드군이 보여준 능숙한 소규모 보병전술, 모티(motti)의 전설보다는 주목도가 떨어졌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대다수의 초기 평가가 1940년 2월과 3월에 벌어진 소련군의 작전보다는, 캠페인 첫 몇 주간 소련군이 겪은 실패에 바탕을 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독일군 게네랄슈타브(Generalstab : 참모부)는 1939년 12월 31일 붉은 군대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양적으로는 거대한 군사력이지만 ‘양(mass)’에만 의존함(commitment). 조직, 장비, 지휘 모두 만족스럽지 못함. 지휘원칙은 좋음. 그러나 지휘부 자체는 너무 어리고 경험도 부족함. 통신, 교통 모두 좋지 않음. 군대 자체가 그닥 균일하지 않음. 특성이라곤 없음(no personalities). 병사들은 온순하고 단순하며, 보잘것없는 것에 만족해버림. 치열한 전투시 군대의 전투력이 의심스러움. 러시아군의 '양'은 현대적인 장비와 뛰어난 지휘력을 갖춘 군대에 상대가 되지 않을 것.
독일 참모부는 전쟁의 두 번째 단계와 핀란드의 패배 이후에도 붉은 군대에 대한 평가를 절대 수정하지 않았으며, 마이클 코프만(Michael Kofman)과 스티븐 코트킨(Stephen Kotkin)이 논한 것처럼, 나치 국수주의(chauvinism)는 독일의 전략을 약화시켰다.
블라디미르 그렌달(Vladimir Grendal) 상장처럼 초기 공세작전의 실패에 책임이 있는 소련군 장교들도 붉은 군대 병사들의 열악한 훈련과 규율을 탓하며, 전쟁을 이긴 건 결국 소련의 "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필자가 보여주려고 한 것처럼, 이는 단순화된 서술에 불과하다. 1940년 1월, 붉은 군대는 불과 25일 이내에 군을 재편성하고, 전략을 수정했을뿐만 아니라, 사기와 부대결속력(unit cohesion)을 유지하면서도 복잡한 제병협동작전 수행에 필요한 기초적인 기술까지 개발해 결국에는 만네르하임 선을 무너뜨렸다.
핀란드에서 거둔 소련군의 성과를 평가하기 위해 1940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전후 회의에서 한 소련군 소총사단장은 이러한 결과로 거둔 군사적 효율성을 두고 핵심 근거를 간결하게 제시했다 :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 군대는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그들은 적을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최종 분석에서 군사적 승리와 패배를 갈랐던 요소다.
오늘날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겨울전쟁에서 얻을 수 있는 잠재적 교훈을 살펴보자면, 상대적으로 훈련도 부족하고, 전술적 지휘력도 부적절하고, 장비가 부족한 징집병들조차도 올바른 지휘하에서는 전략적, 조직적, 전술적 적응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러한 군대는 세 가지 수준(전략적, 조직적, 전술적) 모두에서 충분한 숙련도를 달성, 궁극적으로 동기부여도 더 높고, 전술적으로도 우월하지만 숫자가 적고 장비도 열악한 군대를 상대로 군사적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물론 핀란드군은 대규모 제병협동작전을 마스터한 적이 없으며, 반격에는 능했지만, 공세시 성과는 전반적으로 낮았다).
그러나 한 평론가는 "푸틴은 우크라이나에서 싸우고 있는 러시아군을 위해 이렇게 엄격한 하향식 적응과정을 촉진하기 위한 21세기형 티모셴코를 아직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군사적 문화, 경직된 리더십, 늘어나는 손실, 엄격한 교리 준수 때문에 이러한 일은 일어날 리 없다”고 가정해버리는 것은 실수다. 붉은 군대 내에서는 중대, 대대, 연대, 심지어 사단급에서도 지휘가 훌륭했던 경우는 애초에 예외였으며, 겨울전쟁 내내 붉은 군대의 규칙도 아니었으며, 붉은 군대는 여전히 핀란드군에 비해 전술적으로 열악했다.
그러나 붉은 군대는 여전히 중요한 지점에서 적응에 성공했다. 물론 오늘날의 러시아군은 1930년대의 붉은 군대가 아니다. 그러나 2023년의 러시아군을 과소평가한다면, 우리는 1939-1940년 겨울전쟁 당시 스탈린의 병사들을 관찰했던 수많은 사람들과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자만심(hubris)을 입증한다는 이유로 적이 저지른 실패에서만 전훈을 얻고, 적의 적응과 성과를 무시하고, 과정 전체에서 일어난 일에 주목하기보다는 전쟁의 일부를 일반화하는 바람에 잘못된 것을 배워갔던, 독일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아야만 한다.
끝.
읽어줘서 감사.
이런글이 개추받아야
제아 굳
설마 독일인????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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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셴코가 지휘권 잡고 승기 잡은건 알았는데 이런 내막이 있었구나
나도 조정은 했다는데 그게 구체적으로 뭔지 몰랐는데 좋은글이다 싶어서 가져옴ㅋㅋ
저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저평가 되는 원인 중 하나는 이듬해 바르바로사에서 기습당한 거 치고도 엄청 밀려서겠지. 전장에서 빠르게 적응했다는데 왜 그 다음 해에 자기랑 비슷한 체급의 국가를 상대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냐? 라고 하면 할 말이 없어져버리는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