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발대로 과달카날로 향한 것은 이치키 지대 제1진 960명이었다.


그들 중 약 90퍼센트는 제1회 공격(1942년 8월 20일)에서 전사했다. 이어서 가와구치 지대와 이치키 지대의 제2진이 상륙했다. 그러나 제2회 공격(9월 14일)에서도 그들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전후에 간행된 미국 측 전사에 따르면 제 1진 중에서 16명이 포로가 되었다. 16명의 포로가 누구인지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루 강 하구의 적진을 돌파하려고 야간에 육탄 공격을 감행한 제1진은 잇달아 쓰러졌다. 모래밭은 사체로 가득 차 있었다.


전투가 끝난 뒤 미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사체를 처리했다. 그때 가사 상태였던 이들 중에서 기적적으로 미군의 포로가 된 사람도 있다. 미군의 야전 병원에 입원했다가 그곳에서 사망한 사람도 있다.




스가와라 스스무의 [이치키 지대 전멸]이라는 책에도 그와 같은 포로였던 사람의 증언이 소개되어 있다.


그 포로의 말에 따르면, 그는 웰링턴의 병원에 1년 반쯤 입원했다가 웨더스톤의 수용소를 거쳐 1946년 우라가浦賀로 인도되어 돌아왔다.



포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로 이송된 자, 시카고로 이송된 자 등 다양하다. 하지만 포로가 되었던 이는 이치키 지대 전우회(이치키 카이)에도 좀처럼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1941년 1월 육군상 도조 히데키의 이름으로 시달된 [전진훈]의 "살아서 포로가 되는 굴욕을 당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은 포로가 되었던 이의 부담으로 남아 있다.


전후에도 그들은 굴욕스러운 존재로 취급받았다. 지금도 방위청 전사실에서 편찬한 전사에서는 포로를 '특수 귀환자'라고 표현할 정도인데, 그것이 마음의 상처를 한층 더 깊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이치키 지대의 포로 중에는 지금까지 본명을 밝히지 않고 호적도 전시 사망 사태로 둔 채, 몰래 사회 구석에서 가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포로에 대하여 일본은 전전이나 전후나 결코 관용을 베푸는 나라가 아니다.




오카다 사다노부는 묘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 그는 1982년 후생성의 유골수습단으로 과달카날로 건너가 이치키 지대 병사들의 유골을 모아왔다. 당시 오카다는 아사히카와에 살면서 유통회사의 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수집단에 관한 기사가 지방 신문에 실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어느 날 밤, 오카다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저는 일찍이 이치키 지대의 병사로 제1진에 속해 있었습니다. 포로였습니다. 이름은 A라고 합니다."


이렇게 이름을 밝힌 그는 공병대 소속이었다고 했다.


"과달카날에 남은 전우들의 유골을 수습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렇게 치하하고 나서 A는 마음에 쌓여 있던 한을 풀기라도 하듯이 제1진의 전투 양상, 자신이 포로가 된 경위,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의 상황 등을 털어놓았다. 오카다가 끼어들 틈도 거의 주지 않고 긴 시간 동안 혼자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가끔씩 울먹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다음에도 연락을 하고 싶습니다."


오카다가 이렇게 부탁하자 A는 입을 닫았다.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을 끝으로 그는 전화를 끊었다.



오카다를 비롯한 이치키카이 멤버들은 즉시 유족을 만나보았다.


유족들은 이미 33주기 법회까지 마쳤다며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과달카날에서 전사했다는 것이다. 호적을 봐도 확실히 전사로 처리되어 있었다.



이치키카이 멤버들은 어떤 형태로든 본인이 살아남았을 것이라 생각하고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하지만 소식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찾는 것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것이 본인을 위해서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A가 지금 어떤 호적을 갖고 있는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이었다가 포로가 된다는 것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괴로운 일이었을지 생각하면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오카다는 이렇게 말하면서 미군 해병대원은 이런 괴로움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 미군 해병대원은 오카다에게 보낸 편지에서 포로에 관해 쓴 적이 있다.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전력을 다해 싸웠기 때문에 포로가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일본군 포로는 하나같이 겁을 냈으며, 본명도 말하지 않았고, 계급도 정직하게 밝히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 역시 과달카날에서 포로가 되었던 이치키 지대 병사 A의 소식을 독자적으로 수소문했지만 현재(1999년)까지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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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카 마사야스, 쇼와육군 (원제 昭和陸軍の硏究), 글항아리,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