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기존의 연구에서는 정유재란 초기 군사적 상황 자체보다는 주로 조선 전쟁 지도부, 이순신과 원균과의 관계 혹은 개인을 중심으로 검토되었다. 특히 패전 원인을 중심으로 통제사의 교체, 출정을 강요한 조선 정부의 오판, 조선 수군 지휘부의 문제 등에 대한 것이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다. 칠천량 해전 출정과정에 있어서도 주로 선조를 비롯한 조선 정부와 육군지휘관이었던 권율 등의 강요에 의해서 이순신 대신 통제사직에 오른 원균이 조선 수군을 이끌고 사지인 부산 앞바다로 출정하게 되었다는 논리가 전제되어 있었다.6)이러한 정유재란 초기 연구는 주로 결과 중심적이거나 개인의 역량, 정치적 이해관계만 중심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 결과 조선 수군 전체를 지나치게 피동적인 주체로만 인식하였다. 그러나 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각적인 측면의 검토가 필요하다.(중략)

이러한 소강상태가 일본이 재침략을 위한 증원을 추진함으로써 본격적인 군사행동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가토 기요마사의 도해와 병력 증원등의 일련의 군사적 행동은 명백한 재침 준비과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임을 정유년 들어 변화된 일본군의 대응을 통해서 조선군 역시 가시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조선군의 입장에서는 재침을 억제하기 위해 해로 차단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으며 이것을 위해 2월 10일의 부산포 앞바다, 3월 기문포, 6월 안골포에 진출하였다.100)


그러나 이러한 수준의 군사적 활동만으로는 일본의 재침략 의도를 완전히 억제할 수 없었다. 재침 억제라는 전략 목표를 위해 일본군 보급 체계를 근본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작전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어느 정도 보강된 상태였다. 지난 몇 차례의 출정경험을 통해서 이미 전력을 분산하여 출정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을 자초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따라서 조선 수군은 일본군이 도해가 가능한 시점을 파악하여 압도적인 전력의 대규모 함대를 출정시킴으로써 전략 목표를 달성하고자 계획하여 추진하였다.

최초 진행은 계획대로 되었다. 천 여척에 이르는 일본군의 대규모 함대가 도해하는 시점에 조선 수군 전함대가 이미 길목을 차단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군 주요 지휘관이었던 와키사카 역시 차단에 나선 함대가 지금까지 부산 근해에 출몰하였던 조선 함대의 두 배 규모에 해당하는 160여척101)이나 되었기 때문에 상당한 피해를 예상하였다.(중략)


그러나 돌발 변수가 발생하였다. 와키사카의 표현대로 때마침 풍랑이 거세게 불어왔다. 풍랑은 큰 파도가 되어 조선 수군의 진용을 무너뜨리고 일부는 통제불능으로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까지 흘러갔다.103) 나머지 함대 역시 전열을 가다듬지 못한 상태에서 가덕도 서쪽까지 퇴각했다. 특히 지휘통제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전장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과정은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이어지게 된다.

신효승. (2013). 정유재란 초기 조선 수군의 작전 수립과정과 활동. 역사와경계, 88

KCI 등재논문

요약:
기존연구에선 통제사의 교체, 출정을 강요한 조선 정부의 오판, 조선 수군 지휘부의 문제를 패전의 원인으로 해석하는데 칠천량 해전은 조선수군 입장에서 불가피한거였다. 그런데 돌발변수로 풍랑이 거세게 불어서 조선 수군의 진용을 무너뜨리고 일부는 통제불능 빠트려서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이어진 것이다.














이게됨
이게 KCI 등재 역사학 논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