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쇼와18년) 10월, 문부성 전시 비상 조치 방안이 의결되어 문과계열 고등학교의 축소와 이과계 학생의 졸업 자격의 특례 등이 정해졌다.

또한 이듬해 1944년 (쇼와19년) 10월에 징병 연령이 20세에서 19세로 낮아져, 징집된 학도병의 총 수는 13만명에 달했다고 추정된다.
1943년 (쇼와 18년)의 징병 대상자 확대 당시 학도병의 대상이 된 것은 주로 제국 대학, 고등학교, 전문학교 등의 고등 교육 기관에 재학중이던 문과계 학생이었다.

그들은 각 학교에 학적을 유지한 채 휴학 처분되어 징병 검사를 받고 입대했다.
이에 반해 이과계 학생은 무기 개발 등이 전쟁 지속에 필수적이라는 이유로 징병 유예가 지속되고 육군 · 해군 연구소 등에서 대체복무하였다.

그러나 농학부의 일부 학과(농업 경제학과와 농업과)는 "문과"로 간주되어 징병 대상이 되었다.


1943년 10월 21일,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메이지 신궁에서 2만 5000명의 징집된 문과 남학생들과 6만 5000명의 송별행사에 동원된 여학생들이

출진 학도 장행회(송별회)에 동원되었다.

문과생들이 소총을 메고 흠뻑 젖은 채 빗속을 행진하는 가운데, 총리대신 도조 히데키가 기념사를 읊었다.

"제군의 이 불타오르는 혼! 이 젋은 육체! 청신한 혈류! 이 모든 것이 조국의 보물이다.

이 모든 것을 천황페하를 위해 바치는 것은 황국에서 삶을 살아온 제군들이 나아갈 단 하나의 길이다."

오카베 나가카게 문부대신도 송별사를 읊었다.

"여러분의 마음과 혼에는 3천년을 이어져온 황국의 귀한 전통의 혈류가 가득 차 있다."






문과라서...죽었다...




출처 - 일본어 위키백과 '학도병' 항목, 한도 가즈토시의 쇼와사 1권