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10월 말에 중공군 부대의 공격에 미제1기병사단 8연대
가 박살이 났을때 맥아더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자신의
계획을 제고했어야 했다. 이미 전방 사단들에서 중공군 포로를
심문한 결과 일관되게 최소 25-30만의 중국군이 이미 포진 중
이고 이들이 실토한 부대위치로 근거해 군단 및 군 사령부 지도
에는 중국군 단대호로 북쪽지역이 빨갛게 표시되어 있는 상황
이었다. 특히 유엔군 측에 심각한 위험은 서쪽의 8군과 동쪽의
10군 사이에 간격이 너무 벌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간격을
유지하고 진격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결국 8군은 동쪽 측면을 두들겨 맞고 10군단은 서쪽측면을 두들
겨 맞아 무질서한 퇴각을 하게 된다.
자신의 최정예 사단이 박살 났을때 맥아더는 부대를 정비해서
10군단을 다시 8군 휘하에 배속시켜 8군과 10군 사이에 벌어진
틈을 매꿨으면 종심 깊은 방어선을 만들 수 있었다. 왜냐하면 청
천강에서 원산 으로 이러지는 지형은 한반도에서 동-서 길이가
비교적 짧은 편에 속하기 때문이다. 유엔군이 진지를 강화하고
방어진지가 단단해질 수록 초조해지는 건 중공군이었기 때문에
11월 중순쯤에는 더 진지가 강화되기 전에 공격을 감행했을 것
이고 설사 일부 공격에 성공했을 지라도 유엔군을 몇 십킬로 밀
어내는데 그쳤을 것이다. 유엔군은 전열을 지키면서 후퇴했을
것이고 중국군은 보급품 문제로 7-10일이 공세 한계기 때문에
공세 여력을 상실했을때 반격했다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
다. 그러면 미국에 대한 두려움을 갖도 있었던 마오쩌둥과 공산당
수뇌부는 역시 미군한테는 안돼네 하고 철수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설사 철수를 안했더라도 보급도 하기 힘든 북한 산악지역
에서 굉장히 불리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지금와서 보니 참으로 안타까운 통일의 기회를 놓친게 아닌가 싶다.
스키피오는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의 선두 보병대열 2개와 기병대를
격파하고도 바로 진격한게 아니라 부대를 재정비하는 초인적인 인내
력과 판단력을 보여줬으나 1950년 10월 맥아더는 그런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 그는 필리핀과 한국전쟁 초기에 보여줬던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태도와 통일 한국을 만든 맥아더 장군이라는 명예에 대한
갈증은 그를 평범한 장군으로 전락시켰고 11월에 유엔군은 대참패를
당하게 되고 통일 한국은 안녕 빠빠인 된게 아닌가 한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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