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추정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그럴듯 하다 여기는 건. 당시 강조가 급히 고려군을 여기저기 끌어모았지만, 지역 별로 다 따로놀며 훈련도 제대로 안된 이들이 다수인 상황인지라. 방진조차 제대로 구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여겼기에. 이러한 방진을 땜빵하려는 목적으로 이동식 방벽을 만들어 운용하지 않았나 하는 이야기가 있음.
익명(125.241)2023-12-28 14:39:00
답글
방진조차 제대로 구사못하는 인력가지고 왜 회전을 고집한거지. 회전말곤 선택지가 없었다고 판단한건가?
익명(5fdhfqt1lph8)2023-12-28 14:40:00
답글
추정이야 이것 저것 있긴한데. 가장 많이 본 건 아무래도 강조의 입지가 매우 취약한 상황이고, 여러 군데에 병력을 분산하여 대응하기엔 신뢰할만한 사람들이 주변에 없었거나 등의 이유 등을 볼 수 있음. 즉 군사적 판단보다는 본인이 처한 상황때문에 그러하지 않았나 보는거. 물론 반대로 그러한 상황이었기에 거란에게 고려군은 이만큼이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단 걸 보여주며 거란군이 물러나길 바라였던게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고 그럼.
익명(125.241)2023-12-28 14:48:00
귀주대첩 묘사한걸 보면 검차로 밀어부치기도 한걸 보면 장창방진 대용으로 사용했던 것 같음.
드루s(jyunlim)2023-12-28 14:42:00
머전차방벽조무사임
갤로그차단먹은밀리터리이야기만함(wrt6jaa27tiz)2023-12-28 14:43:00
'검차' 는 고려의 전매특허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널리 사용된 대기병용 무기임. 수레에 방패와 창칼을 달아 기병들이 넘을 수 없게 차단하는 방법은 동서를 막론하고 널리 용되었음. 검차에 방패 대신에 신기전이나 총통들을 설치하면 그게 화차임.
ㅇㅇ 2(222.110)2023-12-28 15:03:00
강조가 검차진을 이용하며 회전을 시도한 것에 대해서 그의 정치적 입지 불안 탓이란 추정도 있지만, 3차 거란 전쟁에서 그런 문제에서 자유로웟을 강감찬도 대회전을 벌여 승부를 갈랐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부족함.
애시당초 고려군 지휘부는 산성에서 농성하는 것만으론 거란군을 물리칠 수 없고 회전을 벌여 결정적 승리를 거머쥐어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한 거임.
당시 고려의 광군은 사전적 의미론 각지의 농민들을 모아 만든 병사들이지만, 실상은 각 지방의 호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병사들을 모은 거임. 조선시대의 그런 오합지졸과는 레벨이 달랐음. 그래서 강조나 강감찬이나 거란의 정예 기병을 상대로도 충분히 싸워볼만하다고 판단했던거지.
이동식 대전차방벽 아님? 저걸 던져서 기병 잡는 건 아니잖아 ㅇㅇㅇ - dc App
여러 추정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그럴듯 하다 여기는 건. 당시 강조가 급히 고려군을 여기저기 끌어모았지만, 지역 별로 다 따로놀며 훈련도 제대로 안된 이들이 다수인 상황인지라. 방진조차 제대로 구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여겼기에. 이러한 방진을 땜빵하려는 목적으로 이동식 방벽을 만들어 운용하지 않았나 하는 이야기가 있음.
방진조차 제대로 구사못하는 인력가지고 왜 회전을 고집한거지. 회전말곤 선택지가 없었다고 판단한건가?
추정이야 이것 저것 있긴한데. 가장 많이 본 건 아무래도 강조의 입지가 매우 취약한 상황이고, 여러 군데에 병력을 분산하여 대응하기엔 신뢰할만한 사람들이 주변에 없었거나 등의 이유 등을 볼 수 있음. 즉 군사적 판단보다는 본인이 처한 상황때문에 그러하지 않았나 보는거. 물론 반대로 그러한 상황이었기에 거란에게 고려군은 이만큼이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단 걸 보여주며 거란군이 물러나길 바라였던게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고 그럼.
귀주대첩 묘사한걸 보면 검차로 밀어부치기도 한걸 보면 장창방진 대용으로 사용했던 것 같음.
머전차방벽조무사임
'검차' 는 고려의 전매특허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널리 사용된 대기병용 무기임. 수레에 방패와 창칼을 달아 기병들이 넘을 수 없게 차단하는 방법은 동서를 막론하고 널리 용되었음. 검차에 방패 대신에 신기전이나 총통들을 설치하면 그게 화차임.
강조가 검차진을 이용하며 회전을 시도한 것에 대해서 그의 정치적 입지 불안 탓이란 추정도 있지만, 3차 거란 전쟁에서 그런 문제에서 자유로웟을 강감찬도 대회전을 벌여 승부를 갈랐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부족함. 애시당초 고려군 지휘부는 산성에서 농성하는 것만으론 거란군을 물리칠 수 없고 회전을 벌여 결정적 승리를 거머쥐어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한 거임. 당시 고려의 광군은 사전적 의미론 각지의 농민들을 모아 만든 병사들이지만, 실상은 각 지방의 호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병사들을 모은 거임. 조선시대의 그런 오합지졸과는 레벨이 달랐음. 그래서 강조나 강감찬이나 거란의 정예 기병을 상대로도 충분히 싸워볼만하다고 판단했던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